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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지련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44
장아이링 지음, 김순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대단합니다.
근래에 이만큼 흥분을 안겨준 소설은 없었어요. .
장르소설이나 논픽션, 과학책만 잡히더라고요, 한동안. 비슷한 회로를 훑는 어두운 글들이 한동안 지겨워졌어요. 호러영화를 정말 좋아하시던 엄마가 풍파를 겪는 동안 '사는 게 호러라 호러는 쳐다보기도 싫다'고 선언하신 것과 비슷한 연유에서일까요.
장아이링의 작품들은 번역하기 힘들다고 들었어요. 이를 감안하고 읽어햐해요. 가독성이 떨어진답니다. 번역자의 역량 문제라기 보다 본래 쓰인 방식 자체가 쉽지 않다고 추측했어요(중국어 모르므로 '감히' 추측).
해가 질 무렵 방에 앉아 많은 걸 헤아리지만 모르는 척 하는 여인들. 기대감에 부풀다 직감으로 배신과 더러운 타협에 직면해야 함을 느끼고 쓸쓸히 웃는 여인들이 밟혀 한동안 경성지련 단편들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장아이링은 정녕 '매의 눈'을 가진 작가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중 인물들의 연령대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넓게 펼쳐지고, 다양한 계급의 군상들이 처하게 되는 공간 속 사람들을 응시하는데, 치열하고, 이심전심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냉혹합니다.
이안 감독의 <색계>도 장 아이링의 단편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이 단편집에는 실려있지 않아요-원작과 뉘앙스를 완전히 다른 색채로 텄지요. 장아이링의 <색계>는 오싹할 정도로 비정해요. 사랑의 존립을 강박감 없이 찬찬히 부정하는데 그 처연한 결기에 어깨가 움츠러들었지요. 이 단편집에 실린 마지막 작품 '경성지련' 역시 가슴을 쓰리고 아리게 만듭니다. 20세기 초반, 몰락해가는 명문가의 한 여인이 이혼녀라는 핸디캡을 어떻게 극복하고 재가에 성공하는가, 라는 스토리라인으로 압축되는데요, 이 여인이 혼자 있을 때 어떠한 표정을 짓고, 한숨을 쉬고, 결심을 하고, 체념을 하는지를 기술한 부분을 보면 숨이 막힙니다. 상투적인 요소란 없어요. 여인의 액션에 대한 가족들과 연인, 주변인의 리액션은 작가의 노회한 면을 읽히기 만드는데, 동시에 설득력을 갖추게 만들기도 합니다.
2010년 마지막 주를 이 책과 함께 했는데 어찌나 쓸쓸하던지요. 전쟁통에 성이 무너지고, 그 덕에 자신을 첩으로 삼으려던 남자는 청혼을 해오지만 이로 인한 결합은 결국 이기적인 개체와 개체의 만남에 불과했음을 읊조리는 작가라니. 소설 속 인물들은 결코 독자들만큼 쓸쓸해하지 않아요. 오늘밤도 넘겨야하니 가만가만 자신의 헛헛한 마음결을 쓰게 웃으며 쓰다듬어 볼 뿐, 그 뿐입니다. 그래서 더 비극적입니다. 작가와 인물의 거리두기가 일관되게 유지되어야만 희극이든 비극이든 성공할 수 있구나, 다시 한번 정리했지요.
장아이링은 불가해한 사건들의 길트기를 힘있게 구현하며, 조야한 인과관계를 장식하는데 열중하는 키치적 연애담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사랑해요, 장아이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