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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이영수(듀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때 ABE전집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피곤한 줄 모르고 밤을 새곤 했습니다. 눈 앞의 사물들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 기뻐하고 흥분하면서 읽었습니다. 거대한 괴물들을 뚫고 남극 대륙으로 접근해가는 올드 섀터핸드의 여정이 파국으로 치닫고 돌연변이라는 이유로 추방된 개 빌리의 단단해진 마음으로 다른 행성으로의 여행을 받아들이는 종결이 제시되는 ‘안개 바다’, 익숙한 지명과 지하철역, 상호명 나열 후 이 속에서 다른 세계로의 틈새가 열린다고 가볍게 뻥을 치는 ‘동전마술’은 그 때의 흥분을 상기시켰습니다. 어린 때처럼 앎이 확장된다는 쾌감 때문이라기보다 나이 들며 강해지는 ‘정리의 관성’ 때문에 점점 비루해지는 공간과 시간을 홀대하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만났다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장르문학을 이제야 접하기 시작하고, 듀나의 소설을 처음 읽게 된 저로서는 무한확장을 주저하지 않는 ‘고유명사의 발명들’이 향연을 벌이는 단편들이 반갑기 그지 없었습니다.
사실주의가 요구하는 핍진성에 피곤해 있던 차에, 강박 없이 거침없이 새로운 공간에서 우리 얘기가 펼쳐지는 것을 볼 때 느끼게 되는 쾌감은 잘 쓰인 장르문학을 접할 때 응당 오기 마련인 것인가요. 여행 때문에 읽기를 쉬고 있는 배명훈과 김보영의 작품집도 다시 들춰보고 장르 문학 입문의 계기를 열어준 테드 창 소설도 재독해봐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작년부터 무기력증이 엄습해 오랜 시간 거기 지배당해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누군가 말을 하는 게 싫고, 그걸 듣는 것도 싫고, 제가 어떤 말을 하는 행위도 온당치 않게 보였습니다. 특히 정리에 능한 말과 글들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어떤 이름붙이기도, 어떠한 정의내리기도 조야한 행위로 느껴지고 적절치 않다고 여겨진다면 차라리 위악적인 수다와 수많은 고유명사의 창출로 신명나게 썰을 푸는 게 낫지 않을런지?다른 서평들을 보니 듀나님의 글이 ‘차갑다’는 평을 받네요. 저도 이를 감지한 듯 합니다. 각 단편이 펼치는 장광설 너머에는 할머니의 슬프고 지친 눈이 보입니다. 많이 봤고, 많이 들었고, 부끄럽지 않게 지혜를 갖추었는데 내가 함께 있는 당신에게 말을 건넨다 할 때 이것이 헛소리에 불과하지 않게 만들고 싶다. 무겁거나 엄숙하지 않게. 경박하지도 않게. 화자의 강렬한 감정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소설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장르문학의 외피를 두르고 무력증과의 전투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에 이번 기회를 통해 매혹되었습니다. ‘A,B,C,D,E&F'와 ’호텔‘이 지금의 정체성 놀이를 예견했다 한다면 ’디북‘은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고민을 예견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러한 예지력과 정치적 알레고리의 적확함이 분방한 시공간, 혹은 사건 속에서 배치됨으로써 발광하는 데 저는 더 주목하게 됩니다. 각 단편 속에 구축된 세계의 지반이 순전히 작가 머리속에서 창출되는 만큼 부단히 공부하고 나이브한 가치관을 쇄신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일 것이라 예상되는데, 이 단편집만 봐도 듀나님은 분명 (기획면에서) 민첩하고 아주 샤프한 분이 분명할거라는 생각 했습니다. 자꾸 장르문학 초심자로서의 기쁨 고백으로 귀결되네요.^^; 듀나님의 다른 작품들 찾으러 전 이만 서점 나들이 가려 합니다.
1. 전 ‘성녀 걷다’를 제일 재미있게 읽었는데 작가 후기를 보니 ‘독일제 자동인형’에 대한 애정에서 산출된 단편이군요. 카프카의 초단편 소설을 읽을 때의 짜릿한 맛이 있었습니다.
2. 여우골을 보면서 여우들의 사람 둔갑을 신체강탈자의 원판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