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 - 예술의 최전선
진중권 엮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6월
품절


자신이 몸을 움직임에 따라 눈에 보이는 풍경, 세계가 변해간다는 사실로부터 시각이 태어납니다. 그때 세계에 대해 내가 어떻게 노력할 수 있는지를 제대로 학습하지 않으면 세계를 올바로 볼 줄 모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게 유모차지요. 예전에는 아이가 엄마나 아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방향으로 아이를 눕혔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아이가 세계를 향해 바로 누워 있을 수 있도록 대부분의 유모차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경우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거나 앉아 있기만 해도 세계가 움직이고 변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텔레비전과 똑같아서, 완전히 수동적으로 세계를 향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 태도를 낳게 되죠. 굉장히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후지하타 마사키-/쪽

하지만 여러분은 예술작품의 일반적 목적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모든 사람들, 모든 용도, 모든 장소, 모든 시대를 위한 예술작품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스울 정도로 어리석은 이야기죠. 문화적 관행이란 특수한 것이어서 보편성과는 완전히 대립되는 것이니까요. 가령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효율성과 최적화라는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요? 효율성과 최적화는 예술적 실천을 위한 가치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술과 문화를 만들 목적으로 컴퓨테이션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성문 안으로 트로이의 목마를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목각상 안에는 적병들이 숨어 있지요. 지금 저는 도발적인 어조를 사용하여 일부러 논증을 급진적으로 밀고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거기에 동의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점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기대합니다. -?쪽

우리가 컴퓨터를 편하게 느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컴퓨팅 언어를 자연화했고, 그 언어는 우리의 일상어법 속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왜 컴퓨팅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어려운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에 내재된 가치들이 이미 언어 속으로 자연화하여 들어와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컴퓨터 언어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놀이(play)'라는 개념이 지난 20년 동안 겪었던 놀라운 변화를 생각해봅시다. 가장 대표적인 게임인 1인칭 슈팅 게임을 봅시다. 물론 그와는 다른 종류의 게임, 게임 환경, 게임 관행, 게임의 하위문화들이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1인칭 게임을 예로 들어봅시다. 게임에서 다채로운 그림들을 벗겨내면, 인간-기계 실천만 남는데, 그것은 가장 나쁜 종류의 산업 노동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도 사회적 고립 속에서 행해지는 반복적 작업, 사용자와 기계의 강압적 결합, 높은 생산성과 결합된 보상체계가 있으니까요. 군사기술의 습득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런 식으로 '즐거움'의 관념은 상업화되고 도구화되었습니다. -?쪽

물론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게임의 예찬자들은 그와는 다른 게임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반박할 것입니다. 하지만 좋든 나쁘든 여전히 남는 사실은 그런 게임이 그 뿌리에서부터 산업노동과 군사 훈련을 위한 인간-기계 통합을 연구하는 과학의 발전에 영향과 제약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쪽

인공지능과 그것의 기술적 실현을 둘러싸고 있던 분위기를 되돌아보면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1세대 인공지능은 상징적, 수학적, 논리적 추론에 큰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기술의 발전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불의 대수(Boolean algebra, 논리대수)'라는 논리적, 수학적 생각의 특정 양상을 자동화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불의 대수는 그 자체가 완벽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산물입니다. 그 전통에서 나온 기계는 불의 대수를 시연하는 가운데 자기가 그 전통에서 나왔음을 입증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지도, 길을 건너지도 못합니다. 컴퓨팅 담론에는 그런 종류의 지성이 진정으로 중요한 지성이라는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맛있는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거나 도로를 횡단하는 능력은 매우 사소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공지능의 전체 구성은 어떤 의미에서 수많은 진정한 지성들이 실제로 발생하는 곳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쪽

이를 이해하기 위해 교수법적 맥락으로 되돌아가보지요. 우리는 종종 교육은 문제해결에 관한 문제라고, 즉 문제해결에 능숙해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듣습니다. 문제해결은 그 합리적, 수학적, 논리적 사유를 반복하는 활동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교육기관이 있고, 그것을 통해 사회는 사람들에게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문제를 만드는 법을 배운 사람이 있나요?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문제적 상황을 만드는(-말썽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이 문제인지' 제일 먼저 제시하는 능력입니다. 이는 물론 완전히 다른 종류의 지성입니다. 이런 종류의 지성은 우리에게 세계를 그 모든 모순적, 이질적 복잡성 속에 바라보고, 과잉정보의 혼돈 속에서 특정한 문제에는 어떤 특질이 의미가 있으며, 어떤 특질이 적절한지 뽑아낼 것을 요구합니다. -?쪽

그런 것을 하는 법을 배우는 인간집단 가운데 하나가 예술가가 아닐까요? 세계를 바라보면서 '무엇이 문제인지' 말해주는 기계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하나의 분과로서 인공지능이 인간의 것과 똑같은 지성을 갖춘 기계를 만들겠다는 거창한 목표에서 뒷걸음쳐서 코드화된 영역인 '전문화 시스템'으로 후퇴한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쪽


마지막으로 저의 또 다른 프로젝트인 '도망자2'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1989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자율적 예술 작품입니다. 오래된 작품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 예가 그저 이미지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공간, 즉 인간들의 사회적 공간 속에서 인터랙션을 하는 자율적인 행동주를 만드는 데 관련된 종류의 작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게 저의 관심사이고, 이 작품 역시 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