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균형잡기의 어려움에 관하여...
'국민'이라는 노예 - 한국 문학의 기억과 망각
김철 지음 / 삼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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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역시 집사람이 보려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었다. 지난 주였나, 어느 모임에 갔다가 이 책에 실린 논문 가운데 이태준과 김지하를 비판한 내용에 대해 들은 모양이었다. 우리 집에 처음 온 책들(사온 것이든, 빌려온 것이든)이 으레 그렇듯이, 이 책도 집사람이 가방에서 꺼내놓고 잠시 한눈 파는 사이에 내손을 먼저 타고 말았다. 나 역시 집사람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과연 어떤 글인지 직접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막상 읽어보니 내가 기대했던 것(솔직히 국문학 논문집이니 별 게 있겠나 싶었다.)보다는 훨씬 훌륭했다. 저자의 문제의식에도 상당 부분 공감이 가는 것은 물론이고, 날카로운 분석이라든가, 치밀한 논리와 전거, 그리고 간혹 한 번씩 꼬집어주는 반짝거리는 문장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우선 내 마음에 든 부분은 저자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철저히 거부한다. 즉 모든 것을 흑백논리로, 혹은 안과 밖의 대립으로 파악하는 대신, 그 중간의 회색지대, 혹은 경계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자"는 주장인 것이다. 따라서 그에겐 이른바 한국 현대사나, 혹은 한국 현대문학사에 있어서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구분이 영 미심쩍게만 보이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그는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의 허구성과 폭력성을 직시하고, 차마 정의조차 되지 않은 그런 모호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한 작가나 작품을 난도질하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가령 이광수에 대해서라면, 그가 물론 말년에 친일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순수한 "민족문학사"라는 잣대를 세워두고 그의 "문학사적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 전제인 "민족문학사"라는 것 자체가 성립 불가능한 허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득, 불교계에서 한때 승적도 없이 승려 생활을 하던 김성동을 "파문"시키기 위해, 없는 승적을 새로 만들어야만 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일화가 떠오른다.) 결국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이념은 부정되고 특수하고 구체적인 개인만 남는다. 중요한 것은 이광수의 작품이 현대 한국인의 모습을 얼마만큼 문학적으로 반영하고 있느냐이지, 단순히 그의 친일행적을 문제삼아 일종의 기피인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른바 친일파, 혹은 민족정기를 훼손한 매국노들에 대해 총체적인 "사면장"을 발부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솔직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의 주장이 딱 그렇게 오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는 일종의 "균형잡기"를 시도한 사람이었다. 솔직히 이 책의 1부에 수록된 그의 기고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친일청산"에 관련된 논의가 불거질 때마다, 일종의 신중론이나 객관론을 펼치는 사람은 그야말로 "공적제1호"가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흥분해야 하는가? 진중권의 말마따나 "생각은 머리로 하는 것이니, 가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친일청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야말로 갖가지 막말과 비이성적 논란이 쏟아져 나오는 것일까? 저자는 적어도 "긍정할 것은 긍정하고, 부정할 것은 부정하자"고 주장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 만사를 칼로 두부 자르듯 딱 구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친일이라고 하면 과연 친일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하고, 민족문학이라고 하면 거기서 말하는 민족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어야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친일청산"과 "민족문학론"에서는 그 전제부터가 결코 명료하지 못한 상황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를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신봉자라든지, 혹은 박지향 류의 단순무식 근대예찬론자로 볼 수는 없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다. 과연 일본은 철저한 "악"이고, 조선은 철저한 "선"이었는가? 과연 민족은 초월적인 "실체"인 것인가? 뭔가 행동하고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그 전제부터 샅샅이 음미해 보자는 것이다. (***주1) 그리고 일단 전제가 한 번 정해지면 거기에서 갑작스런 비약이나 돌출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상식" 선에서 생각하자는 것이다. (***주2)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몇 편의 논문 역시 이런 저자의 문제의식이 확장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이태준의 단편 <농군>은 이른바 현행의 "민족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작가의 사실주의, 민족주의 성향이 적극적으로 드러난 기념비적인 작품이지만, 저자는 이 작품이 1930년대에 만주에서 벌어진 만보산 사건에 대한 당시 조선인 특유의 "편견"과 "왜곡"을 오히려 답습한 작품이며, 그 배후에 깔려 있는 저자와 당시 조선인의 인식은 다름아닌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를 보는 방식"과 동일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즉 항상 식민지의 피억압자로 묘사되었던 조선인이, 이때만큼은 일본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만주의 중국 토착민들을 위협하는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태준은 그런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과오를 저질렀고, 이후의 이른바 민족문학사적 관점의 연구자들 역시, 그런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아예 외면해 버렸다는 점에서 더 큰 과오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주3)

그의 또 다른 글인 이광수의 <무정> 판본에 관한 연구 역시 앞서 말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즉 일제 치하에서 신문에 연재되던 당시와는 달리, 해방 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무정>에서는 의도적으로 저자가 사용했던 일본어를 모두 한국어로 바꿔놓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후 여러 출판사를 거치면서 저자의 본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수정과 윤문이 가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1910년대 당시 조선 젊은이들의 풍속도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한 부분이 손실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하긴, 좀 다른 맥락인지는 몰라도, 과연 앞으로 100년 뒤에 "2000년대 한국의 대중가요"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가 있어서 옛날 노래의 가사집을 찾아보는데,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요즘 나오는 노래에 숱하게 들어간 영어 표현이 모두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가사집만 있다고 가정해 보자. 물론 그것만 가지고도 대강 논문 하나쯤 쓰는 데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2000년대라는 특수한 문화적 지형에서 심지어 "유행가조차도 영어에 미쳐 돌아가는" 오늘날의 세태를 정확히 꼬집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글은 주로 서지학적인 관점에서 논의된 것이지만, 저자는 어느 대목에서 "과연 이광수를 현대문학사의 맨 앞줄에 놓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가?"라고 자문한 뒤, 자신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자답한다. 하긴 맞는 말이다. 한 인물의 삶에서 흑과 백이라는 두 가지 극단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의 삶 전체를 흑 아니면 백으로  싸잡아 단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령 괴테가 뉴턴의 광학에 대한 반감으로 <색채론>이라는 "비과학적"인 자신만의 과학론을 출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우스트>나 <베르테르>까지도 싸잡아서 웃음거리로 만들어야 하겠는가? 그럴 순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합리와 상식에 호소하는 저자의 기본 전제가 가장 탁월하게 발휘된 글은, 바로 이 책에 수록된 김지하에 대한 비판글 "민족-민중문학과 파시즘: 김지하의 경우"이다. 여기서 저자의 논리는 이른바 "민족문학"이니 "민중문학"이니 하는 것이 얼마나 무개념적이고 미개념적인 것인지를 지적하면서, 그 대표적인 작가인 김지하의 최근 행적에서 드러나는 파시즘적 광기 역시 "개념이 결여된 민족-민중문학"이 도달할 수박에 없는 귀결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하지만 이 글이 충격적이면서도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까닭은, 저자의 글이 탁월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김지하 자신이 이 글 곳곳에 인용된 스스로의 말을 통해 너무나도 큰 헛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김지하 본인의 갖가지 발언이야말로, 말 그대로 "자뻑"인 동시에 "자폭"이었던 셈이다. 김지하라고 하면 보통 우리는 70년대와 80년대의 김지하, 민중과 저항의 상징이었던 <오적>의 시인 김지하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후 90년대를 거치면서 21세기에 접어든 김지하는 이미 노쇠하다못해 정신분열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나 역시 그래서 초기의 김지하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후 점점 동학이니 생명이니 율려니 천부경이니 하는 쪽으로 쏠려가며, 어딘가 균형을 잃은 듯한 김지하의 행적을 얼핏얼핏 엿보면서는, 이 사람이 어떻게 점점 더 국수주의적, 배타주의적, 그리고 샤머니즘적, 비이성적 사고방식으로 나아가는지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내 인식 속의 김지하는 저항의 상징이었던 "초기 김지하"와 분열적 양상을 보인 "후기 김지하" 두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엔가, 그의 자서전을 읽어가는 도중에, 문득, 김지하라는 "역사적 개인"은 허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오적>을 쓴 것이나, 그로 인해 고초를 치른 이후에 한국 민중운동, 혹은 저항문학의 선두에 항상 서 있었던 것은 그가 어떤 분명한 의도를 지녔거나, 어떤 주의주장이나 대의명분에 적극 헌신해서였다기보다도, 마치 포리스트 검프가 20세기 미국 현대사의 "주인공 아닌 주인공"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로 지독한 "우연"과 "꼬임"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즉 어떤 사상이 김지하를 투사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투사가 된 김지하가 거기에 걸맞는 사상을 찾아 헤맨 꼴이란 것이었다. 이런 의심을 품은 상황에서 저자의 김지하 비판 글을 읽어보니, 결국 내 예측이 어느 정도 옳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공자도 한국사람, 한자와 주역도 다 한국인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김지하, "어느 일본인이 그러는데, 앞으로는 한민족이 전 세계를 지배할 날이 온다고 하더라"며 단언하는 김지하, 심지어 어느 절 경내에 일본 총독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나 "민족정기"에 저해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농약 파는 데 가면 나무 죽이는 약이 있으니까, 그걸 갖다가 주사기로 놓아주면 싹 해치울 수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김지하의 모습이야 이성적 판단이 결여된 광인의 넋두리가 아닐 수 없으니 말이다. 솔직히 김지하에 대해서는 한심스럽다기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짙다. 그래서 더더욱 저자가 김지하에 대한 비판을 마무리하면서 쓴 다음과 같은 문장이 그토록 "절실하게" 다가왔을지 모르겠다.

  • 황지우는 김지하와의 대담을 마치면서 그를, 아주 잠깐의 빛나던 시간을 제외하고 평생을 정신의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불우한 광기의 천재 횔덜린에 비유했다. 그것은 아마 김지하의 존재를 통해서 그나마의 자부심과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던 후배 세대가 뒤늦게 바칠 수 있는 최소한의 헌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끔찍하지 않은가, 백주대로를 활보하는 광기라니. 그것이 아무리 횔덜린의 것이라도.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문득 어딘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분명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성향으로 봐서는 좀 고지식하다 싶을 정도로 합리와 상식에 호소하는 것을 보아, 이른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보수적 성향을 노출시키면서도, 언젠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민족에게 사과하지 못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박해하는 한국이, 과연 툭하면 일본에 대해 사과며 배상 요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선뜻 던지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렇다고 해서 결코 "꼴통" 축에 드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다만 내가 한 가지 의심스러워 하는 것은 역사와 문학에 적용될 수 있는 저자의 사고방식이 단순히 "방법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신념적" 차원에까지 적용되었을 때 어떤 "오만"으로까지 번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즉 박지향이라는 서양사학자가 자기 전공인 영국사를 일종의 "기준"이자 "잣대"로 삼아 한국 근대사를 일종의 "일그러진" 것으로 파악하는 과정에서, 결국 탈근대를 들먹이다보니 알게 모르게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그대로 답습할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었으며, 나아가 자신의 어설픈 논지를 바탕으로 한때 노무현 정부를 원색적으로 비판했던 경우에 고스란히 드러난 조야함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물론 노무현을 비판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판을 하는 경우에도 최소한의 "성실성"은 지녀야 하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박지향의 글에서는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이건, 어디에 기고한 시평이건 간에) 그런 최소한의 "성실성"조차도 찾기 힘들어서 하는 말이다. 단적인 예로, 나는 그의 저서 <일그러진 근대>를 지극히 무성의한 저술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자기 밑의 대학원생이 그런 글은 무슨 논문이니, 혹은 에세이니 해서 써 왔다면 지도교수의 입장에서 박지향 본인은 그 학생을 칭찬할 수 있을 것인가? 박지향 본인에게 한 번 묻고 싶은 질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김철의 합리와 상식에 근거한 "균형잡기"의 경우, 문학과 역사라는 "종이 위"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고 효과적인 것 같지만, 그가 서문에서 이른바 "나는 나 자신을 망명자처럼 느낀다. 한국과 한국인은 나에게 지구상에서 가장 낯설고, 거칠고, 적응하기 힘든 대상이 되었다."(12쪽)고 쓴 순간, 그의 말은 어딘가 "만사를 다 초탈한 현자의 한숨"처럼 느껴져서 약간 의아하기만 하다. 한국 현대문학의 거인들이라 할 수 있는 이태준도 비판하고, 이광수를 두둔하며, 김지하를 "박살내기"까지 했던 그의 "균형감각"조차도 현실에서는 발휘되지 않는 것일까? 나아가 이른바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글에서, 이른바 외국어를 쓰는 순간에는 다들 익숙치 않은 그 말을 제대로 구사하기 위해 신중해질 수밖에 없으니 사람들의 말도 자연스레 신중해지리라고 넘겨짚으면서, 자신은 그런 취지에서 "영어공용화론에 맥락은 다를지언정 동의한다"(53쪽)고 선뜻 말한 순간, 그가 문학과 역사라는 "학문"의 범위 내에서 애써 지켜왔던 "균형감각"은 상실된 듯하다. (그야말로 빈대를 잡기 위해 "맥락은 다를지언정" 초가 삼간 태우는 것에 동의한다는 식의 논리라고나 할까.) 결국 한편으로 저자의 의견에 상당 부분 동감하면서도, 이런 몇 가지 아쉬운 부분에 대해서는 김지하에 대한 것과 비슷한 비판을 가해야 할런지 모르겠다. 즉 "시인 김지하"는 탁월했지만, "예언자 김지하"나 "이론가 김지하"는 엉터리였다고 말이다. 제아무리 종이 위에서, 허구의 세계에서는 대단한 열정을 지닌 시인이었지만, 막상 현실로 뛰쳐나와 좌충우돌하는 순간, 그의 열정은 고상하지만 끔찍한 광기로 변해버렸으니 말이다. 이른바 학문을 하는 사람들, 학문적 엄밀함을 철저하게 고수했던 사람들이 현실(가령 무슨 장관이니 국회의원이니 뭐를 해먹으면서)에서 균형을 잃고 삐끗하는 것 역시, 어쩌면 이런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 ***주1: 사실 이런 식의 "균형잡기"를 시도하다가 기존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주류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한나 아렌트가 아니었을까? 독일 출신의 유대인이었던 그녀는 유명한 "아이히만 재판"을 방청한 직후에, 이 책의 저자와 유사하게 "과연 유대인들은 모두 희생자이고, 독일인들은 모두 가해자였던가? 유대인 중에 부역자는 없었으며, 유대인끼리의 반목은 없었던가?" 하는 요지의 발언을 해서 대대적인 비난을 받은 바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아렌트를 "홀로코스트 부인자"라는 엄청난 저주의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주2: 물론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것에 대해서 나는 약간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이, 가령 비유하자면, 조명설비가 되어 있지 않은 우리 집 창고에 도둑이 들어와 임시로 전구불을 가설해 놓고, 그 안에 있던 물건 중에서 값나가는 것을 모조리 챙겨달아났다고 치자. 그러면 물건 도둑맞은 것은 논외로 하고, 임시로나마 전구불이 공짜로 생겼다고 해서 오히려 도둑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도둑이 전구불을 달아주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큼은 인정하지 않을래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도둑에게 감사해야 할 것은 아니며, 어떤 식으로건 불평과 분노가 섞여나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주제를 놓고 지금도 종종 언론에 까십성 기사가 등장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우리가 일종의 "트라우마"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도둑을 맞은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벗어날 날이 올 것이고, 또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주3: 사실 이태준이 해금 직후에 갑작스레 한국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재조명받았던 데에는, 그가 "월북작가"로 한동안 금지되어 있었다는 데 대한 일종의 보상적 심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광수를 단순히 "친일파"로 매도하고 문학사에서 제명시킨다는 것이 불합리한 일이라면, 이태준이 단순히 "민족주의적" 작품을 썼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를 문학사에서 상위에 놓는다는 것도 불합리한 일은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최근 들어 이태준 역시 "친일" 쪽 작품을 썼다는 사실이 새로이 드러나면서, 그의 "민족주의" 성향을 강조하던 쪽에서는 무척이나 답변이 궁색해지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아마도 김철의 이 논문에 대한 반론을 의도한 듯, "이태준과 비밀 독립운동가 사이의 연관관계"에 주목한 다른 어떤 연구자의 논문이 또 하나 있어서 읽어보았더니, 오히려 김철의 논문이 얼마나 탁월한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왜냐하면 그 또 다른 논문은 무척이나 조야했다고나 할까, 상당히 어설프기 짝이 없었던 것이, 단순히 이태준이 젊은 시절에 백산상회 설립자와 친분 관계가 깊었다는 근거 하나만으로 이태준을 "독립운동가," 혹은 하다못해 "민족주의자"로 포장하려는 시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논리에 약간 비약을 가하자면, 결국 "친일파"였던 춘원과 육당을 알던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였다는 논리도 성립하지 않을까? 안도산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백범조차도 "친일파"였다고 말이다. 하여간 이광수라는 현대문학의 선구자가 "친일파"라는 딱지로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져내린 판국에, 이태준이 오히려 "민족주의자"로 추앙된다는 사실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물론 여기서 갑자기 조선일보 식의 논리로 비약하여 "우리나라에서 현재 활동 중인 국문학자 가운데 고정간첩이 기백만" 어쩌구 하는 식으로 갈 생각은 없다. 다만 구체적인 회색의 현실을 외면한 채, 넘치는 것은 깎아버리고, 모자라는 것은 채워버리면서 흑백논리가 가능한 문학사의 방법이 지닌 극도의 단순성과 우악스러움을  실감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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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 의학과의 낯선 만남


세계 의문화 학술기행단, 데지마와 교토에서 지식의 교류를 보다…폐쇄적인 조선과 달리 문화적 다양성을 일군 19세기 도쿠가와 일본

▣ 이종찬 세계 의문화 학술기행단·아주대 교수


지금 우리 의문화(醫文化)의 뿌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런 의구심을 품은 의료인들이 ‘세계 의문화 학술기행’을 떠났다. 한마디로 지리학적 상상력을 한국인들에게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대탐험이었다. 조선 500년을 거쳐 현대 한국 사회에 이르기까지 조선인들과 한국인들은 지리학적 상상력을 자신들의 사유 체계에서 철저히 거세당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인들은 “해는 중국에서 떠서 중국으로 진다”고 믿었고, 한국인들은 ‘오리엔탈리즘’의 덫에 걸려 미국식 프리즘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여기에서 다른 ‘눈’으로 세계를 인식할 기회를 갖기는 쉽지 않았다.

 

△ 일본 근대의 관문 구실을 한 인공섬 ‘데지마’를 축소한 모형.

 

 

 

조선통신사는 왜 데지마에 침묵했나


그렇다면 학술 탐험단이 지리학적 상상력을 내세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1세기에 갈수록 강고해지는 미국과 중국 양대 제국들 사이에서 자신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획득해야 할 한국인들에게 가장 절실한 사유의 방식이 지리적 상상력이라는 판단에서다. “모든 역사가 풍토적 역사”라고 할 때, 지리적 상상력은 역사 만들기의 으뜸이 되는 사유 놀이이다. 우리는 학술기행을 통해서 지리적 상상력을 체화하려고 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에서 벗어나 의문화를 더듬는 데는 세계를 새롭게 ‘발명’(발견이 아니다)하려는 의미도 내포돼 있었다.

이번 학술기행단은 첫 번째 기착지로 일본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를 선택했다. 우리에게 데지마는 낯선 곳이다. 조선 시대 열두 차례나 에도를 다녀온 조선통신사의 모든 기록에 데지마에 관한 기록을 살필 수 없다. 숙종 45년(1719) 9차 조선통신사에 속해 한양을 떠난 제술관 신유한(申維翰)도 쓰시마섬과 오사카를 거쳐 에도에 다녀왔다. 그 뒤 <해유록>(海遊錄)을 펴냈지만 당시 데지마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조선통신사의 ‘시선’에 네덜란드와의 무역 교류가 허용됐다지만 전체 면적이 4천 평 남짓한 데지마가 들어올 리 없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 정부의 눈으로는 네덜란드라고 하면, 억류 생활을 했던 하멜 같은 ‘오랑캐’에 지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조선은 중국의 프리즘을 통해 서구 문물을 간접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때 일본이 네덜란드를 통해 서구 문물을 직접 수용하고 있던 정황을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관심 목록에 오르지 못한 데지마. 이는 조선 정부의 일본에 대한 인식의 한계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포르투갈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1636년에 완성된 데지마는 도쿠가와 일본과 홀란드(네델란드의 당시 명칭) 사이의 무역 교류를 위해 지은 인공섬이다. 그런 작은 섬이 일본의 근대적 지(知)를 탄생시킨 공간으로 평가받는다. 조선의 한글을 서양에 최초로 알렸던 지볼트도 데지마를 통해 도쿠가와 일본에 접속할 수 있었다.

 

△ 교토를 탐방하는 세계 의문화 학술기행단.(사진/ 세계 의문화 학술기행단)

 

 


알다시피 근대 일본은 ‘번역’에서 출발했다. 서구의 책들은 바로 데지마를 통해 일본으로 소개됐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서양 서적인 <해체신서>(解體新書·1774)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의사들이 데지마를 통해 들여온 책이다. 이 책은 원래 독일인 의학자가 썼는데, 네덜란드어로 번역된 의학서를 스기타 겐파쿠와 그의 동료들이 번역했다. 데지마는 일본이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 데 숨통을 열어주는 구실을 했다. 1690년 데지마에 도착한 네덜란드 의사 잉클버트 캠퍼가 쓴 <일본사>는 열두 번이나 새로 펴낼 정도로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난학(蘭學)은 데지마를 통해 꽃피워 나간 셈이다.


경주와 교토는 한참 다르다


만일 일본의 근대를 이해하려 한다면 데지마의 의의를 파악해야 한다. 물론 데지마를 일본의 관문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차라리 도쿠가와 일본과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차이를 살피는 게 정확할지 모른다. 일본이 데지마를 통해 ‘쇄국’의 숨구멍을 열어놓았다면 조선은 철두철미하게 철옹성을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본이 국토에서 한 줌도 안 되는 데지마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을 베풀었다면, 조선은 연경을 통해서나마 서구를 배우려고 했던 소현세자의 순수한 꿈마저도 짓밟는 ‘경직성’을 보인 것이다. 그 차이는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토를 나들이하며 신라의 고도 경주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은 교토를 피상적으로 살핀 결과일 뿐이다. 교토가 교토인 이유는 도시의 공간이 지식과 사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적으로 ‘교토학파’는 대단한 자긍심을 갖고 있다. 아시아 의학사학회가 도쿄가 아닌 교토에서 발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교토대학의 지하 도서관에는 조선통신사들이 당시 일본에 와서 일본의 의사들과 학문적 교류를 했던 문헌들이 그대로 잠자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의학자들이 모두 무심해서다. 경주가 교토가 되기 위해서는, 교토대학과 같은 전통과 역사의 지식 공동체를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도쿄를 마지막 행선지로 선택했다. “박물관은 과거를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미래를 보여주는 곳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에도박물관’으로 향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로 수도를 옮긴 뒤, 가장 심혈을 기울인 국가적 사업은 에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마실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었다. 도쿄 중심부에 있는 수도(水道) 역사 박물관을 들여다보면, 도쿠가와의 집념은 세계적으로 상하수도 문화가 발달했던 것으로 알려진 로마 시대의 그것을 방불케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일본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탐구하려는 우키요에 미술이 프랑스의 인상주의에 미친 영향에 대해선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런 미학적 탐구의 물질적 토대를 주목했다.

 

△ 일본 최초의 서양 번역서 <해체신서>.

 

 


만일 독일의 월터 베냐민이 에도의 ‘부티크 문화’를 알았다면,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다시 썼을지도 모른다. 일본은 결코 서구를 그대로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19세기에도 인구는 런던 인구를 훨씬 앞질렀다. 도쿄는 위생적으로도 런던보다 깨끗했다. 1877년에 도쿄의 수질을 직접 조사했던 도쿄대학의 애킨슨 교수는 나무로 만들어진 도쿄의 수도관이 런던의 금속 수도관보다 훨씬 위생적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한국의 역사 교육에서 도쿠가와 일본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자문해볼 일이다. 분명히 19세기 도쿠가와 일본은 조선보다 훨씬 앞선 문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계의 치유와 건강 문화를 체계화


우리가 일본의 의문화를 살핀 것은 앞선 문명을 확인하려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세계 내적 존재로서 몸을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실천 행위의 모델을 만들려는 바람에서였다. 그 출발은 몸이다. 몸은 오감의 총집합체이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이 갖춰야 할 실천적 덕목으로 몸의 양생을 꼽았다. 중세의 서구 지식인들이 몸이라는 소우주를 통해 자연과 삼라만상의 대우주를 인식할 수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자. 학술 대탐험에 참여하는 의료인들은 세계의 각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발달해왔던 치유와 건강 문화를 체계화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몸의 치유를 필요로 하는 지역 사회에서 그들의 전통적인 건강 문화를 존중하며 의술 행위를 전개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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