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우리 시대의 고전 15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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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는 저자인 르네 지라르가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주제인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의 ‘모방 메커니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는 인류의 욕망이 동물적인 욕구와는 다르게 근본적으로 타인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즉, 인류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모방’적이며, 인류는 서로에 대한 모방을 통해 문화를 형성하고 일정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모방 욕망과 폭력, 그리고 희생양 메커니즘


그런데 욕망의 모방성은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것이 경쟁적일수록 더욱 가열된다는 점이다. 이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던 ‘노스페이스 패딩’ 문제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노스페이스 패딩’을 구매하는 친구들(경쟁자)이 늘어날수록 그것에 대한 욕망은 더욱 커진다. 모방 경쟁에서 “경쟁자의 등장은 욕망의 정당성과 욕망 대상의 가치를 확인”(23쪽)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점차 가열된 모방 경쟁은 공동체 내부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이로 인해 발생한 극도의 갈등은 (홉스의 표현대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나아가 공동체 자체를 붕괴 위협으로까지 몰아넣게 된다.


지라르는 고대 역사서와 설화, 문학작품들 속에서 자주 엿보이는 ‘전염병’의 상당수가 실제 전염병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까지 심각해진 극도의 사회적 긴장 상태를 일컫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긴장은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소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 필요한 것이 ‘희생양’, 즉 극도의 긴장 상태를 한 번에 해결시켜줄 존재이다.


에페소스의 아폴로니우스 설화는 바로 극도로 심화된 사회적 긴장이 희생양을 통해 해소되는 과정(지라르는 이를 ‘희생양 메커니즘’이라고 부른다.)을 그린 단적인 예이다. 아폴로니우스 설화는 ‘상호모방->상호모방으로 인한 극도의 긴장과 갈등의 전염(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모든 갈등을 한 사람의 희생양에게 전가함(희생양 제의)->갈등의 해소(그리고 사후에 이 희생양은 끝없이 죽임을 당하고 또 부활하는 신, 디오니소스처럼 ‘신성한 자’가 되기도 한다.)’라는 전형적인 희생양 메커니즘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라르는 비록 희생양 메커니즘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데 효과적인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악의 메커니즘’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바로 그것은 희생자를 일방적으로 죄인(‘전염병’의 원인)으로 몰아넣음으로써 갈등을 진정시키는, 즉 갈등과 폭력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있어 ‘덜 나쁜’ 폭력으로 ‘더 나쁜’ 폭력을 대체하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평화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화의 본질이 타인에 대한 모방인 이상, 이러한 모방으로 인한 갈등은 주기적으로 다시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 공동체의 안정을 구하는 행위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수를 위해 소수의 무고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양은 무고하다


그러나 전 세계 곳곳의 여러 공동체들은 아폴로니우스 설화와 같이 희생양 메커니즘 구조가 드러나는 설화와 신화, 종교 등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효율성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사성은 언뜻 기독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신화는 오시리스나 디오니소스처럼 희생양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화들과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신화가 앞선 다른 신화들을 차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라르는 이러한 신화들과 기독교가 결정적인 지점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바로 다른 것들과는 달리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에서는 유일하게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라르에 의하면 『신약』은 일반적인 희생양 메커니즘처럼 희생양을 ‘죄인’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제의에 가담하는 공동체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숨기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과정의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바로 『신약』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러니까 희생양을 죄인이 아니라 온전히 무고(無辜)한 자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예수가 ‘그리스도’ 그러니까 구원자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죄 없는 희생양 예수의 죽음, 그리고 부활로 말미암아 비로소 ‘악의 메커니즘’은 성스러움이라는 탈을 벗고 자기 정체(폭력성)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깨어진 이후의 세상은 어떨까? 혹시 모방 욕망으로 인한 갈등이 통제되지 못해 공동체가 붕괴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갈등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모든 모방 욕망을 억제하고 제거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 지라르는 서두에서 언급하였듯이 '모방 욕망'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여기지는 않는다. 모방 욕망은 사회적 갈등을 촉발시키는 근본 요인이기도 하지만, 인류가 문화를 형성하고 그것을 전승하여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잘 제어해야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류 역사상 무수한 공동체들은 하지 말아야 할 것, 즉 ‘터부’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터부들은 예컨대 십계명에서 말하는 것처럼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식으로 공동체 내부에서 모방욕망이 과열되는 것을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터부들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제한적이며, 결과적으로 모방의 심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는 없다. 예수 시대의 이스라엘 역시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터부인 ‘율법’이 점차 흔들림에 따라 공동체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금기들을 만드는 대신 자신을 모방하라고 말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지라르가 기독교를 옹호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조용한 소유는 욕망을 약화시킨다. 나의 모델에게 하나의 경쟁자를 줄 때, 말하자면 나는 그에게 그가 나에게 심어주었던 욕망을 되돌리는 꼴이 된다. 그리고 그가 내 욕망에 반대하면서 나의 욕망을 강화시키는 바로 그 순간, 내 욕망의 모습이 또 그의 욕망을 강화시킨다.”(23쪽) 그에 따르면, 인류는 예수의 삶(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모방하는 ‘개종’을 통해 비로소 상호 모방의 심화로 인한 영속적인 긴장과 경쟁 상태에서 영구적으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서의 ‘개종’은 단순히 종교를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의 마음가짐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에서의 모방 폭력, 그리고 희생양 메커니즘


르네 지라르는 문학 비평가이자 문화인류학자로서 문학작품들은 물론 고대 신화, 설화, 경전, 그리고 고대와 현대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텍스트들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지라르의 사유가 갖는 의미는 단순히 문학이나 신학적인 지점에만 있지 않다.


이제는 지구화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는 것이 진부하게 들릴 정도로, 현대 사회는 교역의 확대 그리고 교통과 통신 등의 발달로 인해 서로 다른 문화를 가졌던 무수히 많은 공동체들이 마치 하나의 공동체처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다른 욕망들을 마주하고 그것들을 모방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TV와 인터넷 등을 통해 타인의 것을, 삶을, 성공 모델을 본받을 것을 요구받지 않는가. 이것은 지라르의 식대로 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가 예전과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큰 규모의 모방 폭력 문제를 떠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러한 갈등의 징후들은 서로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회, 우리나라는 물론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사회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도심 한복판에서 행해지는 무차별 살인이나 테러, 전혀 모르는 타인을 자살로 내모는 인터넷 악플 문제 등은 물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극도의 스트레스, 무력감, 사회에 만연하는 우울증 등은 이러한 갈등이 점차 심각해져가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을 현대 사회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혹 일시적으로 갈등을 배출할 가십거리를 찾아다니거나, 또는 모든 갈등의 원인을 단지 비정상적인 것에서 찾음으로써, 즉 희생양 메커니즘을 통해서 해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희생양 메커니즘이 가져다주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타인을 모방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가진 의미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독립된 개별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결코 뗄 수 없는 상호관계성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라는 공동체가 진정한 평화를 얻는 방법은 희생양 메커니즘과 같이 우리 안에 타자를 설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배제하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말처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마 19:19)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경쟁적인 모방 폭력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지라르의 사유가 갖는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으며, 이는 사회적 갈등과 폭력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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