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가 민주적일 수 있는 경우는, 지배자들이 투표에 부칠 사안이 아니라고 선언한 주제, 전문가들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하는 주제를 인민이 의제화할 때뿐이다.-13~14쪽
루소에게 이런 신뢰는 "일반의지는 항상 옳은 것이지만 그것을 이끄는 판단이 늘 현명하지는 않다"라는 생각에 의해 곧바로 완화된다. 루소는 갈등적인 경험의 편에서보다는 학습과 교육의 편에서 이 골치 아픈 조서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 "공중은 이익을 원하지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럴 때에는 "옳은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 다니엘 벤사이드, 「영원한 스캔들」-64쪽
르포르는 민주주의를 이렇게 부른다. "사람들이 불확실성을 견디며 살아가기로 동의한 사회형태." "거기서 정치활동은 하나의 한계에 부딪힌다." 민주주의는 정의상 상대주의적인 회의주의자의 역설에 노출되어 있다. - 다니엘 벤사이드, 「영원한 스캔들」-67쪽
랑시에르가 보기에 "사람들이 당에 의해 대표되기를 요구하게 만드는 것"은 피곤함이다. 모든 대의제를 거부하는 것은 당 개념을 단호히 거부함을 함축한다. 당이란 사람들이 스스로 존재하기를 포기하겠다는 의사표명인 셈이다. - 다니엘 벤사이드, 「영원한 스캔들」-74~75쪽
정치를 제거하면 신학이 남는다. … 세속적인 정치, 그 비순수•비확실성•허술한 규약을 거부하면 불가피하게 신학을 끌고 올 수밖에 없다. - 다니엘 벤사이드, 「영원한 스캔들」-78~79쪽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스캔들'에 대해 말한다. … 민주주의는 그것이 끝까지 스캔들을 일으키는 한에서만 민주주의인 것이다. - 다니엘 벤사이드, 「영원한 스캔들」-81쪽
민주주의라는 말은 누구나,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이다. '버락 오바마'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근대 민주주의의 이란성 쌍둥이이자 그 중에서 언제나 더 팔팔하고 꾀바른) 자본주의는 마침내 민주주의를 하나의 '브랜드'로, 즉 제품의 실제 내용으로부터 제품의 판매가능한 이미지를 완전히 잘라내는 상품물신성의 최신 변형으로 뒤바꿔놓았다. - 웬디 브라운,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85쪽
자유민주주의(유럽-대서양 근대성의 지배적 형태)가 유서 깊은 고대 그리스의 용어에 함축된 정치권력의 배분방식 중 한 가지 변종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데모스와 크라시의 결합, 즉 인민의 통치는 귀족정, 과두정, 참주정, 또한 피식민이나 피점령의 조건과 대립된다. 하지만 그 어떤 강력한 논변으로도 원래 민주주의가 대의, 입헌, 심의, 참여, 자유시장, 권리, 보편성, 혹은 평등을 수반했다고 입증할 수 없다. 이 용어는 단순하고 순전히 정치적인 주장, 즉 인민이 자기 자신을 통치하며, 일부나 어떤 대타자가 아니라 전부가 정치적으로 주권자라는 주장만을 담고 있다. - 웬디 브라운,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86~87쪽
평범한 프랑스 지식인에게 민주주의는 텔레비전 앞에 주저 앉은 슈퍼마켓 고객의 군림이나 다를 바 없겠죠. 하지만 제가 얼마 전에 다녀온 한국에서는 불과 20년 전에야 독재가 무너졌고, 국가기계로부터 분리된 집단적 힘에 대한 어떤 생각 같은 것이 인민이 거리를 메우는 스펙터클한 형태[가령 촛불시위]로 옮겨지기도 합니다. -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들’」-131~132쪽
저는 늘 조제프 자코토의 원리에 따라 작업합니다. 그 원리에 따르면 평등이란 하나의 전제이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겁니다. 인민의 권력, 권력을 행사할 어떤 특수한 자격도 갖지 않은 자들의 권력을 뜻하는 민주주의는 정치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의 토대 자체입니다. 만일 권력이 더 똑똑하고, 더 강하고, 더 부유한 자들의 소관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들’」-132쪽
평등은 이런 것을 통해서, 즉 그것의 현실성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훌륭한 전략이나 올바른 지도, 뛰어난 지식 등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이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들’」-134쪽
제가 문서고에서 작업하고 나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역사란 삶밖에 갖지 않은 자들이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틀테면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역사라 불리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삶,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해 어떤 시간성을 구축하는 사람들이 짜는 것입니다. -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들’」-135쪽
민주주의란 통치형태가 아니라는 사실, 헌정형태나 제도형태가 아니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공통의 문제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아무나의 힘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정치 자체의 특별함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 되어왔다. ... 민주주의는 어떤 형태라기보다는 일종의 계기, 최상의 경우에는 일종의 계획이다. - 크리스틴 로스, 「민주주의를 팝니다」-164쪽
중국은 권위주의적인 공산당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매우 빨리 발전했다기보다는 바로 그런 지배 때문에 빨리 발전했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75쪽
중국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는 단지 과거의 잔여물이거나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에서 진행된 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반복이 아니라 미래의 징후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만일 "아시아의 채찍과 유럽 증권시장의 사악한 혈합"이 경제적으로 우리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보다 더 효율적임이 입증된다면 어쩔 텐가? 만일 중국이 우리가 이해하는 바대로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경제발전의 조건이자 동력이 아니라 그 장애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경고라면 어쩔 텐가?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76쪽
아이티혁명은 진정으로 프랑스혁명의 반복이라는 칭호를 얻을 자격이 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끈 아이티혁명은 분명히 '자기 시대를 앞선' 것으로서 '성급'하고 실패할 운명을 짊어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혁명 자체보다 한층 더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아이티가 독립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담긴 위협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아이티 독립은 "모든 백인 국가들에게 무시무시한 광경"이라고. 따라서 아이티는 다른 국가들이 동일한 경로를 택하지 않도록 단념시키기 위해서 경제 실패의 결정적인 사례가 *되어야만 했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77~178쪽
이렇게 노동계급은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완전히 이행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혁명 주체로 구축할 수 있는가? 서구 맑스주의가 정신분석학을 참조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이런 문제가 원인을 제공했다. 요컨대 노동계급의 존재 자체(사회상황)에 각인된 계급의식이 발흥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무의식적인 리비도적 기제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80쪽
예전처럼 사회가 해체되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짧은 호기가 마련되는 예측불허의 기회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악]순환을 깨야 한다. 아마도, 정말 아마도, 이런 극단적인 기다림과 [또 다른] 혁명 주체에 대한 *탐색*은 그것과 정반대되는 상황의 외형, 즉 [진짜로] 혁명 주체를 발견하게 되고, 어디서 그들이 움직이는지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외형을 띠고 있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84쪽
대중이 절박하게 행사하는 폭력적인 자기방어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신의 폭력'의 실례이다. '선과 악 너머'에 있는 이런 행위는 윤리적인 것을 정치-종교적으로 유예시킨다. 일상의 도덕의식에 비춰보면 지금 언급하고 있는 행위는 살인이라는 '부도덕한' 행위로만 보이겠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행위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국가와 경제가 수년, 수세기에 걸쳐 체계적으로 자행한 폭력과 착취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87~188쪽
만일 일군의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자신들의 권리, 인격적 존엄성을 박탈당한다면,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그들은 사회질서에 대한 의무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질서는 더 이상 그들의 윤리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앨런 우드를 인용하자면 "사회질서가 자신의 윤리적 원칙을 실현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곧 그 원칙을 스스로 파괴한 것과 같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89쪽
우리는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주는 교훈을 당당히 되풀이해야 한다. 즉,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그 교훈을 말이다. 바로 여기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핵심 구성요소가 있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일종의 (필연적) 모순어법이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이 되는 국가형태도 아니다. 민중의 새로운 참여형태에 근거해 국가 자체가 근본적으로 뒤바뀔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제로 갖게 된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91~192쪽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민주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이다"라고 썼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주주의가 서로 다른 정치 주체에 의해 활용될 수 있는 텅 빈 틀(아돌프 히틀러 또한 어느 정도는 자유선거로 집권한 것이었다)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룩셈부르크는 이 텅 빈 (절차적) 틀 자체에 '계급적 편향'이 기입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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