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Sunset Park (Paperback)
폴 오스터 지음 / Picador / 2011년 5월
품절


Going to pieces. That was the phrase he kept using during the course of his trip, during the seven conversations he had with her over the thirty-four hours he spent on the road. You mustn't go to pieces.-92쪽

That is the idea he is toying with, Renzo says, to write an essay about the things that don't happen, the lives not lived, the wars not fought, the shadow worlds that run paralleled to the world we take to be the real world, the not-said and the not-done, the not-remembered.-114~115쪽

... he thinks about the missing buildings, the collapsed and burning buildings that no longer exist, the missing buildings and the missing hands, and he wonders if it is worth hoping for a future when there is no future, and from now on, he tells himself, he will stop hoping for anything and live only for now, this moment, this passing moment, the now that is here and then not here, the now that is gone forever.-227~22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 현암사 / 1997년 11월
구판절판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듯 나는 늘 내가 없는 곳에, 이제 막 도망쳐 나왔던 그곳에 있으려 한다. [...] 나는 내가 금방 떠나 온 곳과 달려가는 곳 사이, 자동차에 앉아 있을 때만 행복하다. 오직 자동차 안에서만 그리고 가는 길에서만 나는 행복하다. 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불행하게 도착하는 사람이다. 내가 도착하는 곳이 어디든 상관 없이 도착하면 나는 불행하다.-119쪽

내가 나탈과 빈, 로마, 리사본 그리고 취리히와 베니스에서 쓴 이 메모들은 결국 하나의 죽어 가는 이야기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나는 알았다. 나는 파울을 - 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했다 - 그가 아주 분명하게 죽어 가기 시작하던 바로 그 때 만났었고, 이 메모가 증명하듯이 나는 그가 죽어 가는 것을 십이 년 이상 *보아 왔다.* 그리고 나는 그가 죽어 가는 것을 이용했다. 나는 나의 모든 가능성으로 철저하게 이용했다. 내 생각에 나는 사실 그가 죽어 가는 것을 십이년간 목격한 증인일 뿐이다. 나는 십이 년 동안 죽어 가는 친구로부터 살아 남는 데 필요한 힘의 대부분을 얻어 냈다.-113~11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개정판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품절


문화사는 곧 감염의 역사고, 그 문화를 실어나르는 언어의 역사도 감염의 역사다. 인공 언어가 아닌 한 감염되지 않은 언어는 없다. - 「서툰 사랑의 고백」-19쪽

내 생각으로는, 모든 순결주의가 그렇듯 언어순결주의도 파시즘(또는 집단주의나 전체주의 일반)에 정서의 탯줄을 대고 있다. 국어순화운동의 그 ‘순화’는 옛 전체주의 사회들의 이런저런 재교육캠프들이나 제5공화국 초기 삼청교육대가 목표로 삼았던 순화교육의 ‘순화’다. - 「서문에 붙이는 군말」-22쪽

개인으로서의 미국인, 개인으로서의 프랑스인, 개인으로서의 신생 독립국 시민들을 자유롭게 한 것은 자유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였다. 설령 그것이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였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적’이지 민족주의가 아니다. -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91쪽

인류문화사의 관점에서, 늘상 나를 황홀경으로 몰고가는 한 시기가 있다. [...] 일본 에도 중기 이래의 란가쿠(蘭學:네덜란드 문헌들을 통한 서양 학술 연구)와 메이지 시대 이후의 번역 열풍이다. 에도 시대의 란가쿠와 메이지 시대의 번역 열풍이야말로 한문 문명권과 그리스‧로마 문명권을 융화시키며 동서 문화 교섭의 가장 빛나는 장면을 연출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93쪽

라틴어의 ‘딸언어들’인 로마어들에도 최소한 두 개의 어휘층 - 통속 라틴어가 입을 통해 진화한 단어들과 고전 라틴어가 글을 통해 차용된 단어들 - 이 존재한다. 한국어나 일본어에 최소한 두 개의 어휘층 - 고유어와 한자어 - 이 존재하듯이 말이다. -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110~111쪽

기록 언어로서의 한국어의 출발이 번역문이었다는 것은 꼭 강조돼야 한다. [...] 한글 탄생의 매니페스토라고 할 만한 이 문장 자체가 『훈민정음 언해』라는 이름의 번역문이다. 다시 말해 그 원문은 고전 중국어, 즉 한문인 것이다. [...]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한문의 위세에 눌려 한글 문헌의 축적이 두텁지는 않았지만, 그 두텁지 않은 한글 문헌의 큰 부분이 번역문이었다는 사실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 -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118~119쪽

한국어 문장이 번역으로 시작됐다는 것은 특이한 일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근대 독일어가 루터의 성경 번역으로 시작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고, 유럽의 다른 많은 언어들도 고전언어의 번역문들로써 초창기 규범을 확립했다. [...] 외래어가 됐든 번역투가 됐든, 그것들을 인위적으로 몰아내 한국어를 순화하겠다는 충동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이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120~121쪽

영어는 단지 외국어의 영향에만 둔감했던 것은 아니다. 영어는 그 자체의 ‘타락’에도 무심했다. 독일에서 창궐하던 ‘언어협회’들은 물론이고, 이탈리아의 아카데미아 델라 크루스카나 프랑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해당하는 언어 보호 기관이 영국이나 미국에 없었다는 것은 영어 사용자들의 이런 열린 태도를 반영한다. -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134쪽

언어에 대한 이 세 가지 태도 가운데 어느 것이 바람직한 지가 내게는 자명해 보인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영국형, 즉 개방형이다. 가장 좋은 문화정책이 문화를 그냥 놓아두는 것, 즉 무책이듯, 가장 좋은 언어정책은 언어를 그냥 놓아두는 것이다. 무책이 상책인 것이다. ‘무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정책’을 최소화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146쪽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우리 모두가 중국인이고 한국인이듯. 먼 미래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이미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 유럽에서 온 그 ‘외래문명’은 우리가 조금 늦게 받아들인 재래 문명일 뿐이다. [...] 우리가 모두 그리스인이라는 말은 우리가 모두 개인이라는 말이다. 인류의 기본적 단위로서의 개인, 궁극적 소수로서의 개인 말이다. -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181~183쪽

실상 한자를 혼용하고 싶은 유혹은 한글이라는 문자체계에 내재해 있다. 한글은 음소문자이면서도 낱글자를 음절 단위로 네모지게 모아쓰는 이른바 ‘음절합자식(音節合字式)’ 철자법을 취하고 있다. 즉 다른 음소문자들이 알파벳을 이어 바로 단어를 구성하는 데 견주어, 한글은 일단 낱자들을 네모꼴로 모아서 한 음절을 구성하고 그 이후에 이 음절들을 결합해 단어를 구성한다. 그래서 우리의 철자법은 ‘맞춤법’이기도 하다. 그 ‘맞춤’은 음소를 맞추어 음절을 만들고, 음절을 맞추어 단어를 만드는 과정이다. - 「버리고 싶은 유산, 버릴 수 없는 유산」-192쪽

한글의 문자체계가 우현히 음절 단위의 모아쓰기가 돼 한자가 개입하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자의 개입을 허용하기 위해서 한자처럼 음절 단위의 네모 글자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한글의 불행이다. [...] 한자 혼용에 대한 유혹은 이렇게 한글의 음절문자적 성격에 내재해 있고, 한자를 아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이따금씩 그 유혹을 느낄 것이다. - 「버리고 싶은 유산, 버릴 수 없는 유산」-193쪽

한글맞춤법은 서유럽 언어학계에서 형태음소론이라는 것이 체계화되기 전에 마련됐지만, 놀랍게도 형태음소론의 이론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즉 한글맞춤법에서 하나의 형태소는 늘상 동일한 형태를 갖게 돼 있다. 독립적으로 발화되면 똑같이 ‘낟’이라고 발음되는 낟, 낫, 났, 낮, 낯, 낱 따위 말들의 맞춤법을 구별하는 것이, 한글맞춤법의 형태음소론적 성격을 또렷이 드러내는 예로 흔히 거론된다. 이런 낱말들의 맞춤법은 표음기능만이 아니라 표의기능까지 겸하고 있는 것이다. - 「버리고 싶은 유산, 버릴 수 없는 유산」-196쪽

한국어에는 - 한국어만이 아니라 일본어도 마찬가지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중국어도 마찬가지인데 - 음이 같은 형태소들(이 경우엔 한자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 실상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한자 지식이 필요한 가장 커다란 이유는 한자어에 동형어들 - 동음이의어들 - 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 「버리고 싶은 유산, 버릴 수 없는 유산」-204~205쪽

한자는, 그 이름에서 들어나듯, 중국인의 글자다. 로마자가 옛 로마인들의 글자이듯 말이다. 그러나 로마자가 로마인만의 것은 아니듯, 한자도 중국인만의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중국인의 것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그것을 배척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한글이 한자와 싸워온 과정은 그대로 민주주의가 봉건주의와 싸워온 과정이다. 우리는 한글이 우리 글이어서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사용이 민주주의적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써야 하는 것이다. - 「버리고 싶은 유산, 버릴 수 없는 유산」-216쪽

넓은 의미의 원음주의든 좁은 의미의 원음주의든 이 원칙이 우스꽝스러운 억압으로 변하는 것을 막는 것은 관습 존중의 태도다. 실상 우리는 대부분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런 관습 존중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우리는 ‘도이칠란트’보다는 ‘독일’을 선호함으로써 넓은 의미의 원음주의를 조롱하고, ‘스빠이’나 ‘스따일’이나 ‘어메리커’에 대해서가 아니라 ‘스파이’와 ‘스타일’과 ‘아메리카’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좁은 의미의 원음주의를 비웃는다. 그것이 말들의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그런 관습 존중의 태도가 깊이 뿌리를 내린다면, 가장 완고한 원음주의조차도 감히 헝가리를 ‘마자르오르삭’이라고 부르자거나, 오클라호마는 틀린 발음이므로 ‘오우클러호우머’라고 표기하자고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 「佛蘭西, 法蘭西, 프랑스」-24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어의 풍경들 - 고종석의 우리말 강좌
고종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장바구니담기


나는 개인적으로 국어라는 말보다 한국어라는 말을 선호한다. 국어라는 말에 담긴 자기 중심주의‧주관주의가 사물에 대한 객관적 서술에 알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어‧한국어‧조선어」-16쪽

많은 사람들이 ‘한글’이라는 말을 ‘한국어’의 의미로 사용한다. … 이런 혼동이 생긴 것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서 한국어와 한글이 워낙 견고하게 맺어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 한국어와 한글의 결합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한글 ‘험담’ 두 마디」-44~45쪽

한글이 로마 문자보다 훨씬 더 뛰어난 글자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한글이 로마 글자보다 2천 년 쯤 뒤에 나타난 글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그 2천 년 동안 인류가 쌓은 지식이 한글에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게다가 한글은 그 놀라운 제자 원리에도 불구하고 한자처럼 음절 단위로 네모지게 모아 쓰게 돼 있어서, 음소 문자 본연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 「한글 ‘험담’ 두 마디」-46~47쪽

고유어‧한자어‧외래어는 세 층을 이루며, 또는 동심원을 이루며 한국어를 만들고 있다. 한국어 어휘가 고유어로만 이뤄지지 않은 것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에 고유어로만 이뤄진 언어는 없다. 완전히 단힌 사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자어와 유럽계 외래어 같은 차용어들 덕분에 한국어는 그 어휘를 크게 불렸고, 생각과 느낌의 결을 셈세하게 담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차용어들은 한국어가 받은 축복 가운데 하나다. 그것들은 외국어 단어가 아니라 한국어 단어다. -「한국어, 세 겹의 언어」-54쪽

이들(‘바른말’에 집착을 보이는 사람들)은 어떤 단어나 표현의 옳고 그름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그 언어를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무시하고 있다. 여기서 어원이나 본디의 뜻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관습이다. 그리고 그런 관습이 생긴 데에는 말하는 대중 나름의 심리적‧사회적 이유가 있다. -「역전 앞과 한옥집」-65쪽

말할 나위 없이 둘(‘하느님’과 ‘하나님’) 가운데 옳은 말은 하느님이다. … 마땅히 하느님이 되셔야 할 분이 하나님이 된 것은, 우리말 모음 체계에서 ‘아래아’, 즉 ‘ㆍ’가 불안정해지며 빚어진 삽화에 지나지 않는다. -「하느님과 하나님, 기독교와 개신교」-86~8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다니엘 벤사이드 외 지음, 김상운 외 옮김 / 난장 / 2010년 4월
장바구니담기


투표가 민주적일 수 있는 경우는, 지배자들이 투표에 부칠 사안이 아니라고 선언한 주제, 전문가들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하는 주제를 인민이 의제화할 때뿐이다.-13~14쪽

루소에게 이런 신뢰는 "일반의지는 항상 옳은 것이지만 그것을 이끄는 판단이 늘 현명하지는 않다"라는 생각에 의해 곧바로 완화된다. 루소는 갈등적인 경험의 편에서보다는 학습과 교육의 편에서 이 골치 아픈 조서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 "공중은 이익을 원하지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럴 때에는 "옳은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 다니엘 벤사이드, 「영원한 스캔들」-64쪽

르포르는 민주주의를 이렇게 부른다. "사람들이 불확실성을 견디며 살아가기로 동의한 사회형태." "거기서 정치활동은 하나의 한계에 부딪힌다." 민주주의는 정의상 상대주의적인 회의주의자의 역설에 노출되어 있다. - 다니엘 벤사이드, 「영원한 스캔들」-67쪽

랑시에르가 보기에 "사람들이 당에 의해 대표되기를 요구하게 만드는 것"은 피곤함이다. 모든 대의제를 거부하는 것은 당 개념을 단호히 거부함을 함축한다. 당이란 사람들이 스스로 존재하기를 포기하겠다는 의사표명인 셈이다. - 다니엘 벤사이드, 「영원한 스캔들」-74~75쪽

정치를 제거하면 신학이 남는다. … 세속적인 정치, 그 비순수•비확실성•허술한 규약을 거부하면 불가피하게 신학을 끌고 올 수밖에 없다. - 다니엘 벤사이드, 「영원한 스캔들」-78~79쪽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스캔들'에 대해 말한다. … 민주주의는 그것이 끝까지 스캔들을 일으키는 한에서만 민주주의인 것이다. - 다니엘 벤사이드, 「영원한 스캔들」-81쪽

민주주의라는 말은 누구나,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꿈과 희망을 싣는 텅 빈 기표이다. '버락 오바마'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근대 민주주의의 이란성 쌍둥이이자 그 중에서 언제나 더 팔팔하고 꾀바른) 자본주의는 마침내 민주주의를 하나의 '브랜드'로, 즉 제품의 실제 내용으로부터 제품의 판매가능한 이미지를 완전히 잘라내는 상품물신성의 최신 변형으로 뒤바꿔놓았다. - 웬디 브라운,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85쪽

자유민주주의(유럽-대서양 근대성의 지배적 형태)가 유서 깊은 고대 그리스의 용어에 함축된 정치권력의 배분방식 중 한 가지 변종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데모스와 크라시의 결합, 즉 인민의 통치는 귀족정, 과두정, 참주정, 또한 피식민이나 피점령의 조건과 대립된다. 하지만 그 어떤 강력한 논변으로도 원래 민주주의가 대의, 입헌, 심의, 참여, 자유시장, 권리, 보편성, 혹은 평등을 수반했다고 입증할 수 없다. 이 용어는 단순하고 순전히 정치적인 주장, 즉 인민이 자기 자신을 통치하며, 일부나 어떤 대타자가 아니라 전부가 정치적으로 주권자라는 주장만을 담고 있다. - 웬디 브라운, 「"오늘날 우리는 모두 민주주의자이다……"」-86~87쪽

평범한 프랑스 지식인에게 민주주의는 텔레비전 앞에 주저 앉은 슈퍼마켓 고객의 군림이나 다를 바 없겠죠. 하지만 제가 얼마 전에 다녀온 한국에서는 불과 20년 전에야 독재가 무너졌고, 국가기계로부터 분리된 집단적 힘에 대한 어떤 생각 같은 것이 인민이 거리를 메우는 스펙터클한 형태[가령 촛불시위]로 옮겨지기도 합니다. -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들’」-131~132쪽

저는 늘 조제프 자코토의 원리에 따라 작업합니다. 그 원리에 따르면 평등이란 하나의 전제이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겁니다. 인민의 권력, 권력을 행사할 어떤 특수한 자격도 갖지 않은 자들의 권력을 뜻하는 민주주의는 정치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의 토대 자체입니다. 만일 권력이 더 똑똑하고, 더 강하고, 더 부유한 자들의 소관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들’」-132쪽

평등은 이런 것을 통해서, 즉 그것의 현실성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훌륭한 전략이나 올바른 지도, 뛰어난 지식 등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이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들’」-134쪽

제가 문서고에서 작업하고 나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역사란 삶밖에 갖지 않은 자들이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틀테면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역사라 불리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삶,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해 어떤 시간성을 구축하는 사람들이 짜는 것입니다. -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들’」-135쪽

민주주의란 통치형태가 아니라는 사실, 헌정형태나 제도형태가 아니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공통의 문제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아무나의 힘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정치 자체의 특별함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 되어왔다. ... 민주주의는 어떤 형태라기보다는 일종의 계기, 최상의 경우에는 일종의 계획이다. - 크리스틴 로스, 「민주주의를 팝니다」-164쪽

중국은 권위주의적인 공산당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매우 빨리 발전했다기보다는 바로 그런 지배 때문에 빨리 발전했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75쪽

중국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는 단지 과거의 잔여물이거나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에서 진행된 자본주의적 축적과정의 반복이 아니라 미래의 징후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만일 "아시아의 채찍과 유럽 증권시장의 사악한 혈합"이 경제적으로 우리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보다 더 효율적임이 입증된다면 어쩔 텐가? 만일 중국이 우리가 이해하는 바대로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경제발전의 조건이자 동력이 아니라 그 장애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경고라면 어쩔 텐가?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76쪽

아이티혁명은 진정으로 프랑스혁명의 반복이라는 칭호를 얻을 자격이 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끈 아이티혁명은 분명히 '자기 시대를 앞선' 것으로서 '성급'하고 실패할 운명을 짊어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혁명 자체보다 한층 더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아이티가 독립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담긴 위협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아이티 독립은 "모든 백인 국가들에게 무시무시한 광경"이라고. 따라서 아이티는 다른 국가들이 동일한 경로를 택하지 않도록 단념시키기 위해서 경제 실패의 결정적인 사례가 *되어야만 했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77~178쪽

이렇게 노동계급은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완전히 이행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혁명 주체로 구축할 수 있는가? 서구 맑스주의가 정신분석학을 참조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이런 문제가 원인을 제공했다. 요컨대 노동계급의 존재 자체(사회상황)에 각인된 계급의식이 발흥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무의식적인 리비도적 기제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80쪽

예전처럼 사회가 해체되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짧은 호기가 마련되는 예측불허의 기회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악]순환을 깨야 한다. 아마도, 정말 아마도, 이런 극단적인 기다림과 [또 다른] 혁명 주체에 대한 *탐색*은 그것과 정반대되는 상황의 외형, 즉 [진짜로] 혁명 주체를 발견하게 되고, 어디서 그들이 움직이는지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외형을 띠고 있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84쪽

대중이 절박하게 행사하는 폭력적인 자기방어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신의 폭력'의 실례이다. '선과 악 너머'에 있는 이런 행위는 윤리적인 것을 정치-종교적으로 유예시킨다. 일상의 도덕의식에 비춰보면 지금 언급하고 있는 행위는 살인이라는 '부도덕한' 행위로만 보이겠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행위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국가와 경제가 수년, 수세기에 걸쳐 체계적으로 자행한 폭력과 착취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87~188쪽

만일 일군의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자신들의 권리, 인격적 존엄성을 박탈당한다면,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그들은 사회질서에 대한 의무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질서는 더 이상 그들의 윤리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앨런 우드를 인용하자면 "사회질서가 자신의 윤리적 원칙을 실현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곧 그 원칙을 스스로 파괴한 것과 같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89쪽

우리는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주는 교훈을 당당히 되풀이해야 한다. 즉, 혁명적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그 교훈을 말이다. 바로 여기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핵심 구성요소가 있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일종의 (필연적) 모순어법이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이 되는 국가형태도 아니다. 민중의 새로운 참여형태에 근거해 국가 자체가 근본적으로 뒤바뀔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제로 갖게 된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91~192쪽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민주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이다"라고 썼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주주의가 서로 다른 정치 주체에 의해 활용될 수 있는 텅 빈 틀(아돌프 히틀러 또한 어느 정도는 자유선거로 집권한 것이었다)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룩셈부르크는 이 텅 빈 (절차적) 틀 자체에 '계급적 편향'이 기입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 슬라보예 지젝,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19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