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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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기 1년전만 해도 영화에 관해서 멜로, 로맨틱이라는 단어는 배척을 넘어서 박해의 대상이었다. SF나 고어, 호러, 스릴러 등이 가미되지 않은 것들은 영화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작품성이라는 주관적 잣대로 난도질 당할 수밖에 없는 오로지 여성전용 킬링물이었고, 그것은 절대적인 왕좌를 지키고 있는 남성이라는 왕의 자존심이었다. 그렇지만 배신만이 냉혹한 현실에서 아름답듯이 서른 다섯이란 나이는 로맨틱 코메디나 멜로 영화를 거부할 상황이 아니었다. 봄바람에 실려온 고요하고 희미한 그녀의 웃음소리는 이제 안팎을 가리지 않는 아줌마의 사자후가 되었다. 그녀의 마약같은 영상 취향이 쥐도새도 모르게 서서히 스며들고 녹아든 어느날, 해품달에 취해 에스트로겐이 분비되고 있는 어떤 남성인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와 아이가 잠든 밤 오랜만에 남아버린 시간들을 아름답게 채색하고자 돌렸던 영화채널의 태국영화들에 놀라 가슴이 쿵닥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리모컨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이젠 여성 특유의 감정변화를 읽으며 즐거움에 빠진다. 어떤 남자들이 맨손으로 쇠를 절단하고 유리를 와작와작 씹어먹는 괴력을 가졌더라도 웃음과 눈물의 댐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여성들에게 어떤 무기로 빅토리를 환호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로 미리 경험했던 이 책 『오만과 편견』은 그것보다 10배는 재미있다. 단순히 책의 두께가 읽기의 부담을 가져올 것이란 여행자의 선입관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아쉬움으로 돌변한다. 제인 오스틴은 엘리자베스와 아버지 베넷씨을 통해 골계와 해학의 파노라마 보따리를 기지와 위트로 풀어놓는다. 저 멀리 여우비 내린 들판에 흰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들이 옮기는 경쾌한 발걸음을 따라가보자.

 

장자상속이나 한정상속(민법의 개념과는 다르다)이 시대의 조류인 가운데 성인 여자나 장자가 아닌 남자가 취할 수 있는 포지션은 제한적이다. 이를테면 여자는 유산을 물려받은 장자에게 시집간다든지 아니면 가정교사 등이 되어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친지나 가족에게 경제적 도움을 청하는 비참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하여 과년한 여자들에게 결혼이란 지상 최고의 목적이 된다. 지금의 신데렐라신드롬이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는 소비생활의 원활에 핵심이 있다면 당시는 생계곤란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해결과 '사랑하는가' 하는 자의식에 답이 있었다. 역자의 해설대로 샬롯은 사랑보다는 경제적 풍요를 위해 콜린스를 택하고, 리디아는 부를 탐하기 보다 단지 감성적인 사랑에 몰입해 도망친다. 더불어 경제적인 척도와는 보다 무관하게 수동적으로 연인관계를 발전시키는 제인과 빙리가 있고, 그와는 다르게 능동적으로 사랑을 발전시키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재력이나 가문의 장벽이 문제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일방적이고 가식적인 등반을 통해 사랑과 부를 얻으려했던 빙리양이나 위컴이 추락하고 만 것과 달리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는 솔직함으로 서로에 대한 오만과 편견을 인정하며 상기의 것들을 넘어서는 집중력을 선보인다.

 

한편 샬롯의 선택이나 베넷부인의 노력이 천박하다고 생각할 수가 없듯이, 작가는 위선과 허위의 교양을 덮어쓴 다양한 인물들을 배치하고 독자의 입장에서 그것의 선호나 취사선택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듯하지만, 삶의 방식이나 실존능력은 캐릭터의 중요도와는 무관하게도 삶의 무게가 균형을 이루도록 설계해놓았는 점에서 매우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부자나 빈자나 교양이 있건 없건 살아감에 희노애락은 그 누구도 피해가지 않는다. 진중한 것만이 위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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