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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반양장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런 수필. 그냥 정말 일기같은 수필이 아니라 뜻이 있고 읽으면서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의 수필을 정말 좋아한다. 그런 수필이라면 나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책 역시 무소유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후반부에는 자신의 주변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 사람들 중 주요섭도 있고 도산 안창호도 이광수도 있고. 요즘엔 교과서나 선생님의 이야기속의 인물들을 직접 만난 이야기와 그에 대한 피천득의 이야기를 보고있으니 왠지 신기하기도 하고 놀라웠다.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의 스테판 재키의 할아버지가 바로 피천득인데 이 책 덕분에 피천득 못지않게 스테판재키의 엄마인 '서영이'에 대해서도 조금은 안것 같다ㅋㅋ..
20 봄은 새롭다. 아침같이 새롭다. 새해에는 거울을 들여다볼때나 사랑을 바라볼때나 늘 웃는 낯을 해야되겠다.
29 젊은은 언제나 한결같이 아름답다.
30 민들레와 바이올렛이 피고, 진달래 개나리가 피고 복숭아 꽃 살구꽃 그리고 라일락 사향장미가 연달아 피는 봄, 이러한 봄을 사십번이나 누린다는 것은 적은 축복은 아니다. 더구나 봄이 사십이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녹슨 심장도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건을 못 사는 사람에게도 찬란한 쇼윈도는 기쁨을 주나니, 나는 비록 청춘을 잃어버렸다 하여도 비잔틴 왕궁에 유폐되어 있는 금으로 만든 새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아- 봄이 오고있다. 순간마다 가까워오는 봄.
33 한 주일이 그리 멀더니 일년이 다가옵니다. 가실 때 그렇게 우거졌던 녹음 위에 단풍이 지고 지난 겨울에는 눈도 많이 오더니, 어제 라일락이 자리를 물러서며 신록이 짙어집니다. 젊은 같은 신록이 나날이 원숙해집니다.
36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86 30년 전이 조금 아까 같을 때가 있다. 나의 시선이 일순간에 수천 수만 광년밖에 있는 별에 갈 수 있듯이, 기억은 수십년 전 한 초점에 도달할 수 있는 까닭이다.
119 유치원 시절에는 세상이 아름답고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차고, 사는 것이 참으로 기뻤다. 아깝고 찬란한 다시 못 올 시절이다.
232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산다. 그리고 모든 경험은 이야기로 되어버린다. 아무리 슬픈 현실도 아픈 고생도 애끊는 이별도 남에게는 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당사자에게도 한낱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날의 일기도 훗날의 전기도 치열했던 전쟁도 유구한 역사도 다 이야기에 지나지 아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