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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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는다. 아무것도 소스라치며 자신을드러내지 않는다. 흘러내리는 촛농은 희고 뜨겁다. 흰 심지의불꽃에 자신의 몸을 서서히 밀어넣으며 초들이 낮아진다. 서서히 사라진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 -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아직 살아보지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간다.

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그러나 실은 영원하지 않다-지구도 태양계도 언젠가 사라지니까),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
부서지는 순간마다 파도는 눈부시게 희다. 먼 바다의 잔잔한 물살은 무수한 물고기들의 비늘 같다. 수천수만의 반짝임이 거기 있다. 수천수만의 뒤척임이 있다(그러나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고요에게 건네고 싶은 말

조금 더 이대로 있어달라고.
아직 내가 다 씻기지 못했다고.

더 나아가고 싶은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

어쩌면 아직도 나는 이 책과 연결되어 있다. 흔들리거나, 금이 가거나, 부서지려는 순간에 당신을, 내가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흰 것들을 생각한다. 나는 신을 믿어본 적이 없으므로, 다만 이런 순간들이 간절한 기도가 된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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