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읽으면 읽을수록 잘 짜놓은 퍼즐인데 난 천피스짜리 퍼즐 앞에서 망연자실...물론 뒤에 뤄샤오밍과 관전둬가 정교하게 맞춰줘서...와, 하면서 감탄하면 되지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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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붉은머리타조 > 안녕 권리, 철이 든다는 건 무엇일까

우리는 유효기간 지난 우유 같은 청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썩어 문드러져서 먹으면 토할 것 같은 우유. 객기와 치기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우리는 즉흥적이고 광포한 감정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루소는 '청춘은 제2의 탄생기'라고 했지만 이놈의 망할 제2의 인생은 피기도 전에 썩어버렸다. 현실주의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술판과 밤샘과 오입의 힘을 빌려 죽음을 만지게 될 때까지 자신을 소비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모 채팅 사이트에서는 성별과 나이를 비공개한 사람의 아바타에 검은 선글라스와 붉은 보자기를 씌운다. 화려하게 치장한 남자 아바타와 여자 아바타들 사이에서 이 비공개 아바타는 한동안 미운 오리 새끼 마냥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야 했다. 그런데 어느날부턴가 채팅방 제목으로 비공개만 입장하라는 내용이 떡 하니 붙기 시작했다.
공개 아바타들에 대한 비공개 아바타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영문을 모르고 방에 들어갔던 여자 아바타는 쏟아지는 비난(왜 보자기를 쓰지 않았느냐)과 눈 가리고 아옹 식의 회유(지금이라도 보자기를 쓰면 이 방에 남게 해 주겠다)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공개 아바타들이 모인 방에서는 어땠냐고? 비공개 아바타들이 모인 방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은 없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집단이 생기기 마련이다. 특정 연예인을 좋아하는 모임에서부터 비슷한 장르의 음악을 아끼는 모임, 하다 못해 이름 석자가 같거나, 발 사이즈가 같은 모임까지 사람들은 쉴새없이 나와 비슷한(혹은 비슷하리라고 믿고 싶은) 모임을 만들지 못해 안달한다. 일단 모임에 들어가면 그 안의 사람들과 동화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모임은 그 특성상 언제든 모임의 성격과 맞지 않는 사람은 퇴출시킬 준비가 되어 있으니, 모임의 일원이 된 사람에게 모임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자정해 나가는 능력이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권리'는 이 모임 메커니즘의 문제점을 꿰뚫고 있다. 권상우를 좋아하는 모임 정도는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가입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사회라는 모임은 함부로 탈퇴 버튼을 눌렀다간 매장 당하는 수가 있으니 말이다. 가령 동성애자보다는 이성애자가 더 많은 사회에서 홍석천이 따를 당했던 것처럼, 어딜 가나 구제 대상 1호인 노처녀에 대한 연민이 넘쳐나는 것처럼. 이 알 수 없는 모임의 하나인 사회라는 녀석의 속을 까발려보자, 모임은 사회를 유지시킬 구성원의 생산과 재사회화를 위협하는 동성애자와 노처녀라는 악의 무리를 쳐부숴야 한다. 모임의 공동 목표인 잘 먹고 잘 살자를 거부하는 백수들을 인간 이하의 인격으로 대함으로써, 그들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 해를 끼치는 기생충인지를 깨닫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쉼 없이 노동해야 하며 섹스해야 하고 안주해야 한다. 왜? 그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싸이코가 뜬다'에는 사회의 무지막지함을 알고 있는 스물 셋의 여자아이 오난이가 등장한다. 십 이년간의 정규교육을 마친 오난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혹사당한 몸과 정신을 이웃나라 일본에 가 방목시킨다. 따내야 할 학점을 무시하고 이 사회의 메커니즘을 상징하는 시마다 선생을 농락한다. 끝내는 정답이 아니면 살아 남을 수 없는 세계를 거부하고 오답 사회라는 가상의 현실을 상정해내기에 이른다. 무조건 그래야 하는 것들에 끊임없이 반항하는 것, 그녀는 싸이코다. 싸이코가 되고 싶어하는 가여운(혹은 가벼운) 비(非)싸이코다.

글을 쓰기에 적당한 시간은 밤이며, 그것을 퇴고하기에 알맞은 시간은 아침이라고 어떤 작가는 말했다. 새벽 두 시에서 세 시 사이가 사람이 가장 감상적이 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란다. 맞는 말이다. 태양이 새로 떠오르면 지난 밤 울고불고 짜고 괜히 심각했던 일은 어디 내놓기 좀 낯부끄러워지지 않던가.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지나친 명료함이 좀 미워져, 애써 눈 돌리고 잠자리에 드는 것을 거부한 적도 많았으니.
어른(?)들은 말한다. 너희들 나이 때는 다 그래. 철이 들면 무엇을 우선 순위에 놓아야 할는지 알 게 될 거다. 여우같은 내 마누라, 토끼 같은 내 자식들을 키우려면 아니꼬워도 뭐 같은 사회에 적응해야 하고 좀 더러워도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는 게 약이 될 때가 있을 게다.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래.

스물 셋은 이제 그만 철이 들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마지막 시기이다. 똥을 보며 더럽다고, 냄새난다고 투덜거릴 수 있었던 대학생에서 '네 똥만 구리냐, 내 똥도 구리다' 서로서로 보듬어 주는 사회인으로 가는 마지막 시기. 오난이는 죽음으로써 후자의 세계를 거부했다.
'싸이코가 뜬다'의 싸이코 세상은 어떻게 보면 참 낭만적이다. 지금까지 정답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오답일 수도 있고, 오답이라고 믿어온 것이 실은 정답일 수도 있는 세계다. 그곳에는 나와 다른 사람은 존재할는지 몰라도 틀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난삽한 문장력은 차치하고라도 별점 다섯 개. 하지만 위에서도 밝혔듯이 이 가짜 싸이코가 너무 가벼운 나머지 가엽게까지 보이는 이유는, 모 채팅방에서 비공개 아바타 집단이 공개 아바타 집단을 싸잡아 매도하고 증오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때문이다.
다자이 오사무, 우디 앨런, 김승옥, 무라카미 하루키, 라디오 헤드, 아멜리 노통, 이진경, 마루야마 겐지, 보르헤스 등으로 귀결되는 이 섞어찌개 같은 취향의 묶음이 싸이코의 필요항목인가? 정형화된 코드에 등돌렸던 그들이 만들어낸 비주류의 새 코드는 싸이코의 모임에 합당한가? 대체 누가 싸이코이며, 누가 정상인인가?
이 주류가 되어 버린 비주류가 뜨는 세상은 어떤 맛이 날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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