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시간을 아세요? 베틀북 그림책 49
안느 에르보 글 그림, 이경혜 옮김 / 베틀북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 파란 시간을 아세요?

불을 켜기엔 아직 환하고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하기엔 조금 어두운 시간.

읽던 책을 그대로 펼쳐 놓은 채

생각에 잠기고 꿈을 꾸는 시간.

펼친 책장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시간.

 

땅거미 질 무렵의 어슴푸레한 시간.

그림자는 빛나고, 땅은 어둡고, 하늘은 아직 밝은 시간.

온 세상이 파랗게 물드는 시간.

세상 모든 것들이 조용이 밤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

하늘 끝자락이 붉어지고, 태앙은 멀리 어딘가로 자러 가는 시간.

 

늘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가

돌아갈 때만 조금 달라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시간.

 

그런 파란 시간을 정말 아세요? - (첫 페이지 전문)

 

나는 가끔 나를 위해 그림책을 산다.

두꺼운 어른책들이 수 많은 언어를 나열해 설명하는 것보다 더 명쾌하고 아름답게

삶의 빛나는 조각들과 진리들을 드러내는 책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릴떄나 지금이나 해지고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세상은 왠지마음이 조금 저려온다.

슬픈것은 아닌데, 그저 좀 아릿하고 아련하고 뭐라 딱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다.

 

장그르니에의 '섬'에 보면 '고양이 물루'라는 글 속에서 이런 순간을 표현한 대목이 있다.

 

'해질 무렵, 낮이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그 고통의 시각에, 나는 나의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고 싶어 고양이를 내 곁으로 오라고 불렀다. 내가 누구에게 그 불안한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겠는가? <나를 붙잡아다오> 나는 물루에게 말하곤 했다.

'나는 겁이 난다. 해가 질 때, 내가 잠이 들 때, 그리고 잠에서 깨어날 때, 이렇게 나는

하루에 세 번 겁이 난다. 내가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를 저버리는 이 세번의

순간.. 허공으로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듯 한 그 순간들이 나는 견딜 수 없이 무섭다'

 

아마도 내게 파란시간은 그르니에적인 불안함을 던져주는 시간으로 마음에

남아있는 모양이다.  태양아래선 모든게 확실하지만, 어둠속에선 다시 모든게

모호해 지는 그 두려움.. 오래 혼자 지낼때, 밤은 늘 내게 무서웠다. 파란시간은

내게 그런 두려움과 흔들림을 조금씩 알려주는 시간이었다. 낮동안 나 자신을

감싸던 가식과 위선의 껍질이 벗겨지고, 한없이 약하고 초라한 내가 드러나는 시간..

자신을 비로소 온전하게 마주하는 시간이 왜 그렇게 두려웠을까.

인간이란 본래 살아가는 내내 쉼없이 흔들리는 자신을 애써 붙드는 존재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 시절 나는 고양이 물루같이 흔들리는 내 마음을 붙잡아줄 따뜻한 존재감의 대상이

늘 그리웠다.  그래서 진심으로 '눈으로 나마 그에게 가만히 기대어 보았던' 그르니에를

부러워 했었다. 따듯하게 살아있는 무엇을 만들기는 어려워서 사무실 창가에 푸른것

몇개를 들여놓고 말을 걸고 정을 주어가며 기르던 날들이 떠오른다.

아마도 이 책의 제목에서 그리고 첫 페이지의 글 속에서 나는 문득 마음을 울리는

지난 시절의 무엇을 찾아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머리는 한낮의 빛으로 가득하고, 심장은 한밤의 어둠으로 물들어 있는' 파란시간의 모습이

그 시절의 내 모습인것만 같아서 말이다.

 

이 그림책의 내용은 물론 나의 이런 상념과는 거리가 있다.

태양왕과 밤의 여왕 모두에게서 쫒겨난 파란시간은 결국 낮과 밤 사이로 슬며시

끼어들어 자신의 자리로 만들고 나머지 시간은 낡은 가로등속에 숨어 지낸다.

그리고 사랑하는 새벽공주를 만나기 위해 밤마다 까만 새가 되어 먼곳으로 날아갔다가

동틀 무렵 태양왕이 잠이 깨기 전에 쏜살같이 달아난다.

 

파란시간과 새벽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는 시간들이니 애달픈 그리움이라 하겠다.

 

아마 어린이는 이 글과 그림속에서 자기만의 파란시간을 만날것이다. 어른인 내가

내 나름의 파란시간을 만나듯이 말이다. 함께 읽으며 하루가 저무는 그 사이를

같이 지켜보고, 알아채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참 좋을 것 같다.

 

언젠가 어린 필규가 해 저문 하늘을 보며 '엄마.. 파란시간이 왔어요' 라고 내게

일러준다면 좋겠다. 그래서 같이 파란시간이 주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는 그애만의 파란시간을 마음에 새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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