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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메뉴첩
가쿠타 미쓰요 지음, 신유희 옮김 / 해냄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4년을 사귀던 애인과 헤어지고 처음으로 혼자 보내게 된 주말, 당신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이불 뒤집어쓰고 종일 울던가, 무작정 거리를 헤매이던가, 혹은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도
괜찮겠다. 그러나 이 소설의 첫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 교코는 4년만에 처음으로 혼자 맞이하는 주말에 자신만을 위한 만찬을 준비하기로 하고 근사한 양갈비 스테이크를 만든다.
백화점으로 장을 보러 가는 것도,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시간도 떠나간 애인 생각에 가슴이 저리지만
나만을 위해 정성껏 만든 음식을 맛보면서 혼자여도 충분히 맛있다는 생각에 문득 애인과 보낸 4년의 의미를 깨닫는다.
지금 먹는 이 양고기처럼 그와 보낸 모든 시간들이 전부 천천히 소화되어 나의 영양분이 되고, 에너지가 되었음을 말이다. ' 그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니고 지금도 여전히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러니 억지로 잊지말자고 다짐한다. 밀려오는 쓸쓸함도 양고기처럼 꼭꼭 씹어서 맛보아야 한다. 그것조차 나에게 영양분이 되기 때문이니 말이다.
떠나간 애인을 생각하며 만든 양갈비 스테이크로 문을 연 이 독특한 단편집은 제목처럼 갖가지 사연이 담긴 요리가 메뉴처럼 펼쳐지다가 각각의 에피소드 말미에는 그 요리를 만들수 있는 레시피와 사진이 담겨 있다. 모두 열다섯개의 메뉴로 이루어진 에피소드들은 첫번째 주인공의 친구가 두번째 주인공이 되고, 두번째 주인공이 들리는 옷집 여 주인이 다음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되는 식으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재미난 구성을 하고 있다.
각각의 메뉴에는 그 요리에 얽힌 재미나고 혹 감동적이고 찡한 사연들이 펼쳐지고 마지막엔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법을 따라 읽으면서 눈과 맘으로 그 요리를 함께 맛보게 된다. 물론 그 요리에 깃든 인생의 여러가지 맛들을 음미하면서 말이다.
음식만큼 삶과 사람을 반영하는게 또 있을까.
누구나 가슴속에 잊지못할 음식 한 두가지는 가지고 있다. 그 음식을 만들던 시간, 함께 먹던 사람들, 내게 차려주던 그 사람, 그 마음, 그 사건, 그 시절들을 담고 있는 많은 음식들과 더불어 인생은 흘러가는 법이다. 처음으로 밥을 짓던게 언제였던가. 가슴벅찬 혹은 지독한 후회가 되는 음식도 있을 수 있다. 그립고, 소중하고, 따듯하고, 또 마음 아픈 그 많은 음식과 요리에 깃든 사연들이란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과 인생의 다름아님이기도 하리라.
상실과 외로움도 꼭꼭 씹어 다시 사랑하고 살아갈 에너지로 섭취하는 교코의 이야기나, 사별한 아내가 만들어 주던 냄비요리를 해 먹고 싶어 직원들 몰래 요리학원에 다니는 중년 남자가 마침내 그 맛을 재연해 내고 아내의 영정앞에 한 그릇 바치는 사연들을 읽다보면 우리가 먹는 음식중에 어느것 하나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고보니, 이따금 친정엄마가 끓여주던 그냥 흔하디 흔한 국 한 그릇이 절실하게 그리울 때가 있다. 내가 수없이 먹고 마시던 그 음식들은 사실은 그냥 음식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의 정성, 엄마의 수고, 엄마의 고달픔, 엄마의 지루함, 엄마의 희망과 엄마의 자랑이 한데 녹아 내안으로 흘러 들어와 나를 이루어내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만든 음식을 먹는 남편과 아이에게 나는 무엇을 담아 그들을 이루어 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바람이 차가와지는 요즘 유난히 가슴이 시리고 쓸쓸하다면 당신은 지금 당신에게 힘이 되고, 그리움이 되고, 추억이 되는 한 그릇의 음식이 필요하다. 만일 이제껏 살아오며 그런 음식을 기억해 낼 수 없다면 당신이 그런 추억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어보면 어떨까.
매일 수고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 근사한 무엇을 직접 준비해도 좋고, 혹은 잊을 수 없는 정성을 담아내도 좋다. 솜씨가 없다면 마음만이라도 서툴게 담아보자. 사람을 움직이는건 요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요리를 위해 기울인 마음과 그 요리에 담긴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마음 편하게, 그러나 에피소드 하나마다 마음을 울리는 구절 하나씩 담아내면서 이 가을 맛있는 이 한권의 책을 당신께 권한다. 맛있게 읽고, 모처럼 맛난 요리 하나 만들 마음 생겨난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