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누구나 원하든 원치않든간에 쉼표를 찍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거나, 혹은 실연을 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그저
살아온 길을 돌아보고 나를 돌보고 싶은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럴때 사람들은 흔히 여행을 생각한다. 여행이란것이 꼭 편하고 근사한 것만은 아니라도
있던 곳을 떠나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그속에서 다시 만나는 나를 찾고 싶은 것이다.
떠나고 싶을때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행복하다. 누구나 쉽게 그럴 수는 없다.
그러다 떠날 수 없다 하더라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여행은 있다.
바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녀온 사람들이 적은 여행기를 통해서다.
여기 길이 하나 있다.
타박타박 걸어서 가는 먼 길이다.
양들이 지나고, 포도가 익어가고, 햇볕이 이글거리는 길. 전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어깨를 마주하며 혹은 친구가 되고, 혹은 이방인이 되어 걸어 가는 길이다.
그런데 누구나 이 길을 걷는 동안 자신안에 도사리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만나고
또 쌓여있던 이야기를 만난다. 본래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곱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던 길이었으나 이제는 사람들이 자신속의 내면을 순례하기 위해
이 길을 찾는다.
바로 스페인의 도시 산티아고에 이르는 길이다.
출발점 프랑스의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페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서쪽의 산티아고 시까지 이어지는 800킬로의 길이다. 2천년전 예수의 제자 야곱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부터 이 길을 걸어 왔다. 그리고 산티아고에 묻혔다. 그 후로 수많은 순례자들이 야곱의 뒤를 다라 이 길을 걸었다. 이제는 굳이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도 이 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과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전세계의 사람들이 수없이 찾아와 걷는 유명한 길이 되었다.
저자 김남희는 걸어서 여행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이미 한반도의 남단을 걸어서 지났고, 수많은 나라들을 걸어서 여행한 도보 여행가다.
그런 그녀에게도 산티아고 가는 길은 특별한 기대속에서 시작된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오로지 순례자들을 위해서 존재하고, 또 유지되는 길이다.
순례자들의 표시인 조개껍데기 문양이 말없이 가야할 길을 일러주고, 누구나 '순례자'라는 이름으로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는 길이다. 하루 종일 걸어서 도착한 낮선 도시의 성당에서는 언제나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를 올려주고, 마주치는 사람들은 단지 순례자라는 이유만으로 처음보는 외국인에게 친절과 애정을 베풀어 준다.
다양한 알베르게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이 길의 또 다른 여행이다.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 길을 걷고 있지만, 걷는 동안 마음을 열고, 함께 걷는 이와
그 마음을 나누고, 곁에 있는 이의 마음을 품어보는 시간들이 나이와 인종, 국적을 떠나 모든 사람을 하나로 이어주는 진실된 순간들을 경험하게 한다.
따라서 이 길은 산티아고로 이어지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마음과, 삶속으로 통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바로 그것이 산티아고 가는 길의 가장 큰 매력 이리라.
김남희는 여자다운 꼼꼼함으로 자신의 여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산티아고 가는 길에 필요한 사항들을 빠짐없이 체크해 준다. 그녀의 책은 섬세하고 솔직하게 적어간 글도 잘 읽히지만, 책장마다 빛나는 그녀의 사진들은 산티아고 가는 길을 마음에 품지 않고는 못 베기게 할 만큼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풍경 뿐만이 아니라,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며 사물들까지
애정넘치는 영상으로 잡아낸 솜씨가 일품이다.
마음속에 수많은 갈등과 질문들을 품고 이 길을 출발하는 사람들처럼, 저자에게도 길을 걷는 동안 그 길이 자신에게 일러주기를 바랬던 질문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에게는 아마도 당장 달려가고 싶은 사랑이 있는 듯 했다. 걷는 동안 그녀는 끊임없이 갈등하며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다. 달려가서 그 사랑을 잡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자유롭게 더 많은 세상을 걸어서 지나기를 원하는가.
여행의 말미쯤에서 그녀는 결국 마음속의 해답은 이미 그녀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산티아고 가는 길이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길을 걷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미 제 안에 품고 있던 해답과 마추치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결국 사랑대신 언제든 떠돌 수 있는 자유를 택한다.
그녀의 나이쯤에 사랑을 선택해 가정을 이루고 엄마가 된 나는 그녀의 선택이 부럽지는 않다. 내 선택이 더 낫다고 얘기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의 길을 선택하기 마련이고, 어떤 선택이든 그 선택에 만족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수한 다른 가능성들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므로
그녀는 사랑과, 아이가 있는 따듯한 가정과 일상의 소소한 행복들 대신 더 많은 곳을 떠돌고,
더 많은 풍경속을 지나고, 더 많은 사연들과 삶을 만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산티아고를 거쳐 로마인들이 믿었던 세상의 끝까지 걸어서 도착한 이 길의 끝에서
그녀는 새롭게 걷고 싶은 수많은 풍경들을 마음속에 품는 것으로 여행을 마감한다.
아마도 그녀의 여행은 당분간 더 오래 이어질 듯 하다.
읽는 내내 그녀와 함께 걷는 기분이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풍경들이 주는 아름다움도 컸지만 그녀가 만난 사람들의 얘기도 감동적이었다.
아마도 나 역시 언젠가는 이 길의 처음에 설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당분간 애를 낳고 기르느라 한참 후의 일이 되긴 하겠지만 산티아고 가는 길을 마음에 품은 이상 언젠가는 꼭 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 가는 길..
당신도 걸어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