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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평점 :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할까.
'가난'이란 말을 떠올리면, 우선 게으르고 부족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남보다 노력도 안하고, 능력도 없고, 부족하고, 모자라고, 못한 사람들인것 같다.
이런 생각에는 '가난'의 궁극적 책임을 가난한 그 사람 자신에게 지우는 우리의 근본적인 태도가 있다. 그러나 '가난'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얼 쇼리스는 중범죄자 교도소에서 8년째 복역중인 여자 죄수 비니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왜 가난한 것 같나요?'
갑작스런 이런 질문에 그녀는 대답한다.
'그 문제는 아이들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등에 데리고 다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그 아이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
길거리에 방치된 아이들에게 도덕적 대안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녀는 결코 가난한 이들이 돈이 없다거나,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에게 돈을 주라거나, 훈련이 필요하다거나 더 많은 복지 서비스를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것들이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가난'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음을, 그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적 삶이란 무엇일까.
그녀가 얘기했던 정신적 삶이란, 가난한 이들이 공적 세계에 참여하여 정치적 삶을 살고, 성찰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사방이 한 개인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무력'에 포위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소외, 차별, 모욕, 질병, 배고픔, 공포, 결여는 모두 무력이다. 이러한 무력에 포위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가해지는 무력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단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그 무력을 자기 자신에게 향하도록 하는 것 외엔 대안을 찾지 못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모색할 수 있는 삶의 대안은 무력의 반사작용을 애초부터 방지하는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정치적 삶과 성찰적 삶에로 어떻게 이끌어 줄 수 있을까. 얼 쇼리스는 그 입구를 '인문학'에서 찾았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고대 그리스시절부터 세상 사람들의 성찰적 사고를 가능하게 내 준 근본적인 원천으로 기능해 온 학문이다. 인문학과 성찰적 사고, 정치라는 개념은 곧 '자기 통제'라는 개념속에서 하나가 된다. '자기 통제'는 인문학, 평온함,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지워낼 수 없는 어려움들을 성찰을 통해 극복하는 뜻들이 담겨 있다. 즉 얼 쇼리스는 인문학 교육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조절 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삶의 고난 속에서 무력이 아닌, 성찰과 반성을 통해 더 나은 삶에로 향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자 한 것이다.
언뜻 황당한 얘기 같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친다니..
대부분의 복지정책은 가난한 사람들을 당근과 채찍을 통해 '훈련'시키는 데 촛점을 두고 있다.이런 기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능력이 없거나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란 편견이 깔려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훈련이 아닌 교육, 그것도 '인문학'을 교육시킨다는 발상 자체를 가당찮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 쇼리스는 빈곤의 핵심이 무력의 포위망이라는 것을 파악하면서, 근본적인 접근이 아니고서는 절대 그 무력속에서 헤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그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맨트 코스'가 만들어 진다.
면접을 통해 선발된 18에서 35세 사이의 문자를 익힌 빈곤층 교육생들이 다양한 과거와 사연을 안고
강의실에서 만난다. 그들은 생애 처음으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배우고, 시를 감상하고 작문을 하게 된다. 최고의 강사들로부터 철학, 예술, 논리학, 시, 역사를 배웠다. 교육 중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견학하는 코스도 있었다. '가난한 이들도 인간이며 그들의 인간성을 적절하게 존중하는 방식은 삶의 영역에서 시민으로 대우해 주는 것'이란 원칙하에 클레멘트 코스는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사람들을 그 인격 자체로 존중해 주었고, 결코 수혜나 베품의 차원이 안닌, 당당하고 수준높은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일깨우고 이끌어 나갔다. 에이즈와 임신, 구직과 실직, 질병, 그리고 가난 그 자체로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사람들도 많이 나왔지만, 17명은 끝까지 학업을 마치고 졸업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학비를 지원받는 정규대학에 지원하거나 전일제 일자리를 얻었다. 즉 전보다 나은 삶을 향한 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이제 '클레맨트 코스'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캐나다, 멕시코, 호주등지에서 남미와 아프리카 까지 퍼져 나갔다. 인문학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각 나라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교육이 진행되어 많은 성공을 이루었다. 지난 10년간 클레멘트 코스는 4개 대륙에서 50개가 넘는 강좌가 개설 되었고, 최근에는 얼 쇼리스가 투병중에 방한하여 한국의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플라톤을 강의하는 교육도 이루어 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이상 무력의 포위망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당당하게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클레멘트 코스는 이제 다양한 인종과 문화권속에서 발전을 거듭해 가고 있다.
클레멘트 코스의 성공은 우리로 하여금 '가난'과 '빈곤'의 주체들에 대한 편견을 일깨우게 한다. 보조금이나 주고, 훈련이나 시키는데 촛점이 맞추어져 있는 우리의 복지 정책의 문제점도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한 사람의 인격으로 존중해주면서 그들의 삶을 통제하고 성찰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참된 '교육'이었을 것이다.
최근에 신문에서 노숙자들로만 이루어진 연극단의 공연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노숙인들은 연극을 통해서 자신들의 과거와 화해하고 내면의 힘을 발견한다. 노숙인 몇명 모아서 연극을 하는데 지원을 하고 관심을 갖는게 무슨 효과가 있느냐는 반문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을 포기한 한 사람이 사회 전체를 공포로 몰고 가는 범죄자가 될 수 있듯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한 사람 하나의 힘은 절대 작지 않다. 우리의 역할은 그런 사람들을 꾸준히 돕고, 이끌어 주는 것이다.
지난해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한창 화제가 되었었다.
대학교육도 취업을 위한 훈련으로 전락해가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힘을 길러주는 인문학 교육의 가치가 설 자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는데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사회전체가 삶에 대한 올바른 철학과 가치를 심어주는데 실패하고 있는데, 우리의 인문학은 당분간 제 자리를 찾지 못할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는 인문학을 통해 어느새 우리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져 가고 있는 인문학의 진정한 의미가 다시 발현되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올 해에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인문학'이 뿌리 내리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