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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히트를 했고, 소설로는 무려 70쇄 가까운 재판을 거듭하고 있는
초대형 베스트셀러,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다.
사실 나는 공지영의 글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작위적인 냄새가 풍기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늘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그녀의 미모나 배경이 주는 매력, 혹은 기대감이 한몫하는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보내곤 했다.
그녀의 책 중에서 비로소 내 맘에 들어온 것은 '봉순이 언니'가 유일했다.
그녀의 성장기를 배경으로 하는 현실성과, 맘 아프게 정감이 가는 봉순이라는 캐릭터의 힘 때문이었다.
이 소설에 대해서는 사전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삶을 비관해서 자살기도를 거듭하던 한 여자가 일주일에 한번씩 사형수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변화하는 내면에 대한 얘기라는 말을 듣고는, 어떻게 전개가 될지 너무 뻔해서 어쩐지 거부감이 먼저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사형수는 결국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삶을 원하게 될것이고, 그녀는 죽음을 앞둔 사형수를 통해 하찮다고 여긴 자신의 생이 얼마나 귀한지를 깨닫게 되는, 뭐 그런 상투적인 줄거리가 한번에 그려졌다.
줄거리는 물론 내 예상대로 흘러간다. 그러나..... 어짜피 죽을 수 밖에 없는 사형수와 삶에서 죽을 이유밖에는 찾지 못하는 한 여자가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장 깊은 마음을 나누는 과정은 예상처럼 상투적이지 않다. 절대로 딱지가 생길 수 없는, 언제나 그자리에 빨간 피와 속살이 아프게 드러나는 그런 과정이다. 그래서 그 과정에 문득 동행한 사람들은 이들을 둘러싼 시간들을 함께 나누는 것이 매우 당혹하고, 괴롭고, 힘이 들게 된다.
이 책에는 인간으로서 직면하고 싶지않은, 불행들과 비극, 비참함,처절함과 끔찍함이 가득하다. 내가 들여다 보지 않을 뿐, 내 가까이에 얼마든지 존재하는 삶들이기 때문이다. 사형을 앞둔 주인공 윤수의 독백을 따라가는 길은 그래서 더 힘겹다.
주인공은 엄마에게서 버림받고,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에게서 학대받고, 굶주림과 추위와 공포속에서 자라난 사람이다. 한번도 따스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고, 한번도 제대로된 인정과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고, 단 한번도 인간적인 존중과 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다. 그가 겪은 것이라고는 늘 살아가는 것의 그 지독한 처절함이었다.멸시와 학대, 폭력과 공포,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인간적인 모멸감과 수치, 그 속에서 자신만을 의지하는 약한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세상과 필사적으로 싸운다. 번번이 지고 피흘리고 다치면서 또 다시 대들고 싸운다. 그렇게 사는 외에는 어떤 기회도, 방법도 달리 없었다.
이런 환경속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사형수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래도 자기의 의지만 있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제대로된 삶을 살 수 있을거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속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과 고통에 대해서 얼마나 간편하고 쉬운 판단을 내리는가 말이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세상엔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삶 역시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찾으려 찾으려해도 닿지않는 희망따위에 의지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삶의 현실이 존재한다. 그들의 삶을 한층 가혹하게 하는 타인들의 차갑고 혐오스런 시선속에서 이 책을 읽는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리라. 윤수같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던져온 시선이, 품어온 감정이 그렇기 때문이다.
15세때 사촌오빠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 일을 수치스럽게 느끼고 덮으려고만 급급했던 엄마에 대한 충격과 상처를 품고 자란 여주인공은 삶의 위선과 가식속에서 헤매면서 제대로된 관계를 맺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체 일그러진 인격으로 성장한다. 자신이 겪은 상처가 너무 커서, 타인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 따윈 관심도 둬보지 않고 그저 세상을 비관하고, 가족을 비관하고, 자신을 학대하는 것으로 살아온 여성이다.
이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얘기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가슴에 난 붉은 상처들과 마주한다.
여자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상처를 미래는 커녕, 내일이 없는 사형수에게 들려준다.
사형수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던 자신조차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았던 상처들을 두 사람은 보여주고, 감싸주고, 알아준다.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이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간들이 두 사람 모두를 변화시킨다. 결국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의 상처에 진심어린 관심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고,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간단한 이치가 삶에서는 얼마나 한없이 아득하고 어려운 일일까.
단 한번 내미는 따스한 손길, 다정한 말, 이해의 눈빛이 사람을 살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살게도, 혹은 죽게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다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 크나큰 능력에 무관심 할 뿐이다.
테러나 핵폭탄만큼 무서운 것은 한 사람의 일그러진 인격속에 자라고 있는 분노다. 그런 분노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향한 열차 방화로, 혹은 연쇄살인으로, 혹은 무차별 폭력으로 이어져 우리의 일상을 무너뜨린다. 세상의 낮고, 어둡고, 힘겨운 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매일 모멸과 혐오와 무관심을 보내는 한 우리 곁에는 또 다른 윤수가 세상을 향해 자신의 분노를 키워 갈 것이다.
종일 이 책을 들고, 내게 매달리는 아이와 씨름하며 또 동요하는 내 감정과 직면하며 힘겹게 읽었다. 저녁상을 물린 자리에서 마지막 장을 읽고 나서는, 아이와 놀고 있는 남편 앞에서 기어코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부모에게서 이렇듯 지극한 사랑과 애정을 받는 내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서 항상 이런 사랑을 꿈꾸었을 윤수와 그의 동생 은수의 그 여리고 가여운 영혼들이 겹쳐졌다.
윤수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게 한 사람중에 나도 한 사람인것 같아서, 견딜 수 가 없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부모로서, 내 아이가 누리는 행복만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고통에 진심어린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다.
타인에게 내미는 따스한 마음만이 이 세상에 넘치는 고통을 덜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