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가 울고 있네
리동혁 지음 / 금토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절친들과의 사적인 자리가 아닌 이상 소위 까는 글을 되도록 안올리고 

특히 서평 같은 콘텐츠 계통일 경우 어지간하면 피하는 편인데... 

간만에 특이한 비평서를 한 번 올려봅니다.


누가누가 읽었다더라 라는 마케팅 및 작가의 명성, 그리고 글솜씨에 힘입어 

삼국지 하면 누구나 일단 이문열 평역본을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멋들어진 서문을 비롯 종장에 이르기까지, 삼국지 평역본에서 작가가 붓질하듯 펼쳐내는 문체는 맵시 있고

극적 요소가 가득한 황건적의 난부터 제갈공명까지의 기간 위주로 적으면서 그 이후를 대대적으로 단축시켜버린 구성 또한 

독자에 따라 호불호는 있을지 모르되 삼국지를 '이야기로 즐기기'에는 아주 적합한 구성입니다. 

공식 역사서가 아닌 다음에야 공명 사후 진나라 통일까지의 시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못받는 편이니까요.

그 결과는 그야말로 대성공, 엄청난 판매부수로 이어졌습니다. 


이에 반해 재중동포 리동혁 씨가 쓴 <삼국지가 울고 있네>는 

이문열의 삼국지 평역본을 아주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책입니다.

평역이므로 삼국지 각 인물들과 그들의 주요 행동에 대한 평가는 각자 다를 수 있겠으나 

본서는 작가 개인적인 평가와 별도로 번역·팩트 자체부터 심각하게 틀렸음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죠.


유별나게 과장이 심한 중국의 군담·무협소설에서 엿보이는 일기당천·일기토 등에 대한 기술은 웃고 넘길 수 있어도

'젊어서는 삼국지를 보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보지 말라'나 '징과 북을 울리다', '녹슨 전포', 

'병졸들의 장비 및 실제 역할', '진법', '예·양 지역으로 바뀌어버린 자객 예양' 등등 

명백한 오류로 보이는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반면 적절하고 부드럽게 문맥을 바꾼, '왕윤은 뒤가 없겠소이다' 같은 번역에 대한 지적도 간혹 보임)



본래 위촉오 시대는 기간도 짧거니와 방대한 중국사 내에서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유비의 촉나라는 아주 잠깐 존재하다 금새 사라진 작디작은 지방 군벌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지가 지금껏 널리 사랑받는 건 바로 스토리텔링이 지닌 강력한 흡인력 덕분입니다.

유관장 삼형제 같은 인물들이 지니는 매력과 각종 영웅담 그리고 감성을 붇돋는 나관중의 스토리라인은

송, 명, 청나라 당시의 시대적 니즈와 더불어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죠.


일단 진수의 정사 삼국지가 아닌 이상 '정통 역사서'로 봐줄만한 책은 드문 편입니다.

나관중본이든 모종강본이든 구전 형태로 숱하게 재창조되면서 거의 가상의 영웅담이 된 건 팩트이기에

번역을 위해 참고한 여러 기초 판본 자체에도 수많은 오류가 묻어있고 

특히 연의 같은 책에는 만담꾼들이 지어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는 걸 인지하고 봐야겠으나 어쨌든,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건 반드시 짚고 가야 할 문제입니다. 이문열 삼국지 처럼 유명한 책일수록 더더욱.



사실 평역본 삼국지/수호지 시리즈를 제외하면 

<사람의 아들>이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후 이문열 씨는 작가로서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그가 삼국지에 이어 수호지 시리즈로 다시 한 번 대박을 냈다는 것도 참 흥미롭고

수호지에서 도적들이 의로운 행동을 하는건 가소롭다며 6권으로 끝내려다 

반응이 너무 좋다보니 끝내 10권까지 낸 것도 재미있는 점ㅎ

천생 글쟁이라 그런지 양수나 공융 같은 문사들을 단죄하는 조조의 행동을 '펜으로 맺은 원한'으로 해석하는데 

이 책을 본다면 리동혁 씨에게 원한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초반에는 이문열 씨라고 칭하다가 후반가면 이씨라고까지 폄하하는 표현이 나오며, 

비판이라기보다는 비난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내용도 있으므로.


이문열 씨는 소설가이다보니 아주 세련된 문장을 구사하는 반면

리동혁 씨는 아주 투박하고 직구에 가까운 문장을 사용합니다. 

한 명은 소설을 쓰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네요.


전반적으로 <삼국지가 울고 있네>가 신랄하게 '까는데' 그쳤다는 건 살짝 아쉽고, 

설명문 같은 문체를 보면서 그가 직접 집필했다는 <본 삼국지> 시리즈가 원문을 지키는 번역은 잘했을지 모르나

이야기꾼이자 소설가로서의 필력은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간만에 이문열본, 진수 정사에 이어 또 다른 삼국지 시리즈를 보게 될 듯)

근본적으로 삼국지 연의가 역사서가 아닌 이상, 일단 재미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렇더라도 '국민필독서'에 대해 강렬한 비판의 날을 세웠다는 자체는 충분히 인정받아야할 측면으로

2002년 3판에 이어 번역 오류를 제대로 고친 개정 4판이 나오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표절을 콕 찍어내야 앞으로의 표절을 방지할 수 있듯이, 이런 게 바로 비평서가 지니는 의의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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