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브라질
장 크리스토프 뤼팽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1555년 프랑스의 브르타뉴 항구에서 세 척의 배가 브라질을 향한 항해를 시작한다. 총 지휘자는 빌가뇽. 그는 르 토레와 공자그 등 충실한 부하들을 데리고 프랑스 왕으로부터 브라질을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어 또 하나의 프랑스를 세우라는 임무를 받고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빌가뇽은 수많은 기술자들을 배 위에 태웠다. 빵을 만들 줄 아는 사람, 집을 지을 줄 아는 사람, 옷을 만들 줄 아는 사람 등 ‘노아의 배’라고 비유될 정도로 하나의 사회를 만드는데, 또한 유지하는데 필요한 전문가들을 모두 태운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는 아이들도 있다. 특별한 기술은 없으며 몸도 약해 오히려 짐이 될 수도 있는 존재들이 아이들이다. 그런데도 빌가뇽은 그들을 태웠다.

그들을 태운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통역 때문이다. 아이들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데 놀라운 재능이 있다는 건 이미 알려진 바, 빌가뇽도 그걸 노린 것이다. 참으로 치밀한 준비라고 밖에 할 수가 없는데 덕분에 귀족이면서도 아버지가 없어 집에서 냉대 받는 귀족 남매도 브라질로 떠나게 된다. 그들의 이름은 쥐스트와 콜롱브인데 이들은 아버지를 찾을 수 있다는 속임수에 넘어가 배 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첫날부터 쥐스트와 콜롱브는 아버지를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란 예감을 하게 된다. 통역을 위해 함께 오르게 된 부랑아들과 마찰을 일으키는가 하면 배가 예정에도 없는 혼란스러운 일을 겪게 되는 등 험난한 날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다. 빌가뇽을 따라 ‘과나바라 만’에 도착하지만 그곳에서는 낙원을 예감하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어두컴컴한 정글이 보이는 육지는 배 위에서 느끼는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만든다. 그럼에도 빌가뇽은 각자에게 임무를 주고 쥐스트와 콜롱브도 그 명을 따르게 된다. 그렇게해서 그곳에 ‘남국의 프랑스’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장 크리스토프 뤼팽의 <붉은 브라질>은 프랑스가 ‘잊고 싶은 과거’를 수면 위에 끌어올렸다. 잊고 싶은 과거란 무엇인가? 쥐스트와 콜롱브를 통해 실체가 드러나는 ‘남국의 프랑스’가 그 주인공이다. 남국의 프랑스는 곧 추악하고 잔인한 프랑스의 역사를 의미한다. 생각할수록 부끄러워서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게 만드는 역사가 그것이다. 그래서 국가차원에서 결코 언급하지 않고 숨기는데 급급한 역사이기도 한데 그 덕분인지 현재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뤼팽이 알려지지 않고, 잊혀지려던 그것을 수면 위에 끌어올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붉은 브라질>의 등장은 무엇을 알리고 있는가? 자유와 평화, 박애의 정신이 시민혁명 이전부터 오랫동안 핏속에 흘렀다고 주장하던 그들이 원주민들을 짐승처럼 다뤘으며 타자의 것을 파괴하고 소유하려는데 정신을 빼앗겼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또한 그것에 대해 일말의 반성도 없이 남의 일인 양 행세하고 있었는데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폭로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작품이 등장하는 데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숱한 난관이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소설가의 노력 덕분에 <붉은 브라질>은 그 모습을 드러냈고 묵직하고 중후한 역사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브라질>은 쥐스트와 콜롱브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쥐스트가 나이를 속이고 배에 오른 덕분에 이들은 성숙한 어른의 사고와 순진한 아이의 사고를 동일선상에서 마주대할 수 있으며, 귀족이지만 귀족답지 못한 생활을 했기에 신분을 벗어난 자유로운 시선을 갖고 있으며, 유럽인이면서도 원주민들과 대화할 수 있고, 그들의 문화를 배울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대립적인 것들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그것들의 속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들에 의해 <붉은 브라질>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기본적인 틀은 원주민과 문명인의 관계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그것을 소유하려는 문명인과 적을 껴안으려는 원주민의 관계는 쥐스트가 문명 쪽으로, 콜롱브가 원주민 쪽으로 기울면서 적나라하게 보여 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관계가 ‘이성’을 상대하는 ‘감성’의 이야기, 즉 머리를 상대하는 몸의 이야기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정주민과 유목민의 관계까지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한 <붉은 브라질>에서는 칼뱅이 등장하는 시대에 맞춰 종교 갈등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빌가뇽은 원주민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종교인들을 데려왔지만 그들이 기대에 못 미치자 대학 동창생 칼뱅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그러자 칼뱅은 위그노 목사들을 빌가뇽에게 보내고 이로 인해 남국의 프랑스는 카톨릭과 위그노가 첨예하게 대립하는데 유럽에서 발생했던 종교전쟁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처럼 똑같은 전례를 밟게 된다.

그런데 <붉은 브라질>은 여타 작품들과 달리 이러한 종교 갈등을 그 자체로 상세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기회를 마련한다. 직접적으로는 남매의 눈을 통해서, 크게는 인디오들의 눈을 통해서 종교 갈등을 바라보는 것인데 그 시선들은 확연하게 어리석음을 꾸짖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 또한 지금의 ‘교회의 영광’뒤에 가려진, 교회가 잊고 싶어 하는 과거를 들춰내기 위함인데 덕분에 <붉은 브라질>은 종교 갈등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식민지 야욕으로 빚어진 원주민과 문명인들의 대결, 타자의 눈을 통해 본 종교 갈등 등 <붉은 브라질>은 풍성한 이야기꺼리로 가득하다. 더군다나 그 이야기꺼리들이 언제나 들춰보고 싶은 것들이 아니라 외면하고 싶었던 것, 잊고 싶었던 것들인 까닭에 역사에 존재했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인 만큼 <붉은 브라질>은 문명을 뒤로 하고 미지의 아마존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두렵고 가슴 떨리는 기분을 체험케 한다.

누군가는 ‘남국의 프랑스’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자연’이라고 불렀던 그곳. 누군가는 ‘내 것’이라고 말했지만, 누군가는 ‘세계의 일부’라고 말했던 그곳. 그곳이 이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땅 브라질, 그곳이 문명인들의 탐욕을 비웃으며 눈을 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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