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

강의준비를 위해 지난 학기 강의자료들을 정리하다가 프린트아웃 해놓은 모스크바 통신문 하나를 읽었다. 2005년 1월 17일에 모스크바에서 씌어진 것인데, 귀국을 2주 가량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거의 막바지 통신문이었고, 분량으로 보아 5-6시간은 족히 걸렸을 법하다. 최근에 교수신문에서 '우리 학문과 철학'이란 기고문을 옮겨놓은 바 있는데, 그와 관련한 '나의 의견'으로 참조가 될 만하겠기에 정리해서 '창고'로 옮겨놓는다(다시 읽으면서 '철학적 농담'이라면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초월적 비평과 치과적 진료'라는 이전 통신문의 '보유'로 씌어진 것이지만, 여기서는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로 제목을 고쳐달도록 하겠다. 내가 보유하고자(보태어 채워넣고자) 했던 문단(=구멍)을 밝히고 있는 대목에서부터 시작해보자(아래는 모스크바 대학 건물의 일부).

짐작에 주로 ‘구멍’에 해당한 건 다음의 한 단락이다: “한편,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에 대한 참조 없이 철학적 로고스만으로도 철학은 구성될 수 있다(주로 수학/논리학에서 바탕을 마련하고 있는 후설의 현상학이나 초기 분석철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하지만,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를 끊임없이 참조함으로써 자극과 영감을 얻는 철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들뢰즈, 데리다, 후기 하이데거 등을 단번에 꼽을 수 있으며, 사르트르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와 탈무드로부터 근원적인 영감을 얻고 있는 레비나스의 윤리학까지).” 이와 비교할 때 다른 구멍들은 부차적/부수적이거나 사소한 듯하며, 나는 이 문단에 대해서만 주로 군말을 채워넣기로 하겠다.

이 문단에서 나는 로고스에 대한 모종의 유형학을 제시하고 있는데(‘로고스’는 이성, 논리, 언어를 포괄하는 말로 사용하겠다), 나열된 걸로만 따지자면 로고스에는 철학적 로고스도 있고, 소설적/시적 로고스도 있다(다른 문단에서 ‘과학적 로고스’도 언급했지만, 여기선 생략한다). 그리고 그러한 전제하에서라면, 소설적/시적 로고스(‘문학적 로고스’라고 통칭하겠다)의 포함 유무에 따라 (내가 보기엔) 철학의 두 가지 유형이 가능하다. (1)철학=철학적 로고스, (2)철학=철학적 로고스+문학적 로고스. 그러니까, 인용한 문단은 그러한 유형학을 풀어서 얘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첫번째 유형의 사례로 후설의 현상학과 초기 분석철학(전기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을 들었고, 두번째 유형의 사례로 들뢰즈, 데리다, 후기 하이데거, 레비나스 등을 들었다(흔히 ‘철학의 미학화’라고 비판받기도 하는 유형이다).

나는 이 두 유형 사이에 어떤 우열을 가정하지 않았다. 내가 주장한 건 이 두 가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건 반대로 문학의 경우에도 두 가지 유형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1)문학=문학적 로고스, (2)문학=문학적 로고스+철학적 로고스. 문학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를 모두 구성인자로 갖고 있음에도, 어떤 경우엔 철학이 되고 어떤 경우엔 문학이 되는가란 질문이 가능한데, 나는 각각의 경우에 (야콥슨의 용어를 쓰자면) ‘지배소(dominant)’가 다른 거라고 답하겠다(쉽게 말하면, 방점이 다른 것). 해서, ‘문학적인 철학’(실존주의가 대표적이다)이 있는 반면에, ‘철학적인 시/소설’(릴케나 퐁주의 시, 혹은 투르니에나 아이리스 머독의 소설을 예로 들 수 있을까)도 있는 것이다.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를 양 극점으로 놓는다면, 철학과 문학의 이 네 가지 유형은 스펙트럼화될 수 있다.

<철학적 로고스 – 철학적/문학적 로고스 – 문학적/철학적 로고스 – 문학적 로고스>

이러한 스펙트럼이 갖는 장점은 철학과 문학의 관계를 (단선적으로가 아니라) ‘중층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즉 철학이냐 문학이냐라는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 더불어, 너무 철학적이라거나 문학적이라는 이유로 각각의 ‘동네’에서 배제되는 ‘경계적’ 작가/철학자들을 이러한 구도에서는 정당하게 고려할 수 있다(가령, 니체의 경우).

흔히 이성이나 논리와 동일시되는 로고스를 언어적 차원에서 재규정할 경우에,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 놓이는 것은 ‘기의-논리의 극대화’와 ‘기표-논리의 극대화’이다. 기의-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연어에서 기표성을 배제한, 아니 자연어 자체를 배제한 기호논리학의 세계를 만나게 되며(‘자연어’란 한국어, 영어, 일어 같은 개별 언어를 말한다), 기표-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언어의 기의성을 최대한 배제한 (기표의) 순수유희를 만나게 된다(가령 칼리그람이나 철자시). 전자는 세탁기처럼 기표의 때를 계속 세탁해대며(그렇게 해서 언어를 ‘흰 빨래’처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내가 이해하는 ‘백색의 신화’이다), 후자는 단어에 폭탄을(아니면 쓰레기통이라도) 갖다 퍼부음으로써, 기의를 증발시키거나 해체시킨다.

즉, 극단적으로는 철학적 로고스가 자연어를 인공어화 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면 문학적 로고스는 자연어를 자움어(러시아 미래파의 표현을 빌자면 ‘새의 언어’)화 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자움'은 '초이성'이란 뜻이다). 가령,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란 동요에서 리듬을 만들기 위해 들어간 “나리 나리”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기에 철학적 로고스의 관점에선 불필요한 ‘잉여’이지만, 문학적 로고스의 관점에선 오히려 필수적인/본질적인 ‘요소’이다. 더불어 지난 통신문의 제목을 만들어준, 나보코프의 칼람부르 ‘dental and transcendental’은 철학적 로고스가 보기엔 불쾌한 넌센스에 불과하겠지만, 문학적 로고스가 보기엔 유희적 ‘통찰’을 담고 있다. 거기에서 암시되는 바이지만, 언어의 유형학 또한 하나의 스펙트럼을 구성한다. 그건 아래와 같다.

<인공어(=기호) - 자연어 - 시어 - 자움어(=새의 언어)>

‘2차 모델화 체계’(유리 로트만)로서의 문학어는 자연어를 재모델화, 재코드화한 것이다. 그러한 재모델화/재코드화의 방식은 다양해서, 장르나 문체, 기법 등을 포괄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슈클로프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문학)이란 기법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로트만에 따르면, 이 기법에는 또 플러스(+) 기법과 마이너스(-) 기법이 있다. 문학이론도 깊이 들어가자면 나름대로 복잡한데, 여기선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조금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문학이란 자연어를 낯설게 사용한 것이다(해서, 지각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오브제를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함으로써 미적 효과를 창출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공통적인 건 어떤 형태(form)에 대해서 사고한다는 점이고, 그런 점에서, 문학은 조형예술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미국의 신비평가들은 시를 ‘잘 빚어진 항아리’에 비유했다). 문학적 로고스는 기본적으로 언어의 조형화, 혹은 조형적 언어를 통해서 의미를 산출한다(야콥슨을 따라서 좀 어렵게 말하자면, 그것은 통합체적인 언어를 계열축에 따라 투사한다). 즉, 문학은 어떤 조형적 입체이며, 거기서 중요한 건 볼륨이다. 언어는 문학적 로고스 안에서 자신의 풍만함을 자랑한다(철학에 코기토가 있다면 문학에는 코르셋이 있다).



반면에 철학적 사유의 근간은, 그것이 형식논리(아리스토텔레스)이건 변증법적 논리(헤겔)이건 간에 논리에 있으며(해서 ‘논증’은 철학적 로고스의 가장 중요한 구성소이다. 논리는 철학의 정신을 구성하는 ‘뼈다귀’이다),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order)이다(문학의 언어가 주로 분칠하고 치장하는 언어라면, 철학의 언어는 명령하고 주문/요청하는 언어이다). 똑 같은 언표들이라도 배치순서가 바뀌면 (문학에서는 새로운 의미가 창출되지만) 철학적 논리는 한순간에 비논리 혹은 모순으로 전락한다(예컨대 3단논법의 논항들을 뒤섞어보라). 그러한 논리가 지향하는 것은 모순의 배제 혹은 지양이다. 의미론적 차원에서 논리적 모순의 등가물은 넌센스(무의미)이다. 때문에, 어떤 철학적 논증/저작에 대해 ‘넌센스’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된다(가령, “그게 말이 되냐?”) 반면에 문학에서의 ‘넌센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법이자 전략이며, 장르, 더 나아가 사조를 이루기도 한다.

철학적 논리를 구성함에 있어서 순서가 중요하다고 하면, 철학적 담론의 구성인자가 되는 언어에 대해서 엄격한 훈령이 하달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른바 ‘동작 그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해서, 풍만한 문학이 ‘언어의 카니발’을 떠올리게 한다면, 강파른 철학은 ‘사유의 학교’(야스퍼스)를 넘어서 ‘사유의 군대’이기도 하다(우리가 학교 졸업하면 군대 가듯이). 그리하여 좋은 문학이 우리를 도취시키는 문학이라면, 좋은 철학은 우리에게 어떠한 빈틈도 내보이지 않는 깐깐한 철학이다(칸트에게, 헤겔에게, 스피노자에게 빈틈이 있던가?). 이러한 철학이 요구하는 언어는 당연히 바지춤 추스르기에도 바쁜 어영부영하는 자연어가 아니라 깍두기 머리에 자세 제대로 나오는 보편어 혹은 인공어이다(JSA 출신인 한 후배는 요새도 자세가 나온다).

알다시피, 철학사에서 그러한 보편어의 역할을 해온 것이 중세와 근세의 라틴어였고, 요즘은 영어이다(아마도 독어가 넘버2 정도이고). 해서, 적어도 국제적인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니 하다 못해 철학 전공이라고 명함이라도 내밀기 위해서는 영어로 책이나 논문을 써야 하는 것(한국어로 논문을 쓴 철학박사들? 그들도 최소한 번역투의 문장으로 논문을 써야 한다. 영어나 독어에서 바로 번역한 듯한 논문. 즉, “이게 원래는 한국어 논문(수준)이 아닙니다”는 걸 보여주고 암시하는 논문 말이다). 이때 영어는 일개 자연어가 아니라 특별한 자연어, 즉 보편어로서의 위상을 점유한다(미국이 일개 국민/민족국가 레벨을 넘어서듯이). 그러니 다들 철학은 주로 미국에서(혹은 독일에서) 공부하는 것이며(러시아 철학 전공자는 내가 아는 한 한 명도 없다), 철학을 말할 때는 영어나 독어를 반드시 병기해야 하는 것이다(한국어라는 자연어는 철학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미국철학회 회장까지 역임한 재미철학자 김재권의 경우, 미국의 철학과 대학원생들에게 철학논문 문장의 모범으로 제시될 정도로 탁월한 영어를 구사하는데, 대학생 때 미정부 장학생으로 유학을 떠난 그가 한국어를 거의 망실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한국어라는 자연어가 그의 ‘보편적’ 사고에 거의 ‘간섭’을 하지 않는 것). 나는 대학 1학년때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심재룡 편)이란 책을 읽었었는데, 거기에 수록된 글에서 김재권이 강조한 것은 한국에서 철학하는 ‘보편적’ 자세였다. 즉, 철학함에 있어서 국적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 그 국적이란 건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언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철학함에 있어서 자연어의 구속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 왜냐? 철학의 문제들이란 보편적이기 때문에(하지만, 그에게 자연어인 영어는 동시에 보편어이기도 하다는 걸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분석철학 계통의 심리철학 권위자인 김재권의 ‘보편적 문제’란 심신문제, 즉 ‘mind-body problem’이다. 주로, 마인드(=심리현상)와 바디(=물리현상) 간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 형식논리상으로 기본적인 입장은 둘로 나뉜다. 관념론(마인드는 바디와는 별개로 ‘실재’한다)과 유물론(마인드는 부재하거나 바디에 수반되는 현상이다). 물론 각각의 입장은 다시 세분되며(가령, 유물론은 환원적 유물론과 비환원적 유물론으로 나뉠 수 있다) 김재권은 자신이 제창한 ‘수반이론’으로 유명한데, 분류하자면 ‘환원적 유물론’에 속한다(내가 이해한 대로 얘기하자면, 기본적으로 심리현상은 물리현상으로 환원가능하며, 물리현상에 수반되는 현상이라는 것).

나는 그의 주장에 많은 부분 동의하지만, 그 동의는 ‘심신문제’라는 (임의적인) 문제틀을 고수하는 한에서이다. 그 문제틀의 임의성에 대해서는 언젠가 김재권의 내한 강연을 언급하면서 김용옥이 지적한 것인데(아마도 무슨 TV강연에서였다), 가령 기(氣)철학적 세계관 혹은 논리에 선다면, 마인드와 바디라는 별개의 ‘실체’는 인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마인드가 바디에 수반된다든가 하는 논리도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된다(우리말의 ‘몸’/‘맘=마음’ 또한 마인드/바디와는 다른 ‘논리’를 갖고 있다). 김재권은 심신문제의 보편성을 주장하지만, 그의 수반이론이 진지하게 수용/검토되는 것은 (제도적으로) 영미권의 분석철학계 내에서일 뿐이다(혹은 그러한 문제틀이 ‘이식된’ 한국 대학의 철학과도 포함될는지 모른다).



물론 수반이론은 대단히 ‘논리적인’ 이론이며, (비판도 허용하지만) 설득력 있는 이론이다. 하지만, 이론의 논리성이 반드시 문제틀의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그건 나름대로 재미있는 ‘미식 축구’가 ‘재미의 보편성’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수반이론을 말하고 김재권을 대단한 철학자로 추켜세우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이론이 보편적이거나 최고의 심신이론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한국인, 적어도 한국계 철학자이기 때문이다(비록 그가 한국어를 거의 잊었다고 하더라도).

김재권이 분석철학계의 가장 저명한 한국인 철학자라면 현상학계에서 대가급으로 인정받는 한국인 철학자는 역시 미국과 독일에서 활동하는 조가경이다(훨씬 아래 세대로는 분석철학의 이승종, 현상학의 이남인 정도가 유명한 듯하데, 공통적인 건 영어/독어로 책을 썼다는 것). 그의 초기 주저가 한국어로 쓴 <실존철학>인데, 이후에 외국으로 떠난 그가 독어, 혹은 영어로 써서 명성을 얻은 책들은 내 기억에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20세기 전반기 서구철학의 가장 대표적인 두 조류가 현상학과 분석철학이라고 할 때, 두 한국인 철학자가 관련학계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물론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은 두 사람이 ‘한국인’ 철학자일 뿐이며, 자연어로서의 ‘한국어’가 걸려있는 ‘한국철학’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그건 ‘한국인 문학’이 ‘한국문학’과 별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두 사람은 한국어 철학, 즉 자연어 철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인데, 사실 그러한 문제의식의 결여/부재는 현상학과 분석철학의 철학적 입장/강령에 기본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결여/부재가 새겨져 있다?).

20세기 서구철학을 흔히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로 특징지을 때(한때 분석철학계의 기린아였던 리처드 로티는 <언어적 전회>란 책을 편집하기도 했다), 그것이 주목한 것은 사유와 언어의 관계,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유에 있어서 언어의 매개성이었다. 아주 당연한 듯하지만, 우리는 ‘언어’로 사유한다는 것. 즉, 사유의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이 ‘언어적 전회’의 일차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때의 언어란 바로 ‘자연어’로서, 그리고 ‘일상어’로서의 개별 국어이며, ‘언어적 전회’는 이 자연어/일상어의 ‘존재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태는 정반대로 간다.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의 이면은 이러한 자연어/일상어의 ‘병리성’에 대한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사유는 자연어로 이루어지는바, 철학적 사유가 오류를 범하는 주된 이유가 그 자연어의 병리성(=결함)에 있는 게 아닌가 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비유컨대, 철학적 작전이 매번 실패하는 원인이 ‘병력 자원’의 부실에 있다는 걸 사단장-철학이 알게 된 것. 이후에 대대적인 군기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건 아주 당연하다(아예 “적은 우리 안에 있다!”고 선언하면서).

 

 

 

 

철학의 과제가 ‘언어비판’, 더 나아가 ‘언어치료’에 있다고 하는 주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요약한다(주객이 전도된 것이지만, 분석철학은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사병-언어의 닦달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 맥아더-비트겐슈타인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해소’일 뿐”이라는 어록까지 남기며 철학계에서 잠시 사라지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다시 등장하는 것이 기호로서의 인공어이다. 철학논문은 가급적 기호논리와 명제함수, 수식 등으로 가득 채우고, 자연어는 가급적 배제할 것(비유컨대, 이러한 인공어들이 ‘특전사’라면, 자연어는 ‘방위병’이었다). 철학은 점점 소수정예화하며, 자신들의 은어만으로 소통하게 된다.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방위병-자연어의 애환이 무시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한편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이 직면했던 문제는 영미의 분석철학과는 다소 달랐다. 한전숙의 <현상학>(민음사)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어릴 적에 후설은 무슨 공이 같은 걸 죽창 갈아서 송곳을 만드는 일에 몰입했다. 이런 케이스를 의대생들은 흔히 ‘옵세(obsessed)’라고 부르는데, 저자는 후설의 ‘라디칼리즈무스’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든다. 중도적인 입장에서 내가 현상학을 정의하자면, 그건 ‘Obsessed Radicalism’쯤 되겠다(‘강박적 급진주의’ 혹은 ‘강박적 근본주의’?). 왜 근본적/급진적이냐면,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다시 정초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로티의 분류에 따르면, 현상학 또한 정초주의적 철학에 속한다. 정초주의적 철학들이 목을 매는 것은 철학의 확실한 토대, 곧 ‘확실성’이다. 어떠한 ‘지진’과 ‘해일’로부터도 자유로운. 혹은 그럴 거라고 착각하는).

자세한 내막을 알지는 못하지만(주저인 <논리연구>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그러니, 현상학에 대해서 한마디 하려면 그 방대한 저작을 영어나 독어로 읽으라는 것. 나는 <현상학> 입문서나 <현상학적 운동> 같은 책을 참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러시아어로는 후설이 제법 번역돼 있다), 후설은 수학적 대상들이 논리적인 것이냐(=논리주의) 심리적인 것이냐(=심리학주의)는 논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제3의 것이라는 걸 입증하고자 했는데, 주로 그의 문제의식은 당시에 대두하던 심리학으로부터 철학 고유의 영역을 발견/보존하는 것이었다(당시 늙은 철학은 학문계의 새로운 강자인 심리학과 ‘의식’이란 방을 같이 쓰게 됐으므로 자기-갱신이 요구됐던 것. 철학의 회춘).

상식적인 얘기를 좀 늘어놓자면, 그렇게 해서 그가 발견한 것이 ‘지향적 의식작용’(=노에시스)과 ‘지향적 대상’(=노에마)이다. 지향적 의식이란 건 특정 개인의 심리상태나 의식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초월적 의식’이고(<논리연구>와 거의 동시에 나온 책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인데, 현상학은 철저하게 ‘의식철학’이라는 점에서 ‘무의식의 과학’인 정신분석학과 대비된다. 현상학적 입장에서 프로이트를 수용한 것이 사르트르의 실존적 정신분석이다. 그는 무의식을 ‘자기기만’이자 ‘넌센스’로 간주했다), 지향적 대상은 그러한 의식에 현상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실제 대상을 넘어서는 ‘초월적 대상’이다.



어떤 개별적 의식이 어떻게 초월적 의식이 되는가? 그건 옵세적 ‘집중’을 통해서이다. 공이를 갈아서 송곳을 만들듯이 한 가지 일에 집중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텅빈 상태가 된다. 멍청하게 되는 거지만, 좋게 얘기하면 사심(私心)으로부터 자유로운 ‘맑은 연못’처럼 된다(현상학과는 좀 다른 방식이지만, 롤즈의 <정의론> 또한 그런 식의 ‘맑은 연못’, 혹은 백지상태로의 환원을 상정한다. 정의의 조건으로서). 그 ‘맑은 연못’이 초월적 의식이다. 그건 개별적인 의식과 무관하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의 상관물로서 연못에 비치는 것이 초월적 대상이다. 이제 그렇게 비친 것이 대상의 본질이며 그것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 그게 현상학적 기술이다.

대학 1학년 첫학기에 들은 종교학 강의에서 ‘종교현상학’에 정통하던 담당교수는 현상학의 예로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篇 意自現)”이란 한문 구절을 들었다. 책을 백번(백편?) 읽으면, 뜻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현상학적 연애술? 백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책을 백번 읽는 게 말하자면 ‘송곳 갈기’이고, 지향적 의식작용이다. 그러면, 먹물 뿌려놓은 글자들(=실제 대상)에서 ‘뜻’이라는 지향적 대상이 우리의 머리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옳거니, 그거로군!”).

사실 여기까지는 방법론상으로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러한 지향적 대상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 무엇으로? 자연어로! 후설의 철학적 작전은 나무랄 데 없지만(제갈공명 뺨 치지만), 작전을 실행할 병사들(=방위병들!)을 그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비유컨대, 분석철학은 훈련만 뭐빠지게 하고, 현상학은 작전만 아주 열심히 세운다. 해서 분석철학엔 작전이 부재하고, 현상학은 병사들이 부실하다). 그의 관심은 주로 언어보다는 의식이며, 언어 이전의 경험에 집중돼 있는 것이다(이것이 내가 후설이 ‘언어적 전회’ 이전의 철학자라고 보는 이유이다).

 

 

 



지난번 통신문에서 사르트르의 <구토> 얘기를 잠깐 했지만, 이 소설은 셀린느의 소설 외에도 후설의 현상학이 없었더라면 씌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1933년(28세) 베를린에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불어를 가르치면서 1년간 체재하는데(레이몽 아롱이 부추겼다던가?), 거기서 후설의 현상학을 접하고 폭 빠지게 된다. 아마도 후설을 오래 사숙했더라면, 후배인 메를로-퐁티처럼 ‘정통’ 현상학자가 됐을지도 모르지만(메를로-퐁티는 벨기에의 루뱅에 있는 후설-아카이브에서 후기 후설의 원고들을 직접 열람하고 <지각의 현상학>을 구상한다), 사르트르는 살짝 현상학의 맛만 보고 돌아오기 때문에(혹은 폼만 잡고 돌아오기 때문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현상학을 전개하게 된다. 그게 <상상력>과 <존재와 무> 등의 저작으로 출현하게 되고.

이 사르트르(혹은 로캉탱)의 지향적 대상은 주로 잉크병이나 물컵 종류이다. <구토>는 시작에서부터 현상학적 집중/환원을 시연(試演)해 보이는바, “예를 들어 여기에 나의 잉크병이 든 종이 상자가 있다고 하자. 내가 ‘전에’는 그것을 어떻게 보았으며 지금은 그것을 어떻게… 그런데 그것은 직육면체요 테이블 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 것이라면 아무 할말이 없다. 바로 그런 일을 피해야만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신기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구토>, 하서, 5-6쪽)

로캉탱의 말을 빌어오자면, 현상학은 현상학적 환원이란 절차를 통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신기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것은 잉크병 하나, 맥주병 하나에 대해서도 책 한권 분량을 써낼 만한 ‘꺼리’들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현상학이 아니라면 <존재와 무>는 분량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상학이 그런 꺼리를 제공해주지 못하는 구석이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역사’이다(‘역사현상학’이라고 최근에 좀 개척되는 듯도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는 지향적 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 덩치가 크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시간 경험이나 지각 경험 따위는 자신의 직접적인(내밀한) 경험의 대상으로서 ‘현상학적 환원’이 가능하다(후설이나 하이데거나 다 ‘시간’만을 존재의 중요한 범주로서 다루었다. 그건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를 어떻게 환원하는가? 역사는 어디에 있는가? 더불어, 현상학은 현실의 긴급성에 대응하지 못한다. 송곳이 될 때까지 갈아야 하고, 뭐가 나타날 때까지 백번을 보거나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라크 폭격 장면을 백번쯤 반복해서 보면 혹 모르겠다, ‘미 제국주의’라는 뜻이 노에마로서 현상하는지도...

나는 앞에서 언어적 전회의 내용이 사유의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이면서 동시에 (철학어로서) 자연어의 자격미달(=병리성)에 대한 인식이었다고 했는데, 그럴 경우 그에 대한 방책으로서 두 가지 방향성이 주어진다. 왼쪽으로도 갈 수도, 오른쪽으로 갈 수도 있는 것. 비유컨대, 방위병-자연어/일상어에게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 특전사-인공어로의 길과 당번병-시어로의 길(특전사와 ‘특권층’인 당번병은 무시당하지 않는다).

<인공어 ← 자연어 → 시어>

(1)<자연어→인공어>라는 방향은 이미 라이프니츠가 주장한바 있는데, <논리-철학논고>의 비트겐슈타인이나 비엔나학파(논리실증주의)의 철학자들이 선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의 언어(=일상어)에 오염되지 않은 언어로 통해서 ‘건강한’ 사유가 구축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수축주의적 방향은 언어-의존성이란 문제를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이다(반면에 현상학은 언어-의존성이란 문제를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인간이 너무 잡다한 종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아바타나 사이버 모델에 의존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2)<자연어→시어>라는 방향은 후설의 수제자였지만, 현상학에서 존재론으로 ‘전향’함으로써 후설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하이데거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다(‘우리말로 철학하기’에 나선 이기상 교수가 하이데거 전공자인 것은 자연스럽다). 어차피 사유가 언어-의존적이라면, 최상의 언어, 최고의 언어를 사유의 질료로 삼아야 한다는 건 자연스러운 요구이다. 그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할 때, 그 언어는 ‘일요일의 언어’인 시어인 것이다. 은유적인 언어가 개념어보다도 더 탁월한 사유의 질료라는 걸 입증해 보인 니체의 경우도 이러한 계보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문학적 대상의 이념성’이라는 후설적 주제의 박사학위논문을 구상했지만(‘철학자 데리다’에 대한 정치한 분석서를 쓴 로돌프 가셰는 데리다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자가 후설이라고 말했다), 끝내 완결짓지 못하고 그라마톨로지와 차연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는 데리다의경우도 하이데거와 유사한 ‘전향’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데리다 전문가로서 김상환 교수가 가장 유려한 문체를 자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데리다 전문가가 글을 못쓴다는 건 넌센스이다). 지향성이나 이념성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언어인 것이다(사실 언어와 철학이란 문제는 훨씬 방대한 규모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정도의 글은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나는 이 문제와 정면대결할 기회가 오기를 기대한다. 방위병들을 데리고?).

대략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서두에서 ‘구멍’으로 제시한 문단을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한편,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에 대한 참조 없이 철학적 로고스만으로도 철학은 구성될 수 있다(주로 수학/논리학에서 바탕을 마련하고 있는 후설의 현상학이나 초기 분석철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단 나의 방점은 철학적 로고스만으로도 철학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며, 괄호안의 내용은 그 사례이다.

 

 

 

 

러셀은 자신의 <서양철학사>에서 서양철학자들을 신학적 계보와 수학적 계보로 구분한바 있다. 그에 따를 때, 후설이나 비트겐슈타인 등은 모두 수학적 계보에 속한다. 나는 후설의 현상학이 수학/논리학에서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는 지적이 어떤 근거에서 무리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가 현상학적 환원의 사례로 자주 드는 것도 삼각형 같은 것인데 말이다(어떠한 변양에도 동일성이 유지되는 이상형/이념형으로서의 삼각형이 삼각형의 노에마이다). 사실, 후설에 대한 관심은 일차적 관심이 아니라, 하이데거나 데리다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이차적 관심이다. 내가 직접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철학자에 대해서 여러 말을 늘어놓지 않겠다(그런 후설이 내게 지향적 대상으로 현상할 리도 만무하고).

그리고 이어서, “하지만,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를 끊임없이 참조함으로써 자극과 영감을 얻는 철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들뢰즈, 데리다, 후기 하이데거 등을 단번에 꼽을 수 있으며, 사르트르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와 탈무드로부터 근원적인 영감을 얻고 있는 레비나스의 윤리학까지).” 이제껏 해명해 온 것이니 여기서도 이해하기에 억지스러운 대목은 없어 보인다(에스토니아 태생의 레비나스는 어린시절 읽은 러시아 문학에 깊은 감화를 받았음을 고백한다).

나는 두 가지 유형의 철학에서 어떤 우열을 가정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두번째 유형, 즉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의 교합으로 이루어진 철학(그건 문학이어도 무방하다)에 애착을 갖고 있다(나는 이미 지난번 통신문의 말미에서 갈채와 꽃다발을 던진바 있다). 때문에, 사르트르와 데리다가 나의 ‘영웅’이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나는 로고스의 마임극을 사랑하는 것이다… 

 

 

 

 


P.S. 짧게 마감하려고 했던 글이 본의 아니게 또 (예상보다) 길어졌다. 좀 딱딱한 글이었던 것 같아서 시 한편을 옮겨둔다. 오규원의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이다(언젠가 한번 인용한 적이 있다). 아마도 ‘한국현대시와 현상학’이란 테마의 평문을 쓴다면, 내 생각에 오규원은 가장 먼저 거론돼야 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다만, 그의 주된 관심은 의식과 대상이 아니라 현상과 언어이다). 그는 사르트르가 잉크병을 바라보듯이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를 바라본다. 아마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으리라. 세보고 또 세보았으리라. 그리고 그걸 기술한다. 정확하게 있는 것들만. 정확하게 반짝이는 것들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들, 하지만, 없지 않고 차라리 있는 것들이 때로 정겹고 그냥 아름답다. 비록 깨어져 있더라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플라타너스가 쉰일곱 그루, 빌딩의 창문이 칠백열아홉, 여관이 넷, 여인숙이 둘, 햇빛에는 모두 반짝입니다.

대방동의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양념통닭집이 다섯, 호프집이 넷, 왕족발집이 셋, 개소주집이 둘, 레스토랑이 셋, 카페가 넷, 자동판매기가 넷, 복권 판매소가 한 군데 있습니다. 마땅히 보신탕집이 둘 있습니다. 비가 오면 모두 비에 젖습니다. 산부인과가 둘, 치과가 셋, 이발소가 넷, 미장원이 여섯, 모두 선팅을 해 비가 와도 반짝입니다.

빨간 우체통이 둘, 학교 담장 밑에 버려진 자전거가 한 대, 동작구 소속 노란 소형 청소차가 둘, 영화 포스터가 불법으로 부착된 벽이 셋, 비디오 가게가 여섯, 골목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전당포 안내 표지판과 장의사 하나, 보도 블록 위에 방치된 하수도 공사용 대형 원통 시멘트관 쉰여섯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표 가변 차선 표시등 하나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한 줄에 아홉 개씩 마름모꼴로 놓인 보도 블록이 구천오백네 개, 그 가운데 깨어진 것이 하나, 둘…… 여섯…… 열다섯…… 스물아홉…… 마흔둘……

P.S.2. 이 ‘깨어져 있음’에 대한 관심이 내게 빈틈없는 철학적 로고스보다는 문학적 로고스에 끌리도록 만든다(‘빈틈없는 것들’이 철학적 로고스에 끌린다면, ‘깨어진 것들’은 문학적 로고스에서 안식을 찾는다). 우리는 거기에 그렇게 깨어져 있는 것들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즉 ‘거기에 있음(being-there)’을 비틀어서 말하자면, 우리는 ‘거기에 깨어져 있음(being-broken-there)’이다. 그렇게 ‘널브러져 있음(being-scattered-there)’이다. 그렇게 ‘찌그러져 있음(being-battered-there)’이다. ‘모어-베터-블루스(More better blues)’를 들으며(이 ‘blues’에 군복이란 뜻도 있다는 건 아이러니이다)... 그렇게 (얼룩덜룩) ‘희미해져 있음(being-blured-there)’이다. 그렇게 ‘어색해져 있음(being-awkward-there)’이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를 흥얼거리며, 신병반(awakward squard)으로 들어갔었지… 몇 달이 지나고 나는 당번병 방에서 <자기 앞의 생>을 읽었지. 거기서 제대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기다리고 있음(being-waiting-there)’. 그리고 또 몇 달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고 나는 출근하는 대신에 시립도서관에 가서 <농담>을 빌려와 읽었지. 그리고는 이렇게 물어보았어. “O my life, o my God, you have to be joking?!” 그러더니 쩝쩝, 아직도 이런 농담을 쓰고 있네, 젠장...

06. 0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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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20세기의 이론서 21권

지난 월요일 교보에 잠시 들렀다가 발견한 의외의 책은 <테오리아 - 20세기를 대표하는 21권의 책>(개마고원, 2006)이었다. '이론(theory)'이란 말의 그리스 어원인 '테오리아'를 국역본의 제목으로 삼았는데, 독어본의 원제는 '세기의 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세기가 지난 세기이므로 '20세기의 책'이라 해야겠고, 그 책들이 모두 분류상 '이론서'들이다. 그러니까 테오리아의 어원적 의미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들을 대표하는 책 21권에 대한 평설집이라고 해야겠다. '20세기의 이론서 21권'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독일에서 개최된 ‘세기의 책-20세기의 이론들’이라는 기획 강의를 바탕으로 했다. 크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사유전통과 학문분야가 20세기에 거두었거나 적어도 거두려고 애쓴 성과는 무엇인가?”와, “그 학문들은 어떻게 그것들의 시대에 관여했고, 구체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위대한 이론은 무엇인가?”의 두 가지 문제 제기를 통해 산출된 결과물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이론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지속적인 시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판단되어 선정한 프로이트에서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21명의 사상가들과 그들의 책, 이론들을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각의 독특한 접근방법과 깊이를 가지고 밀도 있게 소개했다."

국내에서도 쏟아지고 있는 고전해제서들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문제는 그 해제/평설의 수준이겠다. "난해한 이론서들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해당 이론서들을 직접 읽어보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해줄" 수 있는 수준 말이다. 그리고 물론 그것이 적절하고 정확하게 우리말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21권의 이론서를 다루고 있는 만큼 600쪽 이상의 분량을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일단은 관심이 가는 책을 다루는 장들만 골라서 읽으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 시간조차 낼 수 없다면, 20세기를 '이론적으로' 관조하는 일에는 마음을 접고 눈길을 떼는 게 옳다. 그리고는 21세기만을 한눈팔지 않고 질주하는 게. 굿바이!

남은 자들끼리 누리는 호사가적 관심거리는 과연 21권을 고른 주최측의 안목(편견 혹은 혜안)을 음미해보는 것이겠다. 대략 '상식적인' 리스트인지라 모험적이라고 할 만한 책을 그닥 눈에 띄지 않지만 몇 권 정도는 '독일'쪽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한데, 이 21권 가운데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책은 몇 권이나 될까? '아르바이트' 중에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세어보도록 한다.

1.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 레나테 슐레지어

 

 

 

 

프로이트의 대표적인 저작 <꿈의 해석>은 주지하다시피 여러 종의 국역본이 나와 있다. 비록 번역서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기에는 좀 찜찜하다는 의견이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서 제기된 바 있지만.

2. 후설의 <논리 연구> - 미하엘 아스트로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저작들이 제법 소개되었고 연구서/논문들도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특이하게도 그의 초기 대표작인 <논리연구>는 번역돼 있지 않다. 분량의 방대함이 이유인지 내용의 난해함이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고전'의 네임밸류에 걸맞는 번역본이 조만간 나오기를 기대해본다(여담으로 덧붙이자면, 후설의 책은 왜 <논리적 탐구>가 아니라 <논리연구>인가,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책은 왜 <철학연구>가 아니라 <철학적 탐구>일까?).

3.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 헤르베르트 야우만

 

 

 

 

지난 1995년에 범우사판으로 나와 있는 <서구의 몰락>이 유일한 완역본이 아닌가 한다. 대학원 시절에 필요 때문에 1권만 사서 부분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나름대로 '세기의 책'에 꼽힐 만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책이지만, 프랑스에서 21권을 꼽았다면 들어갈 수 있었을까? 

4.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 한스 위르겐 헤링어

 

 

 

 

올해 책세상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새로운 전집이 나오고 있고, <논리철학논고>는 그 전집의 첫권이었다. 두툼한 <철학적 탐구>보다 얇은 <논고>가 선정된 건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 아닐까? <탐구>를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약간은 덜어주니까 말이다. <논고>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해설서로는 박영식 교수의 <비트겐슈타인 연구>(현암사, 1998)가 있다.

5. 베버의 <경제와 사회> - 볼프강 슐룩흐터

국역본은 <경제와 사회 1>(문학과지성사, 2003)으로 출간되었다. 소장도서가 아니어서 당장에 확인할 수는 없지만 완역본은 아니고 더 출간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한다. 국역본의 이미지가 뜨지 않아 대신에 영역본의 것을 옮겨놓는다.

6.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 위르겐 미텔슈트라스

 

 

 

 

두말할 것도 없는 책. 5권의 파이날(결선)을 꼽더라도 당연히 들어가야 할 책이다. 국역본으로는 이기상(까치글방, 1998), 소광희(경문사, 1995) 두 분의 번역본과 해설서를 각각 참조할 수 있다.  

7.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 헬무트 레텐

독일의 정치학자 칼 슈미트의 저작들은 비교적 많이 소개돼 있는 편이고 거기엔 물론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 1992)도 포함된다. 하지만 당장 서점에서 구해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짐작에 21권의 책들 가운데 가장 얇은 책이지 않을까 싶다. <논리철학논고>보다는 얇은 듯하니까. 이미지는 역시나 영역본의 것을 옮겨놓는다.

8. 겔렌의 <인간> - 카를-지크베르트 레베르크

 

 

 

 

아르놀트 겔렌은 '철학적 인간학'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보다 잘 알려진 철학적 인간학자로는 막스 셸러가 있지만(국내에도 더 많이 소개돼 있다), 독일에서는 겔렌의 <인간>이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모양이다. 겔렌이 책으론 <인간학적 탐구>(이문출판사, 1998)이 유일하게 번역돼 있는 책이지만, <인간>은 그보다 좀더 두툼한 책이다.

 

9.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 페터 뷔르거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굳이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고(<존재와 무>도 새 번역본이 나올 수 있을까?), 다만 해설을 쓴 '페터 뷔르거'란 이름이 반갑다. <해설자들 가운데 내가 아는 두엇 중의 한명이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론으로 유명한 문예이론가 뷔르거의 책은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심설당, 1986)를 필두로 하여 현재 네 권 가량이 번역/소개돼 있다.

10.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 게르하르트 쉬베펜호이저

 

 

 

 

이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인 책이겠다. 또한 <계몽의 변증법>이 확실한 고전인 것은 완독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어쨌든 국역본의 역자가 전면 개정판을 내야했을 만큼 '난해한' 책이기도 해서 적절한 안내서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영역본의 경우도 몇년 전 전면개역판이 나왔다). 아도르노를 술술 읽는 사람들이 나는 부럽고 미심쩍다.

11. 보부아르의 <제2의 성> - 크리스타 뷔르거

 

 

 

 

사르트르 커플의 책들이 나란히 선정된 것도 눈길을 끈다. 이젠 여성학의 '고전'이라고 해야할 책(크리스타 뷔르거는 혹 페터 뷔르거의 부인일까?). 보부아르와 관한 특이사항이 그녀가 국내에서는 철학자로서는 거의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 주로 출간되는 건 '사랑밖엔 난 몰라' 수준의 보부아르이다(그런 그녀가 여성학의 대모이다!).

12. 바흐친의 '변증법적 사유와 수사학' - 레나테 라흐만

 

 

 

 

특이한 일이지만 21권의 책이라고 해놓고 유일하게 구체적인 대표작이 명시돼 있지 않은 사상가가 바흐친이다. 일단은 국역본 <말의 미학>(길, 2006)을 대표작으로 꼽아둔다. 그리고 걸출한 연구서 <바흐친의 산문학>(책세상, 2006)은 나의 추천서이다. 해설자인 레나테 라흐만은 독일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이자 바흐친 학자이다. 역시나 아는 이름이어서 반갑다.

13.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 구조> - 발터 에어하르트

 

 

 

 

물론 <친족의 기본구조>는 국역본이 나와 있지 않다. 레비스트로스의 박사학위논문인데, <구조주의 인류학>이나 <신화학>보다 중요한 업적으로 간주하는 데에는 이 책이 구조주의 인류학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의 프로그램 자체를 가장 잘 보여준다는 판단이 전제돼 있지 않나 싶다. 회고 대담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에서 뒷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고, 책의 보다 구체적인 내용 해설은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을 참조할 수 있다.

14. 루카치의 <이성의 파괴> - 라이너 로젠베르크

 

 

 

 

흔히 루카치의 범작으로 평가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세기의 책'으로 꼽혀 있어서 놀랐다. 미완의 번역본까지 치면 세 종류의 국역본이 나와 있기도 한 책. 데카당스(반합리주의) 철학 비판서 정도로 나는 알고 있다. 보통 루카치의 주저로는 <역사와 계급의식>을 꼽는 게 일반적인데, 해설을 읽어보고 소장여부를 판단해봐야겠다.

15.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 기젤라 페벨

 

 

 

 

두말하면 잔소리인 책. 하지만, 국역본은 분량상 아직 1/3밖에 나오지 않은 책. 그 사이에 영역본은 개역본이 나왔다. <논리연구>가 한국현상학회의 아킬레스건이라면 <진리와 방법>은 한국해석학회의 '굴욕'이라 할 만하다. 고전 번역에 단합해야 하실 분들이 담합하고 계신 건 아니신지?

16.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 프란츠 폰 쿠체라

 

 

 

 

<과학혁명의 구조>는 국내에 2종의 번역이 있다. 까치글방본과 이화여대출판부본이 그것인데, 교수신문의 번역비평에 따르면 일장일단이 있지만 원저 자체의 난해함을 해소시켜주지는 못한다고. 학부 2학년 때 읽으면서 고전했던 기억이 새롭다(반면에 해설서들은 얼마나 단순명쾌한 것인지!).  

17. 푸코의 <말과 사물> - 우르줄라 링크-헤르

 

 

 

 

바케트빵처럼 팔려나갔다는 푸코의 이 주저 <말과 사물>(민음사, 1986)이 국내에선 절판중이다. 새 번역본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지만 '언제'라는 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의 빵집들이 고급 바케트를 내놓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하고(제빵공은 있나?). 이미지로 대신 올려놓은 것은 개리 거팅의 <미셸 푸꼬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이다. <광기의 역사>부터 <지식의 고고학>까지의 자세한 해설을 담고 있는 책이다.

18.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 베르너 슈테크마이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도 절판된 민음사판까지 포함하면 2종의 번역이 나와 있다. 초기 데리다의 간판격이 책이지만 역시나 읽은 사람 몇 되지 않는다(나도 완독하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 국역본들 외에 영어, 불어, 러시아어본까지 갖고 있어서 언젠가는 마스터해줄 책으로 꼽고는 있다. 조만간 해설서들도 나올 듯하고. 현재까지는 마이클 페인의 <읽기 이론/ 이론 읽기>(한신문화사, 1999)의 해설이 요긴하다.

19. 부르디외의 <실천이론 연구> - 에곤 프레이크

 

 

 

 

부르디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물론 <구별짓기>이지만, '이론서'로 꼽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나 보다. 한데, <실천이론 연구>가 정확히 어느 책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실천이성>도 국역본이 나와 있지만 짐작엔 'The Logic of Practice'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역본의 제목이 그렇고, 불어본의 제목은 <실천의 의미> 정도이다. 러시아어본도 출간돼 있는 책.

20. 하버마스의 <소통행위이론> - 콘라트 오트

 

 

 

 

올해 가장 번듯한 번역본이 나온 책. 역시나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21. 루만의 <사회의 사회> - 위르겐 포르만


 

 

 

하버마스와 함께 독일 사회학을 양분하고 있는 니클라스 루만의 책들은 국내에 좀 얄팍한 책들만 세권쯤 출간돼 있다. 거기에 입문서 한두 권. 그의 방대한 저작 <사회체계>가 구내에 번역/소개되기를 기대한다. <사회의 사회>가 그 사회체계론의 일부인지 독립된 저작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서 결론적으로 21권의 책들 가운데 5-6권 정도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듯하다. 양호한 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작들의 지명도를 생각하면 3-4권은 더 번역돼 있어야 했다. 21권의 책들 가운데 독어권의 책이 13권이니까 과반수가 넘는다. 불어 6권, 영어 1권, 러시아어 1권 순이다. 한편, 우리가 자랑할 만한 '세기의 책'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06. 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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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줄리 델피와 바타이유

 

  

 

 

필요 때문에 바타이유를 읽다가(생각보다 안 읽히는 대목이 많다) 기분전환 삼아 자료 검색을 했다. 그러다 발견한 글꼭지는 얼마전(2006. 03. 24) '한겨레'의 기획연재 '스크린 속 나의 연인'에 게재되었던 글이다. 영화 <분홍신>의 프로듀서 신창길씨가 필자이고, 그는 거기서 <비포 선라이즈>(1995)의 '셀린느'(줄리 델피를) 자신의' 연인'으로 호출하고 있었다. 한데, 그게 나에겐 줄리 델피와 바타이유의 '희귀한' 접속점을 알게 해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단은 필자의 그 연애담을 조금 따라가본다.  

 -그녀는 내가 결혼을 생각하게 만든 첫번째 여자였다. 가장 가슴 벅찬 열망과 가장 고통스런 비애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 그녀.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당시 그녀는 실패한 연애의 상처로 인해 심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난 달콤한 탈출구였다. 영화 하겠다고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진지하게 삶을 꾸려가는 것이 진정 의미있는 인생일 거라고, 순진하고 치기어린 얘기들을 들려주었고, 그녀는 나와 함께 대학로와 인사동을 오가며 영화와 공연장을 순례하고 둘만의 여행으로 고단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연애의 모양새는 갖췄지만, 늘 아슬아슬하고 불안했던 그녀와의 관계는 매순간 희열과 좌절의 극단을 넘나들게 했다. 내가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던 것은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환희와 열정을 붙잡고 싶은 욕망에서였다. 그녀의 일상이 편안해지고 문화탐험을 위주로 한 교양연애도 시들해지자, 결국 그녀는 좀 더 안정되고 부가가치 높은 삶을 향해 나를 떠나고 말았다. 결혼이라는 선택을 통해 보다 확실하게 자신의 삶을 위치지우고 싶어한 그녀는, 결혼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내비친 나를 정말 순진하고 치기 어리게 바라보았다.

-내가 가진 현실적인 불확실함까지 감내할 자신이 없었던 그녀의 선택에 난 크게 반발하지 않았지만, 희열과 열정이 사라진 공백과 허탈의 상처는 생각보다 컸다. 그때, 코아아트홀 일요일 조조상영에서 만난 그녀 ‘셀린느’(<비포 선라이즈>의 줄리 델피)는, 그때까지 내가 알던 연애와 사랑에 대한 생각을 한순간에 뒤집어놓은, 말 그대로 ‘발견’이었다(*나도 코아아트홀에서 봤었는데). 그동안 내가 붙들려 있었던 연애가 얼마나 과도한 욕망과 집착으로 버무려진 열병덩어리였는지, 정말 내가 사랑을 느끼는 대상은 누구이며 사랑을 이뤄가는 내용과 방식은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해 뒤통수를 치는 듯한 깨우침을 ‘셀린느’는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단 하룻밤의 시간뿐. 비엔나 거리를 거닐면서 제시와 셀린느는 참 많은 얘기를 나눈다. 고즈녁히 책을 보며 대화를 하는 그녀. 서글서글한 눈매에 담백한 인상의 그녀는 지적이고 사려 깊기까지 하다. 매력적인 눈웃음에 천진한 미소, 나긋한 목소리에 맑고 풍부한 감수성까지…. 내가 제시가 되어 비엔나의 밤거리를 함께 거니는 듯 나른한 흥분에 빠져들었다. 제시가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건네게 만든, 기차 안에서 그녀가 읽고 있었던 바타이유의 <죽은 자>도 서점을 뒤져가며 열심히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불행히도 번역본을 구할 수 없었다.

(*)나는 셀린느가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데, 바타이유의 <죽은 자>라고 하니까, 아마도 그의 소설 'The Dead Man'을 가리키는 것 같고, 보통의 영역본에는 'My Mother', 'Madame Edwarda'와 함께 묶여 있다(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 바타이유 소설선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여하튼 그래서 '줄리 델피와 바타이유'가 한데 묶이게 되는 것. 참고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의 해뜨기 전 짧은 사랑이야기, 곧 <비포 선라이즈>의 줄거리를 이미지로 잠시 따라가본다(중국어판에서 옮겨온 탓에 중국어 자막이 들어간 장면도 있다).

-그때 이후, 별 내세울 것도 없는 내 사랑과 연애는 이른바 ‘셀린느 찾기’의 흥미롭고도 지난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신념어린 의지(!) 끝에 마침내, 나는 나의 셀린느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제시와 셀린느가 <비포 선셋>에서 다시 만난 바로 그때, 나는 나의 셀린느와 함께 옛날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크린 속 10년 만에 만난 그들은, 지난 시간의 엇갈림과 회한 속에 아쉬운 두 번째 이별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객석의 나는 흐뭇한 행복감을 만끽하며 나의 셀린느의 손을 꼭 쥔 채, 그들을 애틋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난 후 다시 보는 셀린느. 늘어난 잔주름과 시간이 남기고 간 흔적들은 오랜만의 그녀에게서 발견한 안타까움이었지만, 나에게 그녀는, 사려깊고 당당하며 진지하고 순수한 10년 전 비엔나 밤거리의 셀린느, 그대로였다.

(*)나는 <비포 선셋>(2004)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작년에 비디오로 봤는데(그러니까 해가 뜨고 지기까지 내겐 10년이 걸렸다), 어느덧 '선라이즈'보다 '선셋'에 더 공감하는 나이가 됐음을 확인하고 좀 씁슬했다. 내친 김에 <비포 선셋>에 등장하는 제시와 셀린느의 '10년후'도 따라가보기로 한다. 사이즈가 좀 큰게 흠이군...

 

우리는 저마다 가슴에 '비엔나'를 품고 있지만(이 스틸 사진들 속에 각자의 연인들을 채워넣는 일은 부득불하며 불가피하다. 그것이 어떤 풍경이든지간에), 비엔나에도 해는 진다. 사랑하기에도 짧은 시간에, 젠장, 책까지 읽어야 하다니!..

Before Sunset

06. 04. 09.

P.S. 때아닌 감상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해서, 얼마전에 나온 유기환 교수의 <조르주 바타이유>(살림, 2006)에 대한 동아일보의 리뷰(2006. 02. 25)를 옮겨온다. 책은 나도 단번에 읽었었는데, 리뷰를 쓰는 건 다른 일들에 밀려 늦추어졌었다. 조만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흔히 바타이유의 사상은 난해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은 난해하기보다는 난삽하고, 복잡하기보다는 산만하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난삽하고 산만하다는 걸 <저주의 몫>을 읽으며 새삼 깨닫게 됐다.) 흔히 ‘저주받은 작가’로 불리는 조르주 바타이유(1897∼1962)의 사상 체계를 조리 있게 정리한 이 책에서 불문학자인 유기환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이렇게 바타이유에 대해 독자들이 품고 있는 ‘죄책감’을 말끔히 씻어 준다.

 

 

 

 

-바타이유는 초현실주의의 제왕 브르통과 실존주의의 지존 사르트르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비판을 했던 작가였다(*서로 사이가 다 안 좋았다). 이는 그의 글이 니체의 강한 영향 아래 애초부터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함에 따라 늘 모순과 역설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타이유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저주의 몫>(1949년)과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꼽히는 <에로티시즘>(1957년)을 통해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준다(*<에로티시즘>이 아니라 <에로티즘>이다. 영역본도 그렇게 표기한다). 특히 그의 정치경제학 저서라고 할 <저주의 몫>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바타이유는 마르크스처럼 ‘과잉(잉여)’의 문제에 천착했다. 마르크스는 이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지만 바타이유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봤다. 태양이 지구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보내는 것처럼. 문제는 이 과잉 자체가 아니라 이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양차 대전의 발발은 바로 과잉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해 발생한 부작용의 극치였다. 바타이유는 이 과잉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비생산적 소비’를 제시한다. 그것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대가 없이 증여하거나 심지어 불태우는 ‘포틀래치’처럼 수요공급의 법칙에 어긋나는 소비다. 바타이유가 발견한 이 ‘소비의 경제학’은 오늘날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서는가.

-생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행위를 뜻하는 에로티시즘은 그러한 비생산적 소비의 또 다른 대표 사례다. 인간이 에로티시즘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록 순간일지라도 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며 금기의 위반을 통해 증대하는 쾌락의 경제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전히 바타이유에 대한 저주의 봉인을 풀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금기와 위반의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 ‘돌이 될 것’이라는 위협에도 신이 돌아보지 말라고 했던 곳을 응시함으로써 예언력을 획득한 그의 신탁을 듣기 위함은 아닐까.

바타이유의 관점에서 볼 때, 제시와 셀린느의 사랑은 '사랑의 이전의 사랑' 혹은 '에로티즘 없는 사랑'이다('비포 러브'라고 해야 할까?). 왜냐하면, 거기엔 어떠한 과잉도 어떠한 비생산적 소비도 자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정의 너울거림에 잠시 삶을 의탁하지만, 그 경계에서 다시 회수해간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에는 언제나 테이블 하나 정도의 거리가 끼여드는 것. 그 거리는 (불가피하다고 믿어지기에) 아쉽고, 안타깝고, 서운하고, 애틋하다. 그러한 여운 속에 그들이 남겨놓은 질문은 한 가지이다. '그들은 정말 사랑한 걸까?' 예의상, 이 질문을 우리 자신들에게는 던지지 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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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20세기의 이론서 21권

지난 월요일 교보에 잠시 들렀다가 발견한 의외의 책은 <테오리아 - 20세기를 대표하는 21권의 책>(개마고원, 2006)이었다. '이론(theory)'이란 말의 그리스 어원인 '테오리아'를 국역본의 제목으로 삼았는데, 독어본의 원제는 '세기의 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세기가 지난 세기이므로 '20세기의 책'이라 해야겠고, 그 책들이 모두 분류상 '이론서'들이다. 그러니까 테오리아의 어원적 의미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들을 대표하는 책 21권에 대한 평설집이라고 해야겠다. '20세기의 이론서 21권'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독일에서 개최된 ‘세기의 책-20세기의 이론들’이라는 기획 강의를 바탕으로 했다. 크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사유전통과 학문분야가 20세기에 거두었거나 적어도 거두려고 애쓴 성과는 무엇인가?”와, “그 학문들은 어떻게 그것들의 시대에 관여했고, 구체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위대한 이론은 무엇인가?”의 두 가지 문제 제기를 통해 산출된 결과물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이론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지속적인 시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판단되어 선정한 프로이트에서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21명의 사상가들과 그들의 책, 이론들을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각의 독특한 접근방법과 깊이를 가지고 밀도 있게 소개했다."

국내에서도 쏟아지고 있는 고전해제서들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문제는 그 해제/평설의 수준이겠다. "난해한 이론서들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해당 이론서들을 직접 읽어보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해줄" 수 있는 수준 말이다. 그리고 물론 그것이 적절하고 정확하게 우리말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21권의 이론서를 다루고 있는 만큼 600쪽 이상의 분량을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일단은 관심이 가는 책을 다루는 장들만 골라서 읽으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 시간조차 낼 수 없다면, 20세기를 '이론적으로' 관조하는 일에는 마음을 접고 눈길을 떼는 게 옳다. 그리고는 21세기만을 한눈팔지 않고 질주하는 게. 굿바이!

남은 자들끼리 누리는 호사가적 관심거리는 과연 21권을 고른 주최측의 안목(편견 혹은 혜안)을 음미해보는 것이겠다. 대략 '상식적인' 리스트인지라 모험적이라고 할 만한 책을 그닥 눈에 띄지 않지만 몇 권 정도는 '독일'쪽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한데, 이 21권 가운데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책은 몇 권이나 될까? '아르바이트' 중에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세어보도록 한다.

1.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 레나테 슐레지어

 

 

 

 

프로이트의 대표적인 저작 <꿈의 해석>은 주지하다시피 여러 종의 국역본이 나와 있다. 비록 번역서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기에는 좀 찜찜하다는 의견이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서 제기된 바 있지만.

2. 후설의 <논리 연구> - 미하엘 아스트로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저작들이 제법 소개되었고 연구서/논문들도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특이하게도 그의 초기 대표작인 <논리연구>는 번역돼 있지 않다. 분량의 방대함이 이유인지 내용의 난해함이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고전'의 네임밸류에 걸맞는 번역본이 조만간 나오기를 기대해본다(여담으로 덧붙이자면, 후설의 책은 왜 <논리적 탐구>가 아니라 <논리연구>인가,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책은 왜 <철학연구>가 아니라 <철학적 탐구>일까?).

3.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 헤르베르트 야우만

 

 

 

 

지난 1995년에 범우사판으로 나와 있는 <서구의 몰락>이 유일한 완역본이 아닌가 한다. 대학원 시절에 필요 때문에 1권만 사서 부분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나름대로 '세기의 책'에 꼽힐 만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책이지만, 프랑스에서 21권을 꼽았다면 들어갈 수 있었을까? 

4.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 한스 위르겐 헤링어

 

 

 

 

올해 책세상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새로운 전집이 나오고 있고, <논리철학논고>는 그 전집의 첫권이었다. 두툼한 <철학적 탐구>보다 얇은 <논고>가 선정된 건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 아닐까? <탐구>를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약간은 덜어주니까 말이다. <논고>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해설서로는 박영식 교수의 <비트겐슈타인 연구>(현암사, 1998)가 있다.

5. 베버의 <경제와 사회> - 볼프강 슐룩흐터

국역본은 <경제와 사회 1>(문학과지성사, 2003)으로 출간되었다. 소장도서가 아니어서 당장에 확인할 수는 없지만 완역본은 아니고 더 출간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한다. 국역본의 이미지가 뜨지 않아 대신에 영역본의 것을 옮겨놓는다.

6.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 위르겐 미텔슈트라스

 

 

 

 

두말할 것도 없는 책. 5권의 파이날(결선)을 꼽더라도 당연히 들어가야 할 책이다. 국역본으로는 이기상(까치글방, 1998), 소광희(경문사, 1995) 두 분의 번역본과 해설서를 각각 참조할 수 있다.  

7.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 헬무트 레텐

독일의 정치학자 칼 슈미트의 저작들은 비교적 많이 소개돼 있는 편이고 거기엔 물론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 1992)도 포함된다. 하지만 당장 서점에서 구해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짐작에 21권의 책들 가운데 가장 얇은 책이지 않을까 싶다. <논리철학논고>보다는 얇은 듯하니까. 이미지는 역시나 영역본의 것을 옮겨놓는다.

8. 겔렌의 <인간> - 카를-지크베르트 레베르크

 

 

 

 

아르놀트 겔렌은 '철학적 인간학'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보다 잘 알려진 철학적 인간학자로는 막스 셸러가 있지만(국내에도 더 많이 소개돼 있다), 독일에서는 겔렌의 <인간>이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모양이다. 겔렌이 책으론 <인간학적 탐구>(이문출판사, 1998)이 유일하게 번역돼 있는 책이지만, <인간>은 그보다 좀더 두툼한 책이다.

 

9.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 페터 뷔르거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굳이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고(<존재와 무>도 새 번역본이 나올 수 있을까?), 다만 해설을 쓴 '페터 뷔르거'란 이름이 반갑다. <해설자들 가운데 내가 아는 두엇 중의 한명이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론으로 유명한 문예이론가 뷔르거의 책은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심설당, 1986)를 필두로 하여 현재 네 권 가량이 번역/소개돼 있다.

10.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 게르하르트 쉬베펜호이저

 

 

 

 

이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인 책이겠다. 또한 <계몽의 변증법>이 확실한 고전인 것은 완독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어쨌든 국역본의 역자가 전면 개정판을 내야했을 만큼 '난해한' 책이기도 해서 적절한 안내서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영역본의 경우도 몇년 전 전면개역판이 나왔다). 아도르노를 술술 읽는 사람들이 나는 부럽고 미심쩍다.

11. 보부아르의 <제2의 성> - 크리스타 뷔르거

 

 

 

 

사르트르 커플의 책들이 나란히 선정된 것도 눈길을 끈다. 이젠 여성학의 '고전'이라고 해야할 책(크리스타 뷔르거는 혹 페터 뷔르거의 부인일까?). 보부아르와 관한 특이사항이 그녀가 국내에서는 철학자로서는 거의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 주로 출간되는 건 '사랑밖엔 난 몰라' 수준의 보부아르이다(그런 그녀가 여성학의 대모이다!).

12. 바흐친의 '변증법적 사유와 수사학' - 레나테 라흐만

 

 

 

 

특이한 일이지만 21권의 책이라고 해놓고 유일하게 구체적인 대표작이 명시돼 있지 않은 사상가가 바흐친이다. 일단은 국역본 <말의 미학>(길, 2006)을 대표작으로 꼽아둔다. 그리고 걸출한 연구서 <바흐친의 산문학>(책세상, 2006)은 나의 추천서이다. 해설자인 레나테 라흐만은 독일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이자 바흐친 학자이다. 역시나 아는 이름이어서 반갑다.

13.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 구조> - 발터 에어하르트

 

 

 

 

물론 <친족의 기본구조>는 국역본이 나와 있지 않다. 레비스트로스의 박사학위논문인데, <구조주의 인류학>이나 <신화학>보다 중요한 업적으로 간주하는 데에는 이 책이 구조주의 인류학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의 프로그램 자체를 가장 잘 보여준다는 판단이 전제돼 있지 않나 싶다. 회고 대담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에서 뒷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고, 책의 보다 구체적인 내용 해설은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을 참조할 수 있다.

14. 루카치의 <이성의 파괴> - 라이너 로젠베르크

 

 

 

 

흔히 루카치의 범작으로 평가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세기의 책'으로 꼽혀 있어서 놀랐다. 미완의 번역본까지 치면 세 종류의 국역본이 나와 있기도 한 책. 데카당스(반합리주의) 철학 비판서 정도로 나는 알고 있다. 보통 루카치의 주저로는 <역사와 계급의식>을 꼽는 게 일반적인데, 해설을 읽어보고 소장여부를 판단해봐야겠다.

15.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 기젤라 페벨

 

 

 

 

두말하면 잔소리인 책. 하지만, 국역본은 분량상 아직 1/3밖에 나오지 않은 책. 그 사이에 영역본은 개역본이 나왔다. <논리연구>가 한국현상학회의 아킬레스건이라면 <진리와 방법>은 한국해석학회의 '굴욕'이라 할 만하다. 고전 번역에 단합해야 하실 분들이 담합하고 계신 건 아니신지?

16.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 프란츠 폰 쿠체라

 

 

 

 

<과학혁명의 구조>는 국내에 2종의 번역이 있다. 까치글방본과 이화여대출판부본이 그것인데, 교수신문의 번역비평에 따르면 일장일단이 있지만 원저 자체의 난해함을 해소시켜주지는 못한다고. 학부 2학년 때 읽으면서 고전했던 기억이 새롭다(반면에 해설서들은 얼마나 단순명쾌한 것인지!).  

17. 푸코의 <말과 사물> - 우르줄라 링크-헤르

 

 

 

 

바케트빵처럼 팔려나갔다는 푸코의 이 주저 <말과 사물>(민음사, 1986)이 국내에선 절판중이다. 새 번역본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지만 '언제'라는 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의 빵집들이 고급 바케트를 내놓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하고(제빵공은 있나?). 이미지로 대신 올려놓은 것은 개리 거팅의 <미셸 푸꼬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이다. <광기의 역사>부터 <지식의 고고학>까지의 자세한 해설을 담고 있는 책이다.

18.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 베르너 슈테크마이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도 절판된 민음사판까지 포함하면 2종의 번역이 나와 있다. 초기 데리다의 간판격이 책이지만 역시나 읽은 사람 몇 되지 않는다(나도 완독하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 국역본들 외에 영어, 불어, 러시아어본까지 갖고 있어서 언젠가는 마스터해줄 책으로 꼽고는 있다. 조만간 해설서들도 나올 듯하고. 현재까지는 마이클 페인의 <읽기 이론/ 이론 읽기>(한신문화사, 1999)의 해설이 요긴하다.

19. 부르디외의 <실천이론 연구> - 에곤 프레이크

 

 

 

 

부르디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물론 <구별짓기>이지만, '이론서'로 꼽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나 보다. 한데, <실천이론 연구>가 정확히 어느 책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실천이성>도 국역본이 나와 있지만 짐작엔 'The Logic of Practice'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역본의 제목이 그렇고, 불어본의 제목은 <실천의 의미> 정도이다. 러시아어본도 출간돼 있는 책.

20. 하버마스의 <소통행위이론> - 콘라트 오트

 

 

 

 

올해 가장 번듯한 번역본이 나온 책. 역시나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21. 루만의 <사회의 사회> - 위르겐 포르만


 

 

 

하버마스와 함께 독일 사회학을 양분하고 있는 니클라스 루만의 책들은 국내에 좀 얄팍한 책들만 세권쯤 출간돼 있다. 거기에 입문서 한두 권. 그의 방대한 저작 <사회체계>가 구내에 번역/소개되기를 기대한다. <사회의 사회>가 그 사회체계론의 일부인지 독립된 저작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서 결론적으로 21권의 책들 가운데 5-6권 정도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듯하다. 양호한 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작들의 지명도를 생각하면 3-4권은 더 번역돼 있어야 했다. 21권의 책들 가운데 독어권의 책이 13권이니까 과반수가 넘는다. 불어 6권, 영어 1권, 러시아어 1권 순이다. 한편, 우리가 자랑할 만한 '세기의 책'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06. 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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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연세 필독 도서- 프랑스 문학

타르튀프 몰리에르

 

 

 

 

페르시아인의 편지 몽테스키외

 

 

 

 

마농 레스코 아베

 

 

 

 

적과 흑

 

 

 

 

고리오 영감 발자크

 

 

 

 

보바리 부인 플로베르

 

 

 

 

악의 꽃 보들레르

 

 

 

 

스완네 집 쪽으로 프루스트

 

 

 

 

이방인 까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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