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삶
이종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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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내려가자. 내가 잡아줄게."

     "내려가면?"

     "물에서 놀지."

     "땅에서 노는 걸로 충분해."

     "난 안 그래."

     "그렇겠지."

     참치는 호주에 간다. 나는 여기 남을 것이다. 참치는 뭐든지 금방 익히지만 나는 모든 것에 서툴다. 아침마다 걷는 법을 새로 배운다. 출근하는 길에 지하철역 입구에서 멈춰 선 적도 있다. 걷는 것이 생소했다. 억지로 걷다보면 머리가 멍해진다.

     "어서."

     참치가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헤엄칠 줄 몰라서 그래?"

     참치가 내 옆에 쭈그려앉아서 물었다.

     "그래."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는 물속에 살잖아. 헤엄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없대. 서서히 잊어가는 거지."

     "그래. 나는 헤엄치는 법을 잊었어."


     게으른 사람은 자아분열을 겪으며 산다. 육년 전, 나는 원룸의 방바닥에 들러붙은 채로 잠에서 깼다. 창문에 붙은 불투명 시트지 사이로 빛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시들시들한 파란 빛이었다. 얼마나 잔 건지. 방이 눅눅하고 시커맸다. 머릿속에 이끼가 낀 것처럼 띵하고 허리가 아팠다.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생각했다. 난 뭐지. 왜 이러고 있지. 어떻게 되려고 이러지.

     대학 시절은 온통 그런 자책의 순간들로 얼룩덜룩하다. 하루나 이틀 잘 나가나 싶으면 그 다음 하루나 이틀은 또 그 모양이었다. 동기들은 학교에 가는 길에 내 원룸에 들렀다. 내 목덜미를 잡아가지고 학교에 갔다. 학교에 가면 너도나도 필기한 노트를 복사해 가방에 구겨넣어 주었다. 교수님도 동참했다. 결석 일자를 하나나 두개 지워주었다. 시험기간이 되면 모두가 힘을 합쳐 나를 도서관에 앉혀놓았다. 도서관 문을 잠그는 열한 시가 가까워지면 나는 도망가려고 했고 동기들은 나를 나머지 공부 명단에 적어 경비원에게 제출했다.

     왜 내가 이렇게 해야 해? 물으면 대답은 백한 가지라도 거뜬히 되돌아왔다. 백 개 정도는 납득할 수 있는 대답들이었다. 왜 그렇게 못하는데? 하고 물으면 단 한 가지 대답도 쉽게 해줄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 머무는 이유들은 몇 가지 된다. 내뱉지 못할 뿐. 내뱉지 못하는 것은 나와 동기들 사이에 동의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약속이 만들어지는 것은 자의적이지만 이미 만들어진 약속은 사회적이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의 둘레에 울타리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어떻든 울타리 안에 있었고 목구멍에 차오르는 이유들을 삼키고 스스로를 다잡아야 했다.

     게으른 사람은 게으른 자신을 계속해서 자책할 수밖에 없다. 일찍 일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수업을 끝까지 듣지 못하는 자신을, 시험기간에 도서관에 있기 싫은 자신을, 학점을 잘 받지 못하는 자신을, 팀 프로젝트에 끼는 것이 힘든 자신을 끝없이 자책할 수밖에 없다. 그냥 하면 되는데 왜 안 해? 하는 남들의 말을 벌처럼 들으면서.


     #94.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거기서 막혔다. 나아는 누구십니까. 나아는 누구냐. 너구리입니다. 노진이입니다. 여우입니다. 곰입니다. 치킨입니다. 괴물입니다. 붙여서 불러볼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아는 너구리여우곰치킨괴물 노진이입니다. 그 이름 초울트라슈퍼괴물 같구나.

     괴물이 됐나. 언제부터. 그 밤부터였을까. 참치와 자정 넘어 들어간 그 귀갓길에. 아니면 국화차를 마신 아침에. 국화차에 이상한 물질이 들었던 걸까. 아니면 상해가는 연어를 먹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헤엄치는 법을 잊은 다음부터일까. 그래서 나는 이제 점점 걷는 법이나 숨쉬는 법까지 잊어가고 있는 걸까.

     걷다. 숨쉬다. 그런 말이 생소해질 날이 오기도 할까. 살다. 사랑하다. 그런 말은 이미 너무 낯선데.


     이종산의 [게으른 삶]은 지하철역 입구에 멈춰 선 나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지 못한다. 함께 멈춘다. 왼 발이 들렸을 때 오른발, 오른발이 들렸을 때 왼발. 움직이는 땅, 움직이는 허공, 빠르게 지나치는 옆사람을 전반적으로 보지 못하는 내 옆에 너구리도 함께 서 있다. 땅바닥에 들러붙어 있던 몸을 일으키면 다시 태곳적으로 돌아가 걷기와 말하기, 숨쉬기, 시선 맞추기, 움직이기와 행동하기를 배워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게으른 사람은 빨리 익힐 수가 없다. 그걸 두고 게으른 사람의 속도와 게으르지 않은 사람의 속도의 차이를 언급할 수는 없다. 변명이 되기 때문이고, 변명하려면 분열적 상황에 나를 내몰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동어반복적으로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게으른 사람은 빨리 익힐 수가 없다. 게으르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함께 약속한 울타리 안에서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다. 울타리를 약속하는 것은 약속을 지키는 일까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킬 수가 없는 나 자신을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제일 미워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나를 끝없이 미워할 운명에 놓인다. 하지만 미워하는 것만으로는 약속을 지킬 수가 없다. 그것과 그것은 별개의 힘을 필요로 한다.


     #135.

     나는 쭈그려앉아서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참치가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역시 나에겐 로렌치니기관이 있어.

     그것이 지나간 뒤 나는 일어섰다.

     더 볼 거야?

     내가 물었다. 참치가 나와 눈을 맞췄다.

     뭐가 그렇게 불안해?

     물고기와 말하는 법을 잊어버릴까봐.

     잊어버리면 다시 배우면 돼.

     귀찮아.

     그럼 내 옆에 있어. 같이 가.

     귀찮아.

     뭐가 그렇게 무서워?

     귀찮다니까.

     뭐가 그렇게 귀찮아?

     어려워.


     어쩌면, 게으른 사람에 대해서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을 때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게으른 사람에 대해서 다른 대답을 가능하게 하려면 울타리를 깨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매일매일 근면성실하게 주어진 삶을 산다. 도전하고, 금방 익힌다. 또 어떤 사람은 하루 한 가지 일을 하는 것도 버거워 겨우겨우 한다. 도전하기는 커녕 머무르고, 금방 익히기는 커녕 알던 것도 매번 잊는다. 이 삶에다가 대고 삿대질하지 않고 가치를 매기지 않는 작업이 곧 울타리 깨기 작업이다. 울타리 깨기 작업을 통해 게으름은 우리의 안방으로 성큼 들어올 수가 있게 된다.

     안방에 게으름을 들여놓는 것. 자격 미달된 것들과 낙오된 것들까지도 볼 수 있는 시야를 갖는 것. 그런 작업이 필요하다는 게 게으른 내 생각이다. 모두가 마찬가지겠지만 한 개인의 속에는 서로 다른 수많은 자아가 있다. 자아들은 긍정적인 자아와 부정적인 자아로 구분되어 안방과 샛방에 나뉘어 살게 된다. 안방에 사는 자아는 샛방에 사는 자아를 타자로 구분하고 미워한다. 그리고 내가 나의 또 다른 면모를 미워하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다. 나는 내 삶이 나의 여러 자아들을 하나 하나 안방으로 들여놓는 작업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종산의 책 [게으른 삶]은 그 작업에 상당부분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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