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자 씨, 지금 무슨 생각하세요? - 노년의 심리를 이해하는 112개 키워드
사토 신이치 지음, 우윤식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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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발전 속도가 여타 국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속’이었다. 그런 탓일까. 각 세대가 겪은 시대상이 완전히 달랐으며, 세대 간 격차의 폭이 크고 특징도 확연하게 다르다. 그 사이에서 피어올랐던 갈등의 불씨가 이제는 눈에 띄는 큰불이 되어 세대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각 세대는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사실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서로의 삶과 경험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80년 전에 광복을 맞고 그로부터 겨우 5년이 지나 반도를 둘로 쪼갠 큰 전쟁이 일어났다. 국민들은 피난길에 올랐다. 겨우 전쟁이 끝났나 했더니 새로 선 정권은 투표를 조작해 권력을 쥐려 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이 들고일어난 게 64년 전이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나라는 20년에 가까운 독재 정권 아래 20세기 중반을 보냈고, 그것이 겨우 끝났나 싶었더니 80년대에는 군부독재 정권 하에서 억압당해야 했다. 민주화가 되어 이제 좀 살만해지려나 싶은 90년대에는 IMF라는 특수한 경제 상황을 겪었으며, 그리고 겨우 5년이 지나 월드컵 4강이라는 쾌거를 얻으며 온 국민이 하나가 되었고, 그리고 또 5년이 지나 다시 경제 불황을 겪었다.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손에 놓이게 된 건 이제 10년이 조금 넘었고, 스마트폰과 함께 태어난 아이들이 벌써 중학생이 되었다.


이렇게 정리하니 정말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국가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이 모든 일이 한 사람의 생애에서 벌어진 일이다. 광복과 함께 태어난 어르신은 저 모든 ‘역사’를 사는 내내 겪은 것이다. 상상이 가는가? 특히나 기술의 발전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는 21세기에 들어 어르신들은 적응해야 하는 일의 연속이었을 테다. 특히나 “나이가 들면서 인지 능력의 분배와 순간적인 판단 속도가 떨어지는”(93쪽) 상황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와 기술에 적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해하려는 노력을 더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 읽게 된 책이 바로 노년 행동 부문의 전문가인 사토 신이치의 <고령자 씨, 지금 무슨 생각하세요?>이다. 책의 뒤표지에는 이런 질문들이 적혀 있다. 책에서는 “우리의 이웃인 노인을 친밀감을 담아 ‘고령자 씨’라고 부르”(8쪽)고 있다. (너무 귀엽다.)

- 고령자 씨는 왜 고집이 세고 화가 많을까?

- 자기에게 불리한 기억은 쉽게 잊는 이유

- 위험하다고 아무리 말려도 왜 운전대를 놓지 못할까?

- 단단히 일러도 결국 보이스 피싱 사기를 당하는 심리

- 아내와 사별한 남편이 금방 아내 뒤를 따르는 까닭은?

- 고립된 생활을 하면 치매 위험이 높아질까?

- 어떤 고령자 씨는 왜 집 안을 쓰레기장으로 만들까?

- 왜 전문가의 돌봄은 거부하고 자식의 도움을 받으려 할까?


모두가 궁금해하던 부분이다. 특히 잊을 만하면 고령자 씨(나도 책을 따라 어르신을 고령자 씨로 부르겠다)가 가해자인 교통사고 소식이 들려오는 요즘, 심지어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하면 교통카드를 제공하겠다는 제도가 서울시에 등장한 요즘, 고령자 씨는 어째서 본인의 순발력과 인지 능력이 저하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운전대를 놓지 못하는지 그 까닭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을 거다.


책에서는 이를 ‘자기 효능감’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


“최근에는 일상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디지털화가 진행되어 평상시에 고령자 씨가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매일 외출한 김에 장 보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는 고령자 씨도 많을 텐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고객이 스스로 조작하는 셀프 계산대를 도입한 점포가 늘어나면서 이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고령자 씨가 점원을 부르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고령이 되면 체력이 떨어지고 외출하는 것도 힘이 듭니다. 전철을 타는 것도 승차권 발매기와 자동 개찰구 등의 사용법을 알지 못해 역무원에게 하나하나 물어봐야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운전을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곧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인 것입니다.” (94쪽)


이는 비단 운전뿐만이 아니라, 최근 우리나라에 급속도로 늘어난 주문 키오스크에도 해당되는 설명이라고 본다. 주문 키오스크는 사실 젊은이들도 처음에는 뭘 눌러야 할지 당황하게 되는데, 중년 이상의 고객들은 더 할 것이다. 그나마 젊은 일행이나 자녀와 함께 매장을 방문하는 경우에는 대신해 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미안해하며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는 자기 효능감을 떨어뜨림과 동시에 무력감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렇듯 빠른 기술 채택 속도로 제 손으로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율성이 하락하면 사람은 저도 모르게 마음의 벽을 세우게 되고, 해당 세대와 사회와의 갈등, 나아가 주변인 혹은 아래 세대와의 갈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


MZ 세대나 알파 세대로 정의되는 이들을 더 잘 알기 위해 사람들은 책도 내고 그것을 사서 읽고 공부하지 않나. 그러나 고령자 씨에 관해 알려고 노력을 들이는 이는 관련 부문 종사자나 전문가 뿐인 것 같다. 우리네 부모님들도 결국 고령자 씨가 될 거다. 나는 나의 부모님을 떠올리며 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책은 5부로 구성돼 있다.


​1. 고령자 씨,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2. 고령자 씨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꼭 알아야 할 것들

3.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고령자 씨의 말과 행동들

4. 고령자 씨의 오늘이 힘겹고 위태로운 이유

5. 고령자 씨의 내일이 더 나아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특히 2부부터는 고령자 씨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해당 설명과 연관된 전문적 설명, 즉 ‘키워드’를 함께 알려주고 있어 단순히 전문가 개인의 의견이나 이론이 아니라 그 바탕에 있는 전문 지식을 함께 접할 수 있어 좋았다. 



이를테면 2부 2장 ‘왜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쉬이 잊어버릴까’에서는 “고령자 씨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골라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51쪽)라면서 ‘기억 작동 방식’, ‘단기 기억’, ‘작업 기억’, ‘현재 기억’, ‘잠재 기억’ 등을 함께 설명한다. 꼭 고령자 씨를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개인적인 지식 습득 면에서도 꽤 유용한 부분이다. 이를 설명하면서 삽입한 아래의 그림은 얼굴마저도 고령자 씨의 얼굴이나 뭔가 귀여웠다 ㅎㅎㅎ


개인적으로 책 표지를 정말 찰떡같이, 호기심을 유발하도록 잘 그렸다고 생각한다. 원서의 표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3부까지는 고령자 씨를 더 이해하기 위한 내용이라면, 4부부터는 미래의 고령자 씨가 될 우리도 유념하면 좋을 내용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고령자 씨가 된다. 젊음에 영원히 머무르는 사람은 없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최근 우리나라는 특히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많이 사라졌다고 느낀다. 미래의 고령자 씨가 될 나를 위해서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조금씩 더 해 보면 어떨까 싶다. 당장 나부터도 쉽지 않겠지만, 노력할 생각도 없는 것과 그래도 해 보려는 생각을 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거다.



* 하니포터8기 활동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가족은 고령자 씨 본인을 공격하거나 능력의 저하를 인정하게 하는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 P96

특수 사기는 TV와 신문에서도 반복적으로 보도되는데 왜 속는 걸까요? 이유는 세 가지 입니다. 첫 번째로 고령자 씨에게는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 두 번째 이유는 고령자 씨가 ‘이득을 본다‘는 말에 약하다는 것입니다. (...) 세 번째 이유는 ‘나는 성격이 똑 부러지고 의심이 많으니까 괜찮다‘라는 자신감 과잉입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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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공간에서 너를 그린다 - 세월호참사 10년, 약속의 자리를 지킨 피해자와 연대자 이야기
세월호참사 10주기 위원회 기획, 박내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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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신입으로 입사한 지 막 두 달이 지나고 있는 시점이었고, 현장 지원을 위해 나가 있던 호텔의 회의실에서 누군가 ‘헉!’ 하며 큰 소리를 냈다. 그리고 한 켠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TV를 켰다. 화면 속에는 바다 한 가운데 선 배가 위태롭게 기울어 있었다. 배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전날 밤을 거의 뜬 눈으로 보낸 탓에 틈만 나면 화장실에 가서 5분씩 졸다 나오기 바빴고, 당장 내일부터 며칠간 이어질 행사를 준비한다고 선배들이 불러대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잠시 틈을 타 회의실에 들어왔더니 상석에 앉아 있던 팀장님이 말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 다 구조됐대!’ 잠이 부족해 해롱해롱한 데다 정신이 쏙 빠져 있는 상태였지만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사고 소식은 잠시 잊은 채 행사를 마쳤다.


구조되었다는 소식은 오보였다. 너무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팽목항’이라는 곳에 온갖 사람들이 몰려갔다. 피해자 가족들은 물론이고 실종자 수색을 위한 경찰과 잠수부에 소식을 전하기 위해 진을 친 미디어와 실제로 걱정을 하는 건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정치인들까지.


그러나 속 시원한 뉴스는 들려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무언가는 밝혀지겠지, 무언가는 해결되겠지, 라는 기대가 무색하게 10년을 내리 고착 상태에 있다. 10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세월호가 가라앉고 있을 때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시점에 자취를 감추었던 대통령이 탄핵된 이후 정권은 두 번이나 바뀌었다. 


“촛불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진상 규명은 여전히 지난했다. ‘매듭이 풀리려나 싶으면 다시 묶이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30쪽)


그러나 변한 건 없었고 정부와 사회의 안전 불감증으로 인한 참사는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10년 전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거다. 


“국가가 뭘 해준 건 없다고 생각해요. 보상도 저희가 노력해서 쟁취한 거죠. 이태원참사를 봐도 여전히 국가가 저희를 지켜준다, 보호해 준다, 그런 느낌은 없는 것 같아요.” (208쪽)


그렇기에 이 시점에 우리는 10년 전을 되돌아보며 지금 우리의 위치를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참사 10주기 위원회에서 기획하여 펴낸 <기억의 공간에서 너를 그린다>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왜 구하지 않았고 왜 침몰했는지를 알아야 책임자를 처벌하고 그 이후에 안전사회로 갈 수 있는 목표가 정해진다, 저는 처음부터 그렇게 확신했어요. 아무도 처벌을 안 받는데 어떻게 안전사회로 가겠어요.


10월 29일, 이태원참사 일어났을 때 제 느낌이 어땠는지 알아요? 똑같이 가겠다. 길게 끌면 안 된다, 빨리 끝내야 된다. 정부가 세월호 보고 학습한 거예요. 오송참사도 마찬가지고 이태원참사 일어났을 때 더 확고해졌는데 한계를 느끼니까…” (38쪽)


* * *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에는 “전국의 주요 기억장소, 기억공간을 찾아가 10년 동안 그곳을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자원봉사자, 안산에 있는 ‘기억과 약속의 길’을 지키는 걷고 지키는 사람들, 기억교실, 기억관을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10년 동안,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생각이 정리되어 있다. 


2부는 피해자들의 이야기이다. 벌써 20대 후반이 된 단원고의 생존자 학생들, 그리고 그 수가 충격적이었던 탓에 비교적 주목을 덜 받았던 일반인 생존자, 유가족 등 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너무 울어서 시력이 망가진 분도, 이가 다 무너져 내린 분도 있다(55쪽)는 말이 충격적이었다. 대체 얼마나 울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시력이 망가지고 이가 무너져 내렸을까. 


현재 우리는(대한민국 국민은) 탑다운top-down 방향으로는 사회가 바뀌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보텀업bottom-up으로 뜻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으면 의사 결정권자들은 대중의 의사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바로 어제 총선에서 모두가 직접 목도하지 않았나.


“이제 그만하라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났는데 점점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이래도 되는 건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났다고 없던 일처럼 여겨도 되는 건가 싶었어요.” (169쪽)


참사는 반복되지만 반복되는 만큼 충격에 대한 사람들의 역치는 낮아져 아무리 충격적인 사고 소식이라 해도 뇌리에서 잊히는 시간은 짧아진다.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사람이 일으킨 재난, 즉 인재는 절대 잊혀서는 안 된다.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2014년 4월은 커녕, 2022년 10월 29일도, 2023년 여름의 오송도 조금씩 잊고 있다. 가끔씩 ‘아, 그런 일이 있었지!’라며 떠올릴 뿐이다. 


“안전한 사회를 위한 약속에는 나와 사랑하는 내 가족의 안전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57쪽) 이 모든 아픔들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건 겪기 전에는 체감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아픔과 고통을 직접 겪음으로써 체감해서는 안 되지 않겠나.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나가는 발걸음에 흘깃 보며 ‘아직도 세월호야?’ ‘노란 리본 아직까지 붙이고 다녀?’ ‘이제 그만 좀 하지, 언제까지 시위할 건가.’라고 말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사를 공간화하고 형상화하는 것은 희생된 아이들의 비극과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아픔에 공감함으로써 공동체의 안전한 미래를 약속한다는 의미이다.”(57쪽) 잊지 않아야 반복하지 않는다.




* 하니포터8기 활동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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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육아 - 나를 덜어 나를 채우는 삶에 대하여
정지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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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게 된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네 살 전후의 아이들은 어떤 생활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부모들은 얼마나 힘들게 아이를 키우고 있을까, 어떤 감정을 느끼며 아이와 함께 살까, 이해해 보고 싶었다. 우리 집 윗집에 사는 가족이, 아이가, 부모가 어떤 생활을 하며 어떤 감정을 느낄지 이해해 보고 싶었다.


겨우 다소 진정된 층간 소음에 대한 불안이 다시 증폭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정지우 작가의 <그럼에도 육아>는 이보다 더 따뜻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으로 가득했고, 아이뿐만 아니라 성인도 삶을 살아감에 있어 염두에 두면 좋을 철학들을 아이를 통해 보여주고 설명하고 있어 꽤 감명 깊게 읽었다.



요즘 아이와 관련해 가장 많이 접하는 소식은 아마 ‘출생률’일 것이다. 이러다가 몇 년 후면 젊은 층이 노년층의 몇 퍼센트를 부양해야 하며, 또 몇 십 년이 지나면 우리나라는 소멸할 수도 있다는 등, 기록적으로 낮은 출생률로 인한 부정적 전망을 퍼 나르느라 바쁜 언론과 그것을 접하며 아이를 낳은 가족을 ‘애국자’라고 칭하는 사람들. 한 외신에서는 작금의 한국의 상황을 ‘페스트로 유럽이 싹쓸이 되던 시절보다 더 최악인 출생률을 보인다’라고까지 설명했으니, 사람들에게 현재 상황이 얼마나 자극적으로 충격적으로 다가올지는 뻔할 뻔자다. 게다가 올해 출생률은 0.7명이 깨질 수도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으니. 아무리 시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저출생의 심각성을 느낄 테다. 온갖 정책을 뿌리고 있다는 일본도 출생률이 1명이 넘는 상황에서 0.7명이 깨진다는 건 보통 일은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를 살리자고 아이를 낳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개인의 삶을 즐기기 위해 딩크족이 되기를 선택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회적,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한 해, 두 해 미루다가 시기를 놓치고 결국 낳기를 포기하는 가족도 많다. “우리 사회는 사실상 사회 시스템 전반이, ‘이래도 육아할 거야? 진짜 한다고? 좋아, 어디 할 수 있나 보자’ 같은 느낌으로 존재하고 있다.”(38쪽) 점점 피폐해지는 세상에 내가 과연 내 아이를 내보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아이 낳기를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내 친구 중 한 명이 그렇다. 나 살기에도 이렇게 벅차고 힘들고 빡빡한 세상, 앞으로 더 심해지리라는 걸 불 보듯 뻔한데 이런 세상에 나의 소중한 아이를 보내야 하는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에 관해 좋은 소리를 들은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사실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정지우 작가는 이 책 <그럼에도 육아>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고 몫이라고 하면서 아이가 있다는 것을 예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자신을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할 때 나는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56쪽)며 자신이 느끼는 행복을 오롯이 표현한다. 그것을 눈으로 읽는 것만으로도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가슴이 따뜻해진다. ‘아이’와 관련해 이런 감정을 느꼈던 게 얼마 만인가.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본문 일부를 덧붙인다.


가끔 아내와 투덜거리듯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고생하는 걸까”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존재를 사랑하는 일 그 자체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44쪽)


→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어떤 존재를 그저 사랑만 한다는 건 과연 뭘까. 어떤 느낌일까.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나.


삶은 이러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나 잘난 맛에, 나만의 성공에, 나만의 빛남에, 나만의 쾌락과 즐거움에 빠져들고, 오직 내가 주목받기 위해 온 인생 다 바쳐 그것만을 향유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그저 온전히 사랑하는 순간을 경험하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그 사랑을 위해 애쓰는 경험을, 논리나 다른 말로 더 이상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그 경험을 해보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그러고 나서 사랑할 만큼 사랑했다 싶으면 떠나보내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그렇게 살아내고, 사랑하고, 떠나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라는 걸 깨닫는 때가 있다. (46쪽)


→ 어, 심장이 갑자기 쿵 했다. 감동? 눈물이 날 것 같은? 비슷한 감정인데, 뭐지 이 느낌은. 갑자기 ‘세상에는 그래도 온기가 있다’는 그런 느낌?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몸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는 순간 같은.



행운이든 불운이든, 우연은 우리 삶에 ‘점’으로 찾아오는데 그 ‘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행복이나 불행의 ‘선’이 된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우리는 인생에서 만나는 점들을 엮어 자기 삶이라는 선, 이야기, 서사를 만들어낸다.

(…) 우리는 우리 인생에 쏟아지는 점들을 엮는 재봉사이자 이야기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68~69쪽)


→ 단지 육아와 관련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아이’라는 렌즈를 통해 삶 전체를 관망하고 그 과정에서 깨닫거나 느끼는 점도 함께 기술한다.


집 안이 텅 비어버린 듯 고요하고, 늘 정돈되어 있고, 활력보다는 평화가 어울리는 때가 오겠지만, 그 풍경은 벌써 다소 쓸쓸하게 느껴진다. 여기에는 매일의 애씀과 힘겨움이 있지만, 그만큼의 생명과 활기와 사랑이 있다.

(…) 삶이란 본디 부대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정이 있고, 애씀이 있고, 사랑이 있고, 보람이 있다. 그런 걸 하려고 사는 것이다. (72~73쪽)


→ 요즘 내가 집에서 느끼는 쓸쓸함이 표현된 것 같아 입이 쓰다. 아이가 있으면 집이 더 밝아지고 복작복작해지고 활기차고 재미있어질까? 지금 우리 집은 어쩐지 회색빛. 좀 더 밝아지는 것도 좋을 텐데.



아이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쉽게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존재다. 그냥 같이 누워서 떠오르는 대로 상상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는 좋아서 깔깔대며 계속 더 이야기해달라고 한다. 그래서 아이 역시 나를 세상에서 가장 쉽게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아이가 있어서 아내와 나는 하루에 수십 번, 수백 번을 너무 쉽게 웃는다. 우리는 이 시절이 너무 짧다는 것을 매번 의식하고, 그래서 자주 슬퍼진다. (19쪽)


→ 내게는 판타지 같은 그림. 자녀가 있는 부부가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장면. 그 순간을 보내면서도 이 순간을 그리워하게 될 미래를 그리면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해지는 한편 시간을 붙들어 놓고 싶은 마음에 더 안타까워지는 거겠지.



나는 교육에 대해 잘 모르지만, 아마 이렇게 다른 생물의 입장을 ‘상상’해보는 것도 하나의 교육일 거라 생각한다. 다른 생물의 입장을 상상하는 습관을 들이다 보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상상하는 데 익숙해질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상상하는 것이 곧 공감 능력이고, 사실 이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 생각한다. 아이랑 나는 매일 공감 능력을, 다른 존재의 입장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134쪽)


→ 꼭 육아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인생을 삶에 있어 모두가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은 포인트도 짚어 준다. 개인적으로 살아가면서 잊지 말고 지키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가 측은지심과 역지사지다. 어찌 보면 ‘공감’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어떤 생각을 할까, 왜 저런 감정을 느낄까, 왜 저렇게 반응할까 생각해 보며 상대방이 처한 입장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공감해 주는 것. 늘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시도가 조금만 늘어나도 우리 세상이 조금 더 느슨하고 편안해지지 않을까.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 일리치는 평생 모범생으로 살다가 승승장구하는 판사로 임용되었지만, 정작 죽음 앞에서 떠올리는 건 주위 사람들과 하던 ‘카드놀이’였다. 나머지는 다 가짜처럼만 느껴졌고, 유일하게 자신이 살아 있었다고 느끼게 한 것이 카드 게임하는 순간의 순수한 즐거움이었다. 승진하고, 집 평수를 늘리고, 사회적으로 인맥을 넓히는 것 같은 것들은 이상하게 모두 가짜 같았다고 말한다.

나는 죽기 전에 무엇을 떠올릴지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시간을 진짜로 사랑했는지, 어떤 시간을 가장 좋아했는지, 어떤 시간에 진심이었는지 떠올려본다. (160쪽)


→ 나는 과연 죽기 직전 어떤 장면을 떠올릴까. 떠올릴만한 장면이 있을까. 실제 죽음이 닥치기 전에는 모르겠지.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딱히 생각나는 장면이 없다. 나는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앞으로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



도망치면 돼, 다른 걸 선택하면 돼,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야, 라는 태도로 언제까지 살아가기보다는, 오늘의 선택은 번복할 수없이 몇 년 뒤의 삶이 되고 그렇게 삶이 쌓여간다는 걸 받아들일 때 어쩌면 ‘진짜 삶’이 시작된다는 걸 말이다. 매일의 선택을 책임지면서 감내하고자 할 때 삶의 완전히 다른 측면이 드러나고, 그것이 ‘진짜 삶’으로 가는 여정일지 모른다는 걸 말이다. (25쪽)


→ 그저 삶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매일에 대한 책임, 그 매일이 쌓여 결국 삶이 된다는 인지가 필요하다.



특히 ‘인간이라는 동물’이라는 장은 전체를 추천한다. 오늘날의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은 포기한 채 종 자체의 위대함, 고매함,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자부심에 취해 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한 마디로 오만이 넘친다. 작가 역시 “오히려 인간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아 보이는 순간은 덜 동물다울 때인 것 같기도 하다”(84쪽)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특히 아이가 태어나면서는 내가 그저 한 마리의 동물일 뿐이라는 걸 더 가깝게 느끼는 것 같다. 아이랑 헐벗고 깔깔대고, 땅 파고, 수풀 사이를 헤집고, 춤추고, 뛰어놀고, 맛있는 걸 집어먹고, 나눠 먹고, 햇빛 아래에서 종일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가 나라는 존재의 본질에 더 다가간 느낌을 받곤 한다. (…) 나는 사랑하려고 태어난 것이다.”(85쪽)



우리 사회에는 사랑이 부족하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부족하다. 생명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 황폐하고 차가운 세상에서 다시금 온기를 느껴 보고 싶다면, 아이를 키우는 삶에 어떤 행복이 있는지 궁금하다면, 사랑과 행복이 있는 인생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읽어 봐도 좋을 듯하다. “삶에서 가장 그리울 시절을 보내고 있을 당신께, 이 책을 전한다.”(11쪽)



* 하니포터8기 활동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가끔 아내와 투덜거리듯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고생하는 걸까"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존재를 사랑하는 일 그 자체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 P44

삶은 이러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나 잘난 맛에, 나만의 성공에, 나만의 빛남에, 나만의 쾌락과 즐거움에 빠져들고, 오직 내가 주목받기 위해 온 인생 다 바쳐 그것만을 향유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그저 온전히 사랑하는 순간을 경험하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그 사랑을 위해 애쓰는 경험을, 논리나 다른 말로 더 이상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그 경험을 해보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그러고 나서 사랑할 만큼 사랑했다 싶으면 떠나보내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그렇게 살아내고, 사랑하고, 떠나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라는 걸 깨닫는 때가 있다. - P46

집 안이 텅 비어버린 듯 고요하고, 늘 정돈되어 있고, 활력보다는 평화가 어울리는 때가 오겠지만, 그 풍경은 벌써 다소 쓸쓸하게 느껴진다. 여기에는 매일의 애씀과 힘겨움이 있지만, 그만큼의 생명과 활기와 사랑이 있다.
(…) 삶이란 본디 부대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정이 있고, 애씀이 있고, 사랑이 있고, 보람이 있다. 그런 걸 하려고 사는 것이다. - P72

아이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쉽게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존재다. 그냥 같이 누워서 떠오르는 대로 상상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이는 좋아서 깔깔대며 계속 더 이야기해달라고 한다. 그래서 아이 역시 나를 세상에서 가장 쉽게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아이가 있어서 아내와 나는 하루에 수십 번, 수백 번을 너무 쉽게 웃는다. 우리는 이 시절이 너무 짧다는 것을 매번 의식하고, 그래서 자주 슬퍼진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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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도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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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멍.


읽는 내내, 읽고 난 뒤 계속해서 머리에 맴도는 단어이자 이미지였다.

시커멓고 커다랗지만 또 그렇게 커다랗지는 않아 메울 수 있을 것 같아도 결코 메워지지 않는 구멍.

즉, 공허.


무언가를 끊임없이 좇았던 원도.

한 번도 충만한 적 없었고

늘 박탈당해 있었고

또 그렇다고 생각했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대상으로 박탈했던 인간

고독하고 늘 혼자였던, 스스로가 스스로를 혼자라는 공간에 처하게 했던 인간.



원도는 “죽고 싶지 않았다.”(81쪽) ‘왜 죽지 않았는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죽음에 관해 생각했지만, 정작 원도는 살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거 궁금했을 뿐이다. 나는 왜 지금 피를 토하며 이 추운 여관방 바닥에 쓰러져 덜덜 떨고 있는 인간이 된 걸까. 어디에서 시작된 걸까. 누가 시작한 걸까. 왜, 나는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삶을 중단하지 않았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날것의 말들에 읽기 힘들었고 괴로웠다. 적나라하게 처참한 원도의 생각과 생각을 듣고 있노라면 나까지 휘말려 들어가 같은 것을 느끼게 될 것 같았다.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작가님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쓰는 동안은 힘들지 않았다.

소설이 내게 복수하듯 글을 끝내자마자 힘들어졌다.

(…) 마지막 글자에서 눈을 떼자마자 너무 무섭고 외로워서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초판 작가의 말, 242쪽)


작가님이 정말 어떤 상태에서 어떤 심정으로 이 소설을 썼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뭔가 쏟아내듯이, 뱉어내듯이, 토하듯이 쓴 듯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 문장 한 문장,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전혀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원도를 나열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가’라는 문장은 ‘이렇게 계속 사랑해도 되는가’라는 문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핍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넘쳐흘렀다. 언제나 흐르고 있었다. 이 소설은 어쩌면 흐르는 그것을 잠시라도 막아서 내 안에 가두어보자는 안간힘이었는지도. 이 소설을 들여다보며 다시금 깨달았다. 그때 원도의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다음 질문으로 건너갈 수 있었음음.” (새로 쓴 작가의 말, 247쪽)


결국을 들여다 보아야만 하는 구멍이었던 것이다. 내가 구멍과 그 안을 들여다보며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야 그 구멍도 나를 보고 죽이 되는 밥이 되든 아무말이 되었든 어떤 답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원도는 용감한 인간이었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공허와 마주했고 끊임없이 물었고 끊임없이 답을 구했다. 답을 얻지는 못했을지라도 결국 그는 결심을 했다. “나 혼자“(241쪽)지만 방으로 들어가기로. 다시 죽지 않기로.


요즘 편한 글만 읽다가 오랜만에 꽤 자극을 받았다. 이제 <구의 증명>을 읽어야겠다.




* 하니포터8기 활동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과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같은 무게로 시소의 양 끝에 앉아 있고, 원도는 어느 쪽으로 몸을 기울일지 선택하지 못한 채 그 중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생각은 무게가 없다. 유령처럼 존재하는 그것은 유령처럼 사람을 홀린다.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들릴 듯 들리지 않는 숨소리,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림자, 잡아먹었는데날뛰고엄마가쿨럭쿨럭심장도불쌍한비명이때리면서사악한폭발해버렸지태양을새하얀어둠과차가운눈물처럼, 규칙도 의미도 경계도 없는 요설로 존재를 지배한다. 시소는 기울지 않을 것이다. 사진에 박힌 풍경처럼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변치않는 그것이 그곳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원도는 자유로울 수 없다. 기울지 않은 시소를 보며 기울었다고 믿는 순간, 원도의 몸도 한쪽으로 기울고 동시에 버튼은 눌릴 것이며, 순식간에 원도는 달리는 덤프트럭으로 뛰어들 수도 있다.
- P42

그런 생각을 하며 원도는 억울함과 죄책감과 서러움이 뒤범벅된 감정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 P63

그런 식으로, 어른이 될수록, 원도는 조각조각 나뉘었다. 알뜰한, 게으른, 조용한, 성실한, 똑똑한, 무식한, 사려 깊은, 부지런한, 친절한, 둔한, 멍청한, 술을 잘 마시는, 술을 못 마시는, 거만한, 수줍은, 신경질적인, 냉정한, 용감한, 무책임한, 충동적인, 겸손한, 밝히는, 예민한, 수다스러운, 건강한, 허약한, 미숙한, 가식적인, 명석한, 우유부단한, 욕심 많은, 과감한, 집착하는, 음흉한, 단순한, 비겁한, 소심한, 정직한, 이타적인, 이기적인 원도.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원도만 봤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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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시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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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괴로운 일이다.


비단 해외에 나가 다양한 색의 피부로 가득한 사람들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아시아인과 같은 상황도 참 낯설고 어렵겠지만, 그저 한 번도 방문해 본 적 없는 우리나라 시골 마을에 도착해 삼삼오오 오며 있는 아이들이나 어르신들 사이에서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해 방황하는 상황 역시 참 낯설고 어렵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홀로 동떨어져 있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한다. 그런 인간일진대, 자의적으로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외로 삶의 터전을 아예 옮기는 이들이다.




서수진 작가의 소설집 <골드러시>는 그곳에 섞이지 못하지만 섞이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고군분투하는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표제작 <골드러시>는 황금빛 미래만을 바라보며 현재를 희생하고 참고 견디는 이들의 이야기다. 꿈을 갖고 고향을 떠나 새로운 터전에 자리를 잡는 모든 사람이 감내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사는 방식이기도 하고. 그와 그녀는 무엇을 좇았던 걸까. 우리는 무엇을 좇고 있는 걸까.


“그는 온통 붉기만 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83쪽)




이민 2세 자녀를 둔 부모의 모습이 그려진 <졸업여행>은 읽고 나니 마음 한편이 싸르르 했다. 해외에서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모든 걸 희생하며 공부 뒷바라지를 하는 부모님들은 어떤 마음으로 자식을 키우고 있는 걸까. 그 자식이 인생의 전부가 되겠지. 그 자식이 그들 이민의 결과물이 되겠지. 그런 자식이 내가 모르는 모습을 하고 낯선 행동을 하고 있을 때의 당혹감, 낙담,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다.


미군 남자친구를 만나러 미국 공항에 내려 입국심사를 받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그려지는 <입국심사>.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의 사랑을 부정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응당 꿈꾸는 미래를 내 입으로 부정하고 티끌 같은 그러나 타지인들에게는 그보다 무서울 수 없는 공권력을 쥔 월급쟁이들에게 박탈당한 채, 아마도 ‘부정’의 대답을 들었을 직원의 미소와 함께 주인공은 보이지는 않지만 허락이 없다면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을 통과해 드디어 남의 나라에 들어선다. 그 순간 주인공은 무엇을 느꼈을까? 안도? 참담함? 비참함?


호주 이민 2세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는 <한국인의 밤>. 


“그는 클로이가 교포처럼 보인다고 했다. 화장이나 옷차림 때문이 아니라 얼굴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했다. 그 미묘함이 너무나 분명해서 한국에 간다면 모두 그녀가 교포임을 알아볼 거라고, 그런 얼굴이 너무 매력적이라고 했다.” (156쪽)


양쪽 모두에서 다름을 보는 그 ‘이국적’인 얼굴에서 매력을 느낀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두 사회 모두에서 수용되지 못하고 경계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자라는 이민 2세들의 삶이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는 것이겠지.


관계의 정당함을 인정받기 위해 호주로 떠난 두 여자의 이야기 <외출금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랐다. 그저 외면당하지 않고 미움받지 않고 배제되지 않기를 바랐다.” (189쪽)


어쩌면 디아스포라와 퀴어 모두 느낄 법한 감정.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그저 받아 들여지길, 미움받지 않길, 경계 밖으로 떠밀려 내보내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




가끔 우리는 일부러 이방인이 되기 위해,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환경을 벗어나 낯섦을 느끼기 위해 살던 곳을 떠나 떠돌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낯선 동네에 도착하여 ‘수용’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고 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 거부된다는 것, 낯선 눈길로 경계심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아진다는 것은 꽤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개인적으로도 두 차례의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고 그곳에서 이런 저런 상황들을 보고 겪었던 지라 깊게 공감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특히 소위 선진한 서구 국가로 떠난 한국인들은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국민 혹은 타 인종에 대해 지니고 있던 편견이나 무시를 거침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워홀 온 학생에게 최저 시급도 주지 않으며 일을 시킨다거나(<한국인의 밤>) 중국인을 무시하는 등(<헬로 차이나>) 말이다. 


여러모로 목 뒤가 씁쓸한 소설들이었다. 술술 읽히지만 책을 덮고 나면 가슴 한편이 묵직해지는 소설집.


* 하니포터8기 활동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그는 온통 붉기만 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 P83

그는 클로이가 교포처럼 보인다고 했다. 화장이나 옷차림 때문이 아니라 얼굴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했다. 그 미묘함이 너무나 분명해서 한국에 간다면 모두 그녀가 교포임을 알아볼 거라고, 그런 얼굴이 너무 매력적이라고 했다. - P156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랐다. 그저 외면당하지 않고 미움받지 않고 배제되지 않기를 바랐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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