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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의
랜디 포시.제프리 재슬로 지음, 심은우 옮김 / 살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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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준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준 책이었습니다.남겨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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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숫가락 > 플라톤의 현실인식
국가론 박영신서 3
플라톤 지음, 이병길 옮김 / 박영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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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가장 오래된 유토피아 사상이라고 말한다. 유토피아라고 하는 것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유토피아라는 개념이 있고 그것을 꿈꾼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실과의 연장선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유토피아는 어떤 기준이 될 수 있고 그것을 꿈꾸는 것으로서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나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현실과 유리되어 뜬 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플라톤의 이론이 현실에 충분히 적용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학교를 졸업하면 실업은 따놓은 당상일텐데도 영어공부나 자격증을 따는 데 소홀하고 철학책이나 읽고 있는 내게 사람들은 미쳤단다. 현.실.적.이지 못하단다. 현실은 그렇게 만만한게 아니란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에 의하면 영혼이란 타락한 현실을 자신의 고향으로 되찾는 험난한 인식의 길을 걷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취직시험공부를 등한시하면서 가끔 겁이 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취직준비를 게을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다. 내가 공부를 하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들이 관료제나 기업조직에서 원하는 것과 어긋나기 때문에 그러한 조직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싶다는 것이다.

아르바이트 하나를 해도 CCTV라는 감시기제는 나를 길들이고, 취업을 한 사람들은 회사의 유연함과 자본의 철저함에 울상을 한다. 자신의 실적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영업을 뛰는 선배는 저녁이 되면 전국에 있는 지사 가운데에서 자신의 실적이 어느 정도가 되는지 핸드폰으로 주욱 전송이 되어 온다는데, 더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본이 짜놓은 판에서 나올 수는 없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경제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거꾸로 경제활동을 하고 자본 축적을 하기 위해 살고 있는 것만 같다. 이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서 목적없는 인생을 사는 것을 우리는 소외라고 한다.

나.답.게.산.다.는 것은 험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얽매여 취직시험공부에 열을 올리고 모든 일들을 덮어버리고 사회에 편입되기에는 껄끄러운 것들이 너무 많다. 플라톤이 생성, 소멸하지 않는 이데아를 설정하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이야기했던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열등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믿듯이 현실이라고 지칭되는 것의 밖에서 막연한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이 플라톤 철학의 최종적 목표도 아니다. 그리고 그는 사물에게 허위가능한 의견을, 형상에 허위불가능한 인식을 대응시키지도 않았다. 그의 인식론의 근본과제는 오히려 세계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는 길을 비판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쇠퇴해가는 아테네에 있어서 선구적 역할을 해야 할 사람으로 규정하고 사상을 전개했듯이 플라톤의 사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 현재 거세게 제기되고 있는 것은 형이상학의 폐기를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이 현실에 맞게 재구성되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물론 이것은 철학적으로 매우 옳지 못한 태도이다.

철학을 나의 구미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물론 잘못된 것이다. 내가 자신을 멋대로 해석하는 것을 물론 플라톤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플라톤에게서 착취하고 싶은 것은 내가 꿈꾸는 것이 헛된 망상이 아니라 현실을 가장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하나의 시도라는 믿음이다. 나는 그 움직임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굳어있던 것들이 하나씩 녹아내려 내 나름대로의 흐름이 되어간다고 믿는다. 다시는 원래처럼 굳을 수는 없을 것이다. 플라톤의 현실인식과 이데아는 현실을 바꾸어야 할 일종의 당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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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김철권 > '正義'에 관하여
국가론 박영신서 3
플라톤 지음, 이병길 옮김 / 박영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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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에 관하여'라는 副題가 붙어있는 '국가론'에서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는 이 책에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있는데 그 방법적인 면에 있어서도 그의 스승이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했던 산파술을 취한다. 그는 '정의'라는 개념을 가지고 그의 철학적 사고를 펼쳐나간다. 그것은 그가 꿈꾸는 理想社會로의 移行을 간절히 바라는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神的인 완전함을 말하려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제 각각 정의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 중 하나의 例를 들면, ‘트라시마코스’는 완벽한 不正을 정의롭다고 말한다. 그는 그 시대 사람들이 利益을 위해서 몸이 가르키는 대로 사는 모습을 代辯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소크라테스(플라톤)에 의해서 반박된다. 그러나 그는 이 책에서 정의를 한마디로 못박아 말하고 있지 않다. 플라톤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정의를 말하기 위해서 '동굴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기에 이른다. 어두운 동굴 안에는 인간이란 존재가 살고 있다. 그들은 기둥에 부자유스럽게 묶여있어 그들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동굴의 벽면에 비치는 그림자 뿐이다.

그들의 뒤에 眞理가 있어도 그들은 진리의 實體를 보지 못하고 진리의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靈魂과 肉體로 구분되는데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그 그림자를 진리로 認識하고 그것에 그치는데 불과하지만 영혼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이데아(동굴밖에 존재하는 빛)-진정한 실체-를 바라보려 한다. 그는 인간의 정의를 직접 설명하는 것을 국가의 정의를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국가에는 통치자, 군인, 농민(피지배자)이 존재하는 데 국가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각각의 계층이 자신의 위치에 맞는 德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덕이란 '탁월함'을 意味한다. 탁월하다는 의미는 구두공이 구두를 가장 잘 만드는 것을 의미하고 악기가 제기능을 다하여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그는 국가론을 통하여 哲人왕을 교육시키는 방법을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을 두고 플라톤이 정치적 야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設도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그가 이루지 못한 정치적 야심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가 통치자, 군인, 농민 등을 통해서 각각의 탁월함을 덕이라고 보고 그의 正義論을 펼쳤던 것을 주시해야 한다.

플라톤이 말했던 이러한 계층적 분류법은 후에 많은 批判을 받게된다. K.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敵들'이란 저서에서 플라톤을 '열린사회의 적'이라고까지 빗대어 표현한다. 사실 그의 이데아 철학은 理想的 性向을 짙게 띄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이러한 정의에 관한 생각은 이후의 哲學史에 있어서 커다란 의미를 남기고 특히 그의 이데아 철학은 지금까지 기능적이었든지 갈등적이었든지 어떠한 형태로든 철학의 내용이 되어왔다는 것은 否認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한 사실이 플라톤을 '철학의 아버지'라고 칭송하며 부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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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장명진 > 현 時帶의 國家여!너희의 정신은 플라톤이리라
플라톤의 국가론
플라톤 지음, 최현 옮김 / 집문당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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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그 자신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를 내려야 되는가?이 책을 읽고 난뒤 나의 뇌리속에 자리잡은것은 '플라톤'이라는 인간 자신의 평가이다.'國家論'! 그가 내리는 국가의 실체를 우리는 받아들여야 되는가도 우리는 한번 되짚고 넘어 가야 될것이다.그렇다.거두절미하여 결론을 내리자면 위대한 철학자임에는 틀림없다.이기와 부패속에 허덕이는 현 나라를 볼때면 안타까움마저 들기도 한다.

플라톤은 젊을 때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우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소크라테스의 연장이며 발전으로서, 그의 저서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된 변증론에 의한 {대화편}이어서 그와 스승과의 학설을 구별하기 힘들다. 스승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정의를 가르치기로 결심, 동료들과 메가라에 도피하여 있다가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키레네학파로부터 이데아와 변증법의 기초를 얻고 피타고라스학파에 접하여 실천적 정신과 실생활에의 흥미를 얻은 뒤 그의 독자적인 사상을 반성하게 되었다.

이상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본성이 교육을 받았을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상태와 견주어 생각해 보게. 즉 동굴과 같은 지하의 거처에 사람들이 있다고 치세. 그 동굴 은 태양의; 빛을 향해 열려 있는 길다란 입구를 가지고 있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손발과 목까지도 묶여 있네. 그 때문에 그들은 같은 곳에 머물면서 앞만 내다볼 수밖에 없네. 목이 묶여 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또 이런 것을 상상해 보게. 불빛이 그들의 등 뒤 높고 먼 곳에서 비추고 있네. 그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뒤쪽에 하나의 길이 있고, 이 길에 이어 벽이 있다고 치 세. 벽은 마치 인형극을 조정하는 사람이 자기 앞에 올려놓은 대와 같이 쌓여 있네.' 라고 말한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설명하고 있다. 동굴 속에 갇힌 죄수들은 그림자를 실재 존재하는 형상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의 '김일성 주체사상'이 위의 현상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 다. 플라톤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idea가 있다고 보았으며, 이것은 현실계 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초월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일반 서민들의 신분 상승에는 기회를 주지 않고, 통치 계급의 통치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수직적 신분 이동이 불가능 한 사회에서는 개인의 능력이 자유롭게 발휘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분의 이동이 자유로운 상태를 전제로 한 사회에서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바 일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플라톤의 정의에 대한 관념은 우리들의 일반적 관념과는 다르다. 플라톤은 계급 특권을 정의라 부르는 반면, 우리는 보통 그런 특권이 없는 것을 정의라 부른다. 우리는 정의를 개인을 취급할 때의 어떤 종류의 평등을 의미하는 반면, 그는 정의를 개인들 사이의 관계로써가 아니라 계급 사이의 관계에 근거한 전체국가의 한 성질로 간주한다. 즉, 지배자는 지배하고, 노동자는 노동하고, 노예가 노예일 수 있다면 국가는 정의로운 것이다.

그는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욕의 부분이 농·공·상업의 서민, 기개 부분은 군인·관리, 이성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는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유명한 철인정치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 있다. 이어 통치자의 사유재산 금지, 처자의 공유 등을 주장하고 전제정치·과두정치·민주정치 등 정체의 성립과 발전·결함 등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주목할 만한 탁견이 담겨 있다. 그의 철학은 서양 관념론적 이상론의 비조로, 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와 함께 철학사에서 쌍벽을 이루고, 아카데미아학파 신플라톤주의를 거쳐 철학사에 결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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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ylie > 플라톤, 그 환상을 깨다
플라톤의 국가론
플라톤 지음, 최현 옮김 / 집문당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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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도로서 플라톤의 국가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더불어 양대 필독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그 위대한 저서를 직접 접한다는 것에 벅찬 감동을 느꼈고 커다란 자부심을 가졌었다, 물론 다 읽기 전까지는. 플라톤이 희곡을 즐겨 썼다는 것과 문학을 통한 사상 피력이 지적 전통임을 몰랐던 이 무식함 때문에 마치 희곡처럼 대화와 독백이 있는 본문은 시작부터 어리둥절케 했다. 더욱이 정작 지은이 플라톤은 등장하지 않고 그 스승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형제들이 나오는 것에도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황당함의 극치는 바로 내용에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제껏 생각하고 존경해 오던 플라톤의 이상국가에 대한 환상이 와르르 무너졌다는 것이다.


칼 포퍼가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밝힌 것처럼 플라톤은 전체주의의 온상이었다. 히틀러가 미친 살인마였다면 플라톤은 도도하고 오만한 관리자였다. 당시의 지적 수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만 확신에 찬 플라톤의 열정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계획된 박제된 사회를 건설하는 것에 있다. 그가 유전자를 몰라서 다행이지 만약 알고 이를 자신의 수단으로 이용했다면 영화 “가타카”의 비극은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소질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분명 옳은 일이다. 허나 그것이 강제된다면 어떻게 될까? 요컨대 소질이 먼저냐 적성이 먼저냐는 것이다. 보통 둘은 일치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이며 인간의 유전적 우열의 차이는 거의 없다는 과학적 보고를 보아도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적성이다. 특히 한 때 머리가 좋으면 ‘사’자로 끝나는 직업을 시켜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틀어박힌 우리 교육계의 어두웠던(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있는) 시절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운명 속에서 낙오된 수많은 인재들을 생각한다면 해답은 뻔하다. 적성, 자신의 선택이 최우선이다. 플라톤의 말처럼 선택의 기회가 자율이 아닌 어린 시절 한때의 기록으로 못 박힌다면 그것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뜻은 있으나 충분한 기회를 잡지 못하고 경쟁에서 밀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거나 차선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 어떤 분야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내었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길이 무엇인지 모색할 틈도 없이 정해진 운명을 단순히 국가의 공통된 이익을 위해서란 이름아래 따라야 한다면 그것은 기계의 부속품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가 살았던 시대는 기원전 400년경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400전이라 할 수 있다. 제 아무리 대 지성이라 할 수 있는 플라톤이라 할지라도 인류의 축적된 지혜를 이길 수는 없다. 사고의 틀 자체가 엄청나게 틀리고 그 사회 환경이 우리와 몹시 다르다. 여기서 스승을 잃고 정의를 부르짖었던 한 열정의 사내를 우린 발견할 수 있고 그의 사상적 개연성을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육이나 공상과학 영화에서 보여주는 우리의 미래는 어떠한가? 서양 지성사는 단순히 플라톤의 찬성과 반대에 지나지 않았다는 어느 학자의 말처럼 우린 아직도 플라톤의 실험실에서 탈출하지 못한 것 같다. 오히려 더욱 발전된 과학기술과 무한 경쟁시대에 발맞춰 더욱 섬뜩한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우울한 상상은 떨쳐버리고 명심해야 할 것은 제 아무리 효율성이 중요하더라도 우리는 가치 있는 인간이며 그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 원칙은 자유선택이라는 것이다. 물론 살아가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길을 가야할 때가 있고 때론 꿈을 잠시 접어야 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홍세화님의 말을 빌리자면 “생존이 자아실현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때는 반드시 온다. 그러나 양보는 있을지언정 포기란 없다. 잠시 양보하였다가 훗날 다시 자아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다. 자유선택의 대 원칙 아래 사회적으로 가능한 한 최대한의 균등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플라톤이 진정 원했던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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