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의 일기 - 완전판 문학사상 세계문학
안네 프랑크 지음, 홍경호 옮김 / 문학사상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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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6월 12일부터 1944년 8월 1일까지 키티라는 가상의 인물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식으로 가장 내밀한 고백을 적어간 이 일기에서 우리는 한 주체의 자기의식의 획득과정을 확인하게 된다. 우선, 이 책의 번역자나 문정희 시인이 말하는 전쟁문학, 고발문학, 페미니스트문학 등과 같은 규정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피상적이어서 우리에게 어떤 인식의 생산도 가능하게 하는 것 같지 않다. 즉, 이런 규정은 하나마나한 규정인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이 일기가 널리 읽힌다는 그 보편성을 우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과연 14~15세 소녀가 페터와의 사랑과 성, 섹스 등에 대한 고민과 그에 대해 기성질서를 대변하는 부모와의 갈등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을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간단하게 규정할 수 있는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오히려 왜 안나가 그런 고민을 시작했고, 그것을 기록에 남겼는지를 이해해보려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문제를 던졌을 때, 이 일기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차라리 개인과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은신처에서 있는 동안의 그 불가피한 가족공동체가 그야말로 안나가 유일하게 경험하고 체험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에 따를 경우, 인륜적 세계는 개인이 사회로부터의 자립성을 획득하기 전의 역사이다. 즉, 이 때 개인은 자신의 외적인 실체로서 사회에 대한 자립성을 획득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내적인 의식과 외적인 실재 -대개 의무와 강제의 형태로 현상한다- 가 대립하는 것이 아닌 분리이전의 융합되어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좀 길지만, 잠깐 헤겔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의식과의 연관 속에서 자기의식이 상대방과의 통일을 의식하는 가운데 이렇듯 맞서 있는 대상적 실재와의 통일 속에서 비로소 자기의식일 수가 있게 된다. 이러한 인륜적 실체를 추상적이고 보편적으로 나타낸 것이 사유의 산물인 법률이다. 그러나 또한 인륜적 실체는 직접 현실을 살아가는 자기의식 속에도 스며들어 있으니, 이것이 관습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반대로 개인의 의식이 인륜세계에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있는 보편적인 의식이 자기의 것임을 자각하는 가운데 개인의 행위나 생활이 보편적인 관습을 벗어나지 않아야만 한다."([정신현상학1], 한길사, 2005, p.370~371) "선한 것,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을 이 세상에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1944년 3월 7일 편지, 290쪽)라고 말하는 안네에게 독일의 헤겔을 들이미는 것은 안네 일가의 은신처의 회전 책장이 독일인에 의해 열리는 것과 비슷할지 모르니 더 이상은 삼가하도록 하자.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인륜적 세계에서 주체는 관습이라 불리는 보편적 의식과 하나가 되어야(통일되어야) 비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구분'이 부재하는 세계다. 자기의식과 타자(의식)의 구분, 적과 아군의 구분, (잠정적이지만)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구분(참고로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유대인을 부정적 원리로서 반(反)종족이라고 했다.)이 부재하는 세계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안네가 끊임없이 토로하는 엄마와의 문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확인되는 아버지와의 거리감 등 부모와 안네와의 구분이 부재한 세계인 셈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안네는 더 이상 쓸 수 없었던 마지막 편지(1944년 8월 1일,445~447쪽)에서 자신의 '이중적 성격'에 대해 말하면서 내면적 자아와 외적 자아의 구분을 하고 있는 자기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주체의 자기반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데, 안나는 일기 곳곳에 자신은 자신의 감정과 행위, 표현 등에 대해 누구보다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회학자 Mead라면 이를 'I'와 'me', '일반화된 타자' 등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기의식은 자기반성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인데,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주체로서의 자신과 타자의 구별이 필요하며, 따라서 자기의식은 타자의 의식이 된다. 위의 헤겔의 인용을 참고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자기와 타자를 분리/구별할 수 있을 때, 인륜적 세계가 해체되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안나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면서 성장해가는 과정은 결국 자신의 외적인 실체로서 가족이라는 인륜적 공동체, 그 인륜적 질서를 담보하는 관습법적 '가족법률'과 대립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주체로서의 자기의식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더구나 일기에서는 "신기하게도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의견을 가질 수 없다는 원칙만큼은 언제나 철저하게 지켜집니다."(1944년 3월14일, 298쪽)와 같은 관습적인 가족법률이 작동하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화의 원리'라고도 불릴 수 있는 근대의 사회구성원리가 이 강고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외적인!' 사회에서도 어김없이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볼 때, 유명한 첫 날의 일기(1942년 6월 12일, 25쪽)인 "당신에게라면 내 마음속의 비밀들을 모두 다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제발 내 마음의 지주가 되어 나를 격려해 주세요."라는 일기는 아직 구분이 부재한 세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은)'예외적이지 않은!' 사회에 속한 안나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징후적이다. 이는 이른바 주체화의 원리가 예외적인 상황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의 자기의식을 인식하고, 획득하게 되는 어떤 징표같은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일기의 현재성을 설명하는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이 일기를 가령 페미니즘 문학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문학이라는 규정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그에 앞서서 이러한 '내적 규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같다. 왜냐하면 페미니즘 문학이니, 전쟁문학이니 하는 것은 안나의 자기의식과는 별개인 사후적인 '외적 규정'이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이 일기가 '성장소설'과 무엇이 다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글쎄, 여기서 다시 또 한번 독일인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말한 '아름다운 영혼'을 이야기하면서 회전 책장을 헤겔과 괴테를 위시한 독일 책들로 채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괴테의 경우에 개인의 발전과 성숙이 내적이고 정신적인 고양이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체험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아무튼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안나의 마지막 일기가 자신의 성격의 이중성에 대한 자기의식을 보여주고 있고, 더구나 마지막 문장이 "내가 원하는 그런 인간은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지. 하지만 꼭 그렇게 되겠어요. 만약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면요."(447쪽.)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나의 고유한 자기의식을 소유한 개별성(외적 규정에 의한 특수성이 아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이라는 특수한 규정의 강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안나가, '발각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륜적 세계'로서의 가족공동체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안나가 자기의식을 발견하고, 발전시켜나간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하고,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개별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 "인간의 정신은 위대하지만, 그 행위는 얼마나 하찮은가!" "Der Mann hat einen grossen Geist und ist so klein von Taten!"(1943년 11월 17일, 212쪽)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14살의 지적능력과 이와 같은 '예외상황'에서도 가능'하게 했던' 공부목록(1944년 5월 16일, 399쪽)을 보면, 오늘날 우리의 사회와 안네의 사회 간의 간극과 거리를 '위계적'으로 구분!하게 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자격지심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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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 고통의 해석학 살림지식총서 290
이종하 지음 / 살림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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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하 선생의 이 책은 간략한 아도르노의 연대기를 '음악적 삶과 국외자의 삶'으로 정리하고, 곧바로 '고통의 해석학'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아도르노의 주요 저작인 [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 [미학이론]에서의 연관부분을 중심으로 인용하고, 설명하고 있다. 우선 저자에게 두가지 점에서 감사를 표시해야할 것 같은데, 저자는 이 세 저작을 모두 번역본에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저자는 이 작은 책자에서 아도르노의 논의를 자연지배에 따른 계몽과 신화의 변증법의 문제설정에 따라 차분히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아도르노의 사유는 그의 문체와 더불어 따라잡기 힘들다. 아마도 헤겔에 대한 공부가 어느정도 되어 있다면, 또는 음악(특히 말러나 쇤베르크)에 대한 어느정도의 이해가 선행되어 있다면, 우리는 아도르노의 논의를 이 끈을 잡고 (아도르노와 이 책의 용법을 빌리면) '체계화하지 않은 방식으로', 또는 '비동일자적인 방식으로' 따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형식으로든 아도르노를 이 작은 책자 안에 정리해야했을 저자의 곤란함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잠깐 아도르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철학은 어떤 범주들로 요약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를 구성해가야만 할 것이다. ... 철학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정적이다. 또 연역적인 것이든 귀납적인 것이든 어떤 직선적인 사고과정이 아니라 사고의 짜임(Geweben)이 결정적이다. 따라서 철학은 본질적으로 짤막하게 논평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철학은 불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철학이 대개 짤막하게 논평된다는 사실은 그 철학에 불리한 일이다."([부정변증법], 국역, p.91.)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아도르노의 철학을 불리하지 않게 어떻게 짤막하게 논평하고 있는지 염두에 둘 수 있다. 결국 저자는 위에서 언급한 아도르노의 주요 3저작의 문제의식을 '자연지배'의 문제와 그에 필연적으로 수반된 고통(저자는 특히 내적 자연의 고통을 중심으로 그러한 고통의 사회적 형식(본책 p.31~40)에 주목하고 있다.)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는 셈이다. 자기보존을 위한 외적자연에의 공포를 인간이 이성의 도구적 전유를 통해 자연지배에 도달하고 -저자는 이를 지배의 형식을 문제삼는 사회철학적 관점이라기 보다는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 이것이 '신화-계몽'(또는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본책, p.22)의 역사적 내용이다. 그러나 문제는 "계몽은 신화로 다시 되돌아간다"라는 순환적 테제이다. 이 때, 인간의 의식과 심리로서 내적자연의 지배를 강제하는 사회적 형식이 결국 도구적 이성에 따른 목적-수단의 전도의 결과로 가능한 사회적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는 자연지배의 변증법의 문제가 된다. 이를 '신화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p.54) 저자는 주요 3부작을 거의 출판연도 순으로 정리하는 면밀함을 보이는데,-[계몽의 변증법], [부정변증법], [미학이론]의 순서- 그렇게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핵심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구도'(constellation)와 '미메시스'(mimesis) 개념과 마주하게 된다. 이 개념들에 대해서는 여기서 상술하기 보다는 이 책의 [비동일성과 부정변증법](p.65~68)과 예술의 자율성을 '창문없는 모나드'로 정리하고 있는 부분(p.72), 그리고 예술과 관련하여 그리고 체계화하는 개념, 인식주관(인식대상이 아닌)의 지배계기와 대립하는 이른바 '고통과의 화해'의 계기를 담보하는 예술에서의 미메시스 문제를 다루고 있는 부분(p.73~80)을 보다 주의해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잠깐만 덧붙이자면, 저자가 구도라고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는([부정변증법]의 국역자인 홍승용 선생은 이를 '짜임관계'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 밖에도 이 용어는 본래적 의미인 '성좌'로도 번역되고 있다.) Konstellation 의 경우 어떤 '짜임'(Gewebe)인데, 이를 아도르노는 "대상이 처해 있는 짜임관계 속에서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이 자체 내에 저장하고 있는 과정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다. ... 마치 잘 보관된 금고의 자물쇠들처럼 그 개념이 열리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 때 그 열림은 하나의 개별적인 열쇠나 번호가 아니라 어떤 번호들의 배열에 의해 이루어진다."([부정변증법], 국역, p.242)라고 하고 있다. 이 짜임(Gewebe)에서 우리는 Max Weber 의 이름을 연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아도르노는 '구도'를 설명하고나서 바로 '과학 속의 짜임관계'라는 절에서 Weber 를 논하고 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 부분도 함께 읽으면 저자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구도'가 어떤 의미인지, 또 어떤 현재적 의미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메시스의 문제인데, 저자는 이를 주체와 객체의 분리 이전의 자연상태에 대한 기억이요, 상기로 정리하고 있다.(이 책, p.74~79) 즉 주-객이 분리된 이후 자연의 공포에 맞선 이성의 도구적 사용으로 인한 자연지배가 가능했고, 그렇게 계몽의 신화가 도구적 이성의 이름으로 역사적으로 '기능'한 결과, 그러한 고통의 역사가 나치즘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으므로, 유일한 미메시스의 위치로 예술을 확인하고, 주-객 분리 이전의 상태를 기억하고 상기해야 '계몽의 계몽'이 가능하며 '고통의 화해'가 가능해 질 수 있는 열린 공간(유토피아)가 확보되지 않겠는가라는 논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이렇게 미메시스의 문제로 볼 때, '역설'로서 계몽의 역사는 '외적자연'의 지배를 통해 '내적자연'의 훼손, 망각, 상실, 퇴행 등을 야기했고, 이렇게 계몽에서 신화로 다시 돌아간다는 테제가 반복된다. 저자는 이를 다음의 인용을 통해 확인해준다. "주관 속에 있는 자연의 기억-이 기억을 완성시키는 것은 곧 모든 문화 속에 숨겨져 있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을 통해 계몽은 지배 일반과 대립한다."(이 책, p.60)1 이렇게 본다면 이 책은 짤막하게 논평되는 것의 불리함을 무릅쓰고, 아도르노라는 '구도'(Konstellation)을 우선적으로 '고통과 화해'라는 열쇠로 열어보려한 시도하고 할 수 있겠다. 덧붙여 마지막의 [고통과 화해의 철학, 그 이후] 장은 아도르노의 현재성을 확인하는 부분인데, 아도르노에 대한 최근의 비판적 문제제기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언급된 학자들의 관련 서적을 미주로 처리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편집상의 실수이겠으나,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국역본의 경우 몇몇 군데에서 쪽수를 잘못 표기한 경우가 발견된다. 가령, 이 책 56쪽의 인용은 [계몽의 변증법] 251쪽이 아니라 233쪽이다. 또한 이 책 66쪽의 인용은 [부정 변증법] 242쪽이 아니라 85~86쪽이다. 이렇게 우리는 아도르노라는 구도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열쇠와 번호들의 배열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이 책을 통해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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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 컬리지언총서 5 이매진 컨텍스트 42
김원 / 이후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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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이란 제목에서 우리는 마치 잊혀진 것, 즉 80년대의 대학생의 대항문화-하위문화를 오늘날 복원하고 그것을 향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저자는 80년대 식의 문제설정에 따를 경우 궁극적으로 '계급' 개념을 비판에 붙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특히 2장 '공동체, 하위문화, 대중정치'는 본 저서의 문제설정을 이론적으로 규명하고 있는 장이다. 따라서 저자의 말과는 정반대로 독자는 2장만 따로 분리해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외 다른 부분들은 인류학적 방법을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적어도 우리의 경우 80년대 계급의 문제설정은 레닌의 용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이 '동원'의 문제는 저자가 대결하고 있는 또 다른 지점이기도 하다. 가령 대자적 계급의식을 위한 외부성테제가 사실상 대중들의 아래로부터의 욕망이나 자생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는 것이 본 저서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기 보다는 '발굴'하고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저자가 사용하는 대중정치라는 말은 계급정치를 대체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저자는 대중을 단순히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즉 소시민적인 집단으로 범주화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정치의 복원을 저자는 마치 레닌의 4월 테제였던 '소비에트에게 권력을'처럼 '대중에게 광기를'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최근 한국민주주의에 대한 최장집 교수의 일련의 이론적 작업이 사실상 정당을 매개로 한 (정상적)대의정치의 복원, 계급적 구조에 대한 실질적 반영, 정치의 제도화에 대한 논의들이라고 한다면 저자는 학생운동의 조직화문제를 '기억'하면서 그것이 관료화되고, 제도화되었다는 한계를 갖는다고 본다.

  베버의 용어를 빌면 이는 관료제(기계)의 문제일 것이다. 또한 저자가 기대고 있는 들뢰즈의 개념을 빌면 노마드적 전쟁기계의 복원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대중에게 광기를 이라고 말했을 때 대중은 동원의 대상이 아니다. 그 때의 대중은 로자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대중이고, 자발성 또는 자생성은 무의식적 힘이다. 니체라면 '긍정의 힘의 의지/권력 의지'라고 했을까?

  80년대의 일반적 문법처럼 자발성을 '관념적인 쁘띠'라고 보는 대신 위로부터의 통치와 지배에 반하는 능력이요, 힘으로 파악하는 이러한 '관점과 해석'의 변화는 그것이 니체적인 만큼 근대정치의 문제틀을 넘어서고자 한다. 그래서 저자는 '대중에게 광기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즉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법도, 질서도, 제도도, 사회계약도 더구나 규율이나 훈육, 포섭이 아니다. 대신 저자는 일종의 흐름(flow) 또는 결여나 결핍이 아닌 '넘침'의 상태로 욕망과 대중을 설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탈근대적 정치의 문제설정을 '기억'하는 대신 '전망'하고 있는 저자와 대면할 수 있다.

 이렇게 봤을 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2장 4절 '대중정치'(107~111p)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의 주는 매우 충실한데 특히 이 부분의 주(30~42번)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참고문헌 목록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 책은 알라딘의 분류처럼 한국현대정치사에 대한 책이 아니다. 아마도 망각과 기억이라는 역사(학)의 오랜 주제를 제목으로 사용한 덕분에 얻은 규정일까? 다분히 사회철학적인 토대에서 인류학적 연구를 접목시킨 저자의 연구에 큰 흥미와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80년대의 운동권 문화와 정치의 문제가 여전히 오늘의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억대신 그러한 전망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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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6
로버트 니스벳 지음, 강정인 옮김 / 이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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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 하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하에서 만든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꿈 속의 악마처럼, 살아 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그리고 살아 있는 세대들이 자기 자신과 사물을 변혁하고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때, 바로 그러한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그들은 노심초사하며 과거의 망령들을 주문으로 불어내어 자신에게 봉사케하고, 그들에게서 이름과 전투 구호와 의상을 빌린다.” 맑스가『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말한 이 언급에서 우리가 보수주의의 유령을 떠올린다면 지나친 수사일까? 잘 알려진 것처럼 보수주의가 프랑스혁명에 대한 버크(Burke)의 비판을 그 기원으로 한다면 애초에 보수주의는 맑스의 표현을 빌리면 ‘혁명적 위기’라는 조건에서 배태한 것이다. 그렇다면 버크의『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1780, 이하『성찰』)은 죽은 자들을 주문으로 불러들여서 죽은 자들의 유령이 살아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짓누르는 그 주술을 강령으로 하는『보수주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보수주의라는 유령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레닌의 문제의식 역시 역사의 혁명적 위기를 조건으로 한다. 이 위기는 이른바 ‘임박한 파국’의 조건에서 위기를 기회로 삼는 기예(art)를 요구하는 문제이자, 역사의 질적 변화를 위한 문턱/국면이다. 하지만 보수주의는 같은 위기의 순간이 기회가 아니라 말 그대로 위기 그 자체가 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보수주의에게서 위기 역시 ‘임박한 파국’인 셈이다. 그래서 보수주의는 “무엇을 지킬 것인가”라고 다시 묻는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가『악령』에서 19세기 중반 러시아를 뒤흔들던 합리적이고 진보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일련의 경향을 ‘악령’이라 했을 때 이 표현의 정치적 함의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러시아 사회의 임박한 파국에서 그가 지켜야 할 것으로 본 것은 러시아 정신, 전통적인 러시아 정교의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역사적 위기라는 조건에서 배태되었다는 그 기원의 성격에서 보듯이 보수주의는 역사적 국면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다. ‘한국형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일반에서 일탈한 것임을 쉽게 논의할 수 있는 반면, 가령 ‘한국형 보수주의’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보수주의 일반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간단하게 치부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립하기 보다는 특정한 국면에서 반테제의 형태, 부정의 형태로 역사에 개입하는 수동성이 보수주의 한 특징이다. 버크가 혁명을 불완전한 인간의 이기적 충동과 편협한 시각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았을 때 그는 인간존재와 이성의 한계를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곧 본래적으로 인간의 기획이 제한적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유한한 이성과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에 한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는 이처럼 불완전한 것에 기반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불완전성을 곧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하는 버크(보수주의)에게 이 본성은 외부의 어떤 힘을 통해 규율되고 통제되어야 하는 것, 강제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유기적인 한 사회의 재생산을 위해서 사회 구성의 원리로서 요청된다. “사회는 단순히 살고 있는 자들 간의 동업이 아니고 산 자, 죽은 자,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자들 간의 동업이다.”고 말할 때 버크는 사회의 재생산, 즉 사회적 관계의 축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 셈이다. 버크에게 역사의 단절은 곧 사회적 관계의 해체로서 결코 승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본성의 한계에 기반한 버크의 사고는 완전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절대적인 준거나 대상을 필요로 한다. 이런 맥락에서 신이나 종교, 특히 버크에게 기독교는 영혼의 안식처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의 축적은 인간사회 외부에서, 즉 인간을 넘어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버크는 “인간은 천성적으로 종교적 동물이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언제나 사회적 동물이다. 보수주의에서 이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은 자유주의의 가정처럼 개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성의 조건에서 경험과 편견, 관습, 관행 등의 소위 ‘전통’의 누적의 결과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버크에게 사회적 관계는 시간을 매개로 한 역사의 구성물이고 그런 한에서 전통이 사회적 관계가 된다. 맑스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수주의적 인간관에서 인간은 전통의 담지자인 것이다. 전통의 담지자로서 인간은 이미 역사적인 인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차라리 사회적 관계를 단순히 ‘누적’의 용어가 아니라 관계 그 자체가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역사적 조건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즉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로서 인간과 역사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모범답안으로서 인간의 불완전성을 문제시 삼기보다는 애초에 인간은 역사적으로 생산되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조건과 제약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인간과 사회, 역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그 외부의 초월적인 대상을 가정하거나 그 개입을 요청할 필요도 사라질 것이다. 오늘날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만큼 탈역사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래서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생산이 사실은 ‘자본주의적’ 생산인 것처럼, 보수주의에서 사회의 구성원리로 설명하는 전통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전통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역사적’이라는 수식이 단순히 수사적인 ‘전통’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로서 자본주의적으로 강제되고, 자본주의적 관계에 포섭된 또는 포섭되어가는 전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지나친 것일까?

  하지만 버크의『성찰』이 번역되지 않은 한국 사회의 이 보수적 ‘전통’을 ‘한국적 보수주의’라는 편리한 수사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최근에 번역된 R.니스벳의『보수주의』(강정인 역, 이후, 2007)는『에드먼드 버크와 보수주의』(강정인 역, 문학과 지성사, 1997)에 실린 세 편의 논문 중 제2부「보수주의」논문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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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 옮김 / 까치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에도 혁명이 가능할까? 근대적 의미에서 과학은 대개 객관화, 가치중립성의 용어로 설명되었다. 베버(Weber)를 언급한다면 이러한 방법론은 비단 자연과학 뿐 아니라 사회과학에서도 정당성을 확보한다. 즉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분리, 존재에 대한 인식과 당위성에 대한 분리는 이제 이른바 ‘과학적’ 연구 지침이 된다. 어떤 이론이나 연구의 추상성 수준과 상관없이 그것이 ‘과학’으로 승인받기 위해서는 언제나 실험이나 실증적 절차를 통해 경험적으로 확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자연과학적 실험의 경우 그 반복적 특징으로 인해 다른 연구자가 동일한 통제 하에 실험을 하면 같은 결과가 도출되어야 하며 사회과학적 연구 역시 통제변수를 동일하게 할 경우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간의 인과관계는 반복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험과 이론의 일치가 과학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치는 특정한 원인과 특정한 결과 간의 인과관계, 즉 검증 가능한 가설의 형태로 과학의 한 계기가 된다. 이렇게 정립된 가설의 경험을 통한 검증, 또는 포퍼(Popper)의 논의를 빌면, ‘반증가능성’의 확인 여부는 결국 과학적 이론 구성의 기본 골격이 되는 셈이다.



  과학, 특히 근대적 의미의 과학 개념이 이러하다고 할 때 ‘과학 혁명’이라는 말은 자기 모순적이지 않은가. 우리가 토마스 쿤의『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을 때 드는 첫 번째 의문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당연하게 예상되고 제기되는 이 물음에 대한 자신의 대응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혁명은 앞서 말한 과학의 객관성, 검증가능성, 존재와 당위의 분리 등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혁명은 대개 파토스(pathos), 열정, 의지, 당위, 목적 심지어 기예/기술(art) -레닌은 혁명은 기예라고 했다- 등으로 설명된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은 낭만성의 전형으로 찬양되거나 반대로 경멸당한다. 이처럼 서로 이질적이다 못해 대립적으로 보이는 과학과 혁명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양자는 조응가능하며 접합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의문을 중심으로 저자와 대면하고 있다.





  우선 개념에서 시작하자. 오늘날 우리는『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지 않아도 ‘패러다임’(paradigm)이란 용어를 쉽게 사용한다. 이 일상화된 용어는 그 용법의 층위가 매우 다양하지만 자연과학의 경계를 넘어서 사용되거나 그 외연이 확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개념이 특정한 경계를 기준으로 또는 그런 경계를 설정했을 때 내포와 외연의 문제라한다면 오늘날 패러다임이란 용어는 이미 개념이 아닌 것이 된 셈이다. 그 경계도 없고 그런 만큼 외연과 내포를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용어의 저작권자인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을 다음처럼 정의한다. “나는 이들 패러다임을 어느 일정한 시기에 전문가 집단에게 모형 문제와 풀이를 제공하는 보편적으로 인식된 과학적 성취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저자와 우리의 대면은 이 개념과 대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개념에 대한 서술 중 ‘어느 일정한 시기’란 저자가 말하는 ‘역사’이며 ‘역사적 고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축적에 의한 발전’(development by accumulation)이라는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문제설정에 대한 비판이 된다. 즉 과학의 발전 또는 진보는 지속적인 축적이나 누적이 아니라 오히려 단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단절, 즉 과학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통해 ‘전혀 새로운 과학의 개념’을 포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개개의 발명과 발견의 분리 불가능을 정상과학이 상정하는 누적이나 축적의 개념과 상충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 또는 과학사에 대한 ‘역사적 연구’야 말로 이러한 분리 불가능을 과학(사)의 현실로서 온전하게 승인하는 접근방법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렇게 되면 과학사는 단절적이며 그런 만큼 분리된다. 가령 전근대 과학과 근대과학의 ‘관계’가 상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또는 그 관계를 일괄적인 진보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것은 더 이상 과학사에 대한 사실적 접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차라리 “바로 그 당대에서의 그 과학의 역사적인 온전성”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이 온전성은 역사적으로 분리된, 역사적 한 단위, 즉 특정 패러다임의 정합성을 의미한다. 모든 과학은 그것이 당대에 정상과학일 때 그 나름의 정합성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저자는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학에서의 분절/단절을 역사 또는 역사적 접근의 구도로 이해하는 저자에게 “역사적 고찰은 과학의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파격적인 주장, 즉 정상과학의 통념에 反하는 주장은 저자가 자신의 이 저작을 ‘에세이’라고 거듭 밝히고 있다하더라도 논의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그 파장은 심대한 것이다. 이는 서두에 밝힌 바 과학 혁명이라는 대립되는 용어의 접합이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사)의 과정 또는 역사 -정상 과학식으로 말하면 ‘축적 과정 속의 진보’-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논리 또는 문제설정 자체도 이후 혁명적인 영향을 야기했다는 점에서 ‘혁명’인 것이다. 저자의 이런 혁명적 문제설정은 ‘임의성’을 승인/허용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임의성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제6장「이성 현상 그리고 과학적 발견의 출현」,제7장「위기 그리고 과학 이론의 출현」, 제8장「위기에 대한 반응」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고 밝히고 있는데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임의성과 이상(異常) -이상은 기존의 정상과학, 즉 패러다임에서의 전문적 예측과 끊임없이 반발하는 현상, 결과를 말한다- 위기 등을 동시에 사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이러한 임의성이 항상 잠재적인 형태로 정상과학을 내파 또는 붕괴시킬 가능성을 갖는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임의성, 이상이야 말로 ‘우연’적인 요소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거나 기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진행에 있어 본질적이며, 그 과정을 추동하는 기본 동력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정상과학은 ‘의지’로 설명된다. 근대적 과학의 방법론은 서두에 밝힌 것처럼 의지로 부터의 자유를 기본적으로 요구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정상과학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지가 요구되는 것이다. 임의성이나 이상이 반복적으로 출현하고 정상과학이 이 도전/대결에 대응하는 양상이 곧 의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적 과학을 저자의 논의를 따라 하나의 역사적 단위, 즉 패러다임으로 본다면 이 단위 역시 자기 완결적이라기 보다는 그 지위의 재생산을 위한 의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중세적 세계관 -흔히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의 前史로 간단히 치부되는- 과 크게 다를게 없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패러다임의 정의로 돌아가면 패러다임은 “모형문제와 풀이를 제공하는 보편적으로 인식된 과학적 성취”다. 이는 곧 패러다임이 특정한 문제설정(problematique)라는 의미다. 즉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문제를 설정하고, 아니 그 문제라는 것 자체를 승인하고 제기하고 결정하는 것, 문제가 문제일 수 있는 것 역시 특정한 문제설정에 기반해서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설정은 그것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특정한 정향을 갖는다. 그것이 해답이 되든 그러한 과정이든 이미 특정한 문제설정으로서의 패러다임은 자기 발전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재생산과정을 우리는 정상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저자는 이것을 ‘정상과학의 개념 상자’ 속에 밀어 넣으려는 의지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비정상적인(extraordinary) 탐구’야 말로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의 계기가 된다.





  이제 우리는 문제 그 자체부터 문제가 제기되는 방법과 그것이 해결되는 과정의 지반으로서 문제설정, 역사적 단절로서 당위, 즉 패러다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궁극적 하나의 발견은 … 이론의 조직망을 개편시킨 에야 일어난다. 과학적 사실과 이론은 … 범주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강조는 인용자)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과학자의 세계가 사실이나 이론의 영역에서 근본적 … 질적으로 변형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과학혁명의 역사는 ‘축적’의 역사가 아니라 ‘단절’의 역사다. 과학적 방법론, 특히 맑스주의적 방법론으로서 변증법으로 과학혁명을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는 과학혁명의 과정이 ‘지양’이나 ‘부정의 부정’을 통한 단계론적인 관계나 그러한 관계들의 총체성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를 계기를 구성하는 한 단위로 분할한다는 점, 즉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관계를 기반으로 역사를 각각의 단위로 이해한다는 점은 유사하다. 그 각각의 사회구성체는 각각의 생산양식이라는 특정한 문제설정, 즉 지반이라는 점에서 한 사회구성체를 토마스 쿤의 용법을 빌리면 한 패러다임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각 역사적 단위가 맑스에게서는 한 단계로서 더 나은 단계로 지양하기 위한 계기가 되지만, 토마스 쿤에게 과학의 역사적 단위는 그 자체로 자기 정합성을 갖는 것으로 상정된다. 하지만 쿤이 임의성, 이상 등을 정상과학의 위기의 계기가 된다고 보는 점, 그래서 이를 통해 비로소 이른바 ‘과학혁명’이 가능하다고 보는 점은 사실 쿤 역시 역사를 단절적으로 분할하여, 각 패러다임 간의 관계를 사장하기 보다는 다음 패러다임으로의 이행 계기를 이전 패러다임에서 잉태하고 있다고 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차라리 쿤은 ‘발전’ 개념을 각 역사적 단위에 승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맑스와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이런 점이 맑스가 이른바 ‘과학적’ 방법론으로 역사일반에 대한 혁명을 설명할 수 있었던 것처럼 쿤도 배타적으로 보이는 과학과 혁명을 접합시킬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억측은 아닐 것이다. 기존의 사회적 관계와의 단절, 즉 기존의 정상과학, 패러다임과의 단절을 승인한다는 점에서 쿤의 작업은 이미 ‘혁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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