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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1
이수정 외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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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언니에게 추천을 받아 독서모임 멤버들과 함께 읽었다. 아주 간단하게 책 설명을 하자면, 이 책은 여러 영화에 소개(?)되었던 여성을 향한 범죄에 대해 이수정 교수님과 이다혜님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하는 책이다. 에세이나 소설 등과는 다르게 나누었던 대화 그대로를 옮겨 놓았기 때문에 두 분이 하는 대화를 생생하게 듣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수정 교수님은 <그것이 알고싶다>에 자주 출연하시기 때문에 친숙한 느낌이 있었고, 그래서 더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수월했다.

한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들었던, 혹은 인상 깊었던 구절을 쭉 나열하는 코너가 독서모임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 책의 그 코너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의 구절이 적혀 있었고, 특히 내 지분이 아주 컸다. 그동안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기만 했던 것들을 이수정 교수님과 이다혜님이 직접 영화에 빗대어 설명해주는 것을 읽으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도 여성으로서 여성을 향한 다양한 범죄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이수정 교수님은 아주 오래전부터 공부해오셨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연구해오셨다는 것을 알고나니 조금은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영화 '가스등'을 다룬 가장 첫 번째 파트이다. 최근 몇 년동안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인 '가스라이팅'이 어떤 것을 가리키고 어느 상황에서 쓰이는 것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으나 단어의 어원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단어의 어원이 이 영화라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흥미롭고 씁쓸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스라이팅의 의미는, A라는 사람이 아주 교묘하게, 아주 천천히 B라는 사람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하여 결국 자신이 원하는 대로 B를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주 교묘하게, 아주 천천히'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는 B가 자신이 A에게 조종당하고 있고, 자신의 생각은 지워졌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교묘함이다. '가스등'이라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어찌저찌 집에서만 거의 생활하도록 하고, 여자 주인공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여자 주인공의 생각까지 교묘하게 지배한다. 아무 일도 아닌 일로 여자 주인공을 몰아 세우고, 자신이 없으면 여자 주인공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밤마다 무언가를 하는데, 그 행동이 집의 가스등을 아주 조금씩 어둡게 만들었고, 그를 알아챈 여자 주인공이 가스등에 대해 이야기하자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며 더욱 몰아세운다. 영화의 결말은 결국 누군가의 도움으로 남자 주인공에게서 벗어나 여자 주인공이 자신을 되찾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영화에서 가스등이 곧 최근 쓰이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의 어원인 셈인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정신이 지배당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게 틀리고 그 누군가가 맞다고 생각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두 분은 영화 '가스등'뿐만이 아니라 다른 다양한 영화에서 등장하는 여성을 향한 범죄에 대해 설명해주시기 때문에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책의 마지막 장까지 순식간에 읽었다. 중간에 우리나라의 법과 미국의 법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부분도 있는데, 가정 폭력이나 가정 내에서 범죄가 일어나면 우리나라는 피해자가 피해자 쉼터로 가는 것과 같이 피해자를 이동시켜 분리하는 제도인데 미국은 가해자가 쫓겨난다고 한다. 한국의 법이 그렇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미국의 법이 그렇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두 나라를 비교 설명하는 것을 들으니 아무래도 조금 씁쓸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이런 책을 발간하는 글쓴이들이 있는 한, 한국도 계속해서 더 나은 나라로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면서 '느낌'으로만 가지고 있었던 것들이 직접 전문가들의 입에서, 생각에서 정리되어 나오고 그것을 다시 내가 읽는다는 것은 아주 신기한 일이다. 흥미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짜릿한 감정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씁쓸하고 슬프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해서 지배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문가의 말로 표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도 신기하거나 짜릿하지 않고 그저 슬펐다.

영화 속의 꺼질 듯 말 듯한 가스등의 조도를 통해 여성의 취약한 정체감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듯합니다. 다락방에서 물건을 뒤지기 위해 가스를 켜는 행위는 앤턴이 하는데, 가스가 줄어들어 불이 깜빡거리는 탓에 불안을 느끼는 건 폴라입니다.

그런데 치사는 살인보다 그 수가 훨씬 많습니다. 상해 치사, 폭행 치사, 강간 치사, 과실 치사까지 그 수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런데 부부를 입력하는 항목이 없다 보니 폭행으로 아내를 죽여도 그것이 만약 치사 사건으로 처리되면 추적이 불가능해집니다. 한국에서 한 해에 몇 명이 남편에게 맞아 죽는지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분리를 시키는 방법 자체입니다. 한국에선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집을 나가야 해요. 그런데 상식적으로 봐도 때린 사람이 집을 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외국의 경우에는 대부분 퇴거 명령이라는 것을 내립니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을 스토킹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성범죄를 목적으로 여자를 쫓아간다면 단 1회라도 그건 스토킹입니다.

범죄학에는 여성 범죄자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악녀 가설’이 있습니다. 보통 피의자가 여자라면 경미한 폭력 범죄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관대한 처분을 내리는데 여자가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면 여자가 감히 사람을 죽이다니! 하며 남자보다 형량이 훨씬 높아진다는 거죠.

저도 재소자들을 만나 너무나 악질적인 모습을 보면 살의를 느낄 때가 있어요. 분명 나랑 비슷하게 눈코입이 달린 직립 보행을 하는 인간인데 그 경계선을 넘느냐 안 넘느냐의 차이로 짐승이 되기도 합니다.

이 친구는 또 태희는 가슴이 작다, 태희처럼 도도한 여자는 먹어야 네 여자가 된다. 이런 식의 말도 합니다. 여성 비하적인 대화가 남성들끼리의 우정을 돈독하게 만드는 방식이 되는 걸까요? /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어떡합니까. 남자들은 그러면서 우정을 돈독히 하는 반면, 우리는 그런 대화를 비웃으면서 우리의 우정을 돈독히 하잖아요.

이미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한국은 의제 강간 연령이 너무 낮은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토론회에서 변호사 한 분이 혼인 가능 연령은 18세로 해놓고 의제 강간 연령은 12세까지라는 것은, 그렇게 어린 나이부터 섹스할 능력은 있지만 혼인은 안 된다는 뜻이냐 지적하셨는데 너무나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또다시 의제 강간 연령입니다. 그런 위험이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연령이 대체 몇 살인가 따졌을 때 결코 13세는 아닙니다. 왜 이 어린아이들에게 다른 권리는 주지 않으면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섹스의 권리는 허용하느냐는 말입니다.

누가 연쇄 살인을 저지른 후 연쇄 살인법 티를 내고 돌아다니겠어요. 그러면 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을 무려 삼십 오 년 동안 못 잡았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성범죄자도 마찬가지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전 일련의 사건들을 볼 때마다 제가 어떻게 별일 없이 자라 성인이 되어서 살고 있는지, 정말 운이 좋았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한국 영화 ‘브이아이피’의 출연진 소개에는 지은서, 윤정원, 나영, 이준희, 선우, 장민주, 조은빛, 윤하, 조현경 배우가 모두 같은 역할을 소화한 것으로 나온다. 그것은 바로 ‘여자 시체 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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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양들의 침묵
토머스 해리스 지음, 공보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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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은 워낙 유명한 책이라 제목은 많이 들어보았으나, 사실 소설인지 에세이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내용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전무했다. 한니발이라는 캐릭터의 이름도 들어는 보았으나 한니발이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인물인지도 알지 못했다. 독서모임에서 한 모임원이 이 책을 읽기를 희망했고, 제목만 익히 들어보았던 이 책을 그렇게 읽기 시작했다.

책은 클라리스 스탈링이라는 주인공의 관점에서 시작된다. FBI 요원이 되기를 희망하는 연수생인데, 우연(하지만 그리 우연하지는 않은)한 기회로 FBI에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잭 크로포드라는 상사와 함께 연쇄 살인마를 찾아 나가는 내용이다. 클라리스는 처음에도 어른스러웠지만 책의 끝으로 갈수록 그 어른스러움에 더해 FBI 요원으로서의 소양도 점점 갖추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클라리스는 정말 호감형 인간이다.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머리를 재빠르게 굴리며, 과묵하면서도 맡은 일을 최대한 수행하려고 노력하지만 절대 생색을 내지는 않는, 그런 사람이다. 책에는 클라리스 스탈링의 절친한 친구가 종종 등장하는데, 서로 속깊은 대화를 하는 장면이나 시시콜콜하게 노는 장면은 찾아볼 수 없지만서도 왜 친구가 클라리스를 그렇게도 아끼고 소중하게 대하는 지를 책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책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뤄지는 인물은 세 명이다(극 중 범인은 개인적으로 뒤에 나열된 세 명과 비중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리 깊게 다뤄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클라리스 스탈링, 잭 크로포드, 한니발 렉터. 셋의 관계성과 각자의 이야기만으로 750페이지가 넘는 스토리를 단 하나의 페이지도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간 작가의 실력에 감탄했다. 잭 크로포드와 한니발 렉터간의 관계는 그리 자세히 묘사되진 않았지만, 클라리스 스탈링과 잭 크로포드, 클라리스 스탈링과 한니발 렉터와의 관계는 아주 흥미로웠다. 특히 말과 행동을 이해하기 힘든 사이코패스인 한니발 렉터가 다른 사람은 모두 차치하고 클라리스 스탈링에게 깊은 관심을 갖는다는 설정이 재미있으면서도 섬뜩했다. 내가 놓친 것인지 묘사가 안되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니발이 클라리스에게 관심을 갖는 뚜렷한 이유를 책에서 찾지 못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들의 어떤 한 면을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이 책은 단연 그 명성에 알맞게 흡입력이 엄청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클라리스의 관점에서 책이 진행되지만 중간중간 제삼자의 관점에서도 내용이 진행되는데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고 오히려 더 이해가 잘 될 정도로 스토리의 짜임이 좋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단연 범인과 클라리스가 마주하는 장면이다. 마치 내가 영화나 연극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 장면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아주 어두운 상황에서 숨막히게 이어지는 전개는 나를 온전히 그 책으로 집중시켰고, 뻔한 클리셰라고 말할 수 있는 클라리스의 승리는 나에겐 절대 뻔하지 않은 아주 소중하고 값진 결말이었다.

양들의 침묵에서 비교적 비중있게 다뤄진 인물 중 한 명인 한니발 렉터에 관한 책이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시리즈 <한니발>이다. 아직은 독서모임의 책을 읽는 데 집중하느라 다른 책을 읽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워 시도를 해보지는 못하겠지만 책을 읽는 습관을 더 들인 후에 <한니발>이라는 책도 반드시 읽어보고 싶다. 한니발 렉터의 심리를 더 깊고 자세하게 알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의 검지 끝이 렉터의 검지에 닿은 순간, 그의 두 눈에서 탁 소리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고마워, 클라리스." "고맙습니다, 렉터 박사님." 그는 조롱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하얀 감방 안에 서서 댄서처럼 유연하게 몸을 굽힌 채 깍지 낀 두 손을 앞으로 뻗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렉터 박사는 스탈링의 머릿 속에 그 모습으로 남았다.

답이 ‘예‘이든 ‘아니오‘든 난 놀라지 않을 거야. 당분간 양들은 울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클라리스, 당신이 보게 될 지하 감옥은 이게 마지막이 아니야. 앞으로 수 차례 보게 될 것이고 당신이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양들은 한동안 축복처럼 침묵하겠지. 양들의 울음소리는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고, 그 울음은 아마 영원히 멈추지 않을 거야. 당신을 만나러 갈 계획은 없어, 클라리스. 당신이 살아 있는 세상이 내게는 훨씬 흥미로우니까. 당신도 내게 그런 예의를 차려주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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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김지은입니다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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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참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슬픔, 분노, 허탈감, 혼란스러움, 유대감, 기쁨… 책에 적힌 문장 하나하나에서 김지은님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짙은, 그러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느껴졌다. '아직' 성범죄를 당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성범죄 피해자들과 온전히 공감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성차별을 20여년간 겪어온 나에게 또 공감하는 것은 성차별에 맞서는 것보다 훨씬 수월한 일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며 떠오른 감정들 중 다른 것들은 설명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기쁨'만큼은 꼭 글로 적고싶다. 거의 400페이지에 달하는, 그리고 수만장의 종이가 있어도 다 담을 수 없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결국 살아남아 보란듯이 책을 출판한 김지은님의 모습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다행'스러움과 '기쁨'을 느꼈다. 미투를 하기 전에는 가족에게도 자신의 상태를 꾹꾹 숨기고 혼자 모두 감내하려고 했던 사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주 조금씩 천천히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듦을 드러내는 김지은님의 변화가 정말 기뻤다. 무수히 많은 시간동안 너무 아프고 힘들어 죽지 못해 살아오면서도, 중간중간 보여준 김지은님의 용기로 세상이 바뀌고 있는 것이 느껴져서 기뻤다. 


세상에는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이 참 많다. 물론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해받지 못하는 행동 중에서도 남을 해하려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은 전혀 결이 다르다. 김지은님이 당한 2차 가해의 아주 일부분만 책에서 읽었는데도 치가 떨리고 소름이 끼쳤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왜 나서서 피해자에게 상처를 줄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악랄한 짓을 저질렀는데도 왜 사람들은 친분을 앞세워, 팬심을 앞세워, 혹은 단지 피해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앞세워 피해자에게 또 다른 악랄한 짓을 하는 것일까. 가해자의 가족은 원래부터 못되고 잔인한 사람들일까, 아니면 이 사회가 범죄를 저지른 지배층의 가족을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이 사건의 가해자는 안희정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 안희정 혼자만은 아니다. 안희정에게서 시작되어 안희정으로, 안희정에게서 시작되어 무수히 많은 다른 안희정으로 가해자의 범위가 넓어진다. 아직도 가해는 계속되고 있고, 피해자는 여전히 힘들게 지내고 있다. 


한국의 처벌 강도는 다른 나라와 견주어보면 아주 관대하다. 범죄자들에게 관대한 나라, 그게 한국의 또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권에는 기본적으로 선순위 후순위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가해자의 인권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다른 사람(피해자)의 인권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가해자의 인권을 피해자의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됐다. 가해자 가족들의 인권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인권은 가해자와 그 가족들의 것보다 훨씬 우선이 되어야 한다. 가해자는 자신의 선택으로 가해를 했지만 피해자는 결코 자신의 선택으로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명심하고 피해자를 중심으로 일을 결정하여야 한다. 그들의 치료에 온 힘을 다하는 동시에 가해자로서의 보호도 철저하게 해야한다.


아직도 세상에는 화가 나는 일이 아주 많이 일어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날이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계속 화를 내야 한다. 세상의 어두운 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아무런 감정 없이 대하다보면 피해자를 지키는 방법 또한 잃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위에 적은 모든 것들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그저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범죄는 자신의 선택이다. 정신과적 사유가 있는 것이 아니면(그렇다 해도 범죄는 정당화되지 않고, 범죄를 일으키기 전에 먼저 치료를 받아야하지만) 사람에게는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두 그들의 선택이다. 나도 20여년간 살아오면서 무수히 많은 선택을 했고, 그 모든 선택들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는 목적으로 어떤 선택을 한 적은 결단코 없다. 나는 그저 상식적인 나라에서 상식적인 사람들과 상식적인 일상을 지내고 싶다. 상식적인 선택이 가득한 세상이 되면 좋겠다.

설령 얼굴을 가리고 미투를 했더라도 나의 모습이 온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유명 정치인 수행비서의 얼굴은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개인정보도 금세 노출될 거라고 짐작했다. 나는 숨겨질 수 없었다. 블라인드 뒤에서 미투를 한다면 온갖 억측이 사건을 가리고 수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폭력 사건 본질 그대로, 진실 그대로 알려지길 원했다.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을 테니 제발 사건에 집중해달라, 제발 제대로 수사해달라, 진행 과정을 지켜봐달라 애원하는 마음으로 나를 방송에 드러냈다. - P65

밥을 뜨려다 말고 황급히 버스 시간을 알아봤다. 절대 나 때문에 일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었다. 차편이 없어 엄마가 급하게 나를 도청까지 차로 데려다 주기로 했다. 평소 엄마의 실력으로 운전하기에는 어려운 길이었다. 가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를 내려주고, 엄마는 다시 그 차를 몰고 혼자 집까지 되돌아가셨다. - P113

모든 것을 혼자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이미 생활과 업무의 경계를 잃고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못하는 상황에 무력하게 젖어든 상태였다. 섬에 갇힌 듯 일에 매몰되어갔다. 그 중간 중간 자행되는 성폭력과 곧바로 이어지는 사과에 혼란스러움은 더 가중됐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온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정신도 내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무슨 업무든지 수행하고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수행비서의 철칙이 나를 옥죄었다. 그리고 훗날 재판에서 노동자로서 비서로서 성실히 일했던 나의 이런 행동은 모두 "피해자답지 않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 P116

일단 정신을 차렸다. 유죄가 나올 것 같았다. 빠르게 유죄 판결에 대한 입장문을 적기 시작했다. 유죄 판결에 대한 입장문을 적고 전달을 위해 프린트를 해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속보가 떴다.

"피고인 유죄 3년 6개월 징역" - P174

이제 내게 꾸미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피해자답지 않다는 이야기를 또다시 듣고 싶지 않다. 가끔은 예쁜 옷을 입고 싶어서 박하 맛 사탕처럼 톡톡 튀는 잔꽃무늬 파자마를 입고 잔다. 팔부의 긴 소매 옷이다. 어디 나가지는 못하지만 색깔 있는 꽃무늬 파자마를 입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그리고 다시 외출을 할 일이 있으면 우중충한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는다. 스스로 피해자다움에 갇혀버린 건 아닐까 걱정도 된다. - P237

"조직의 배신자로 낙인찍혔지만, 피해자의 일에 함께하는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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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상하게 하는 일은 그만하기로 했다 - 바닷가마을에서 깨달은 지금을 온전하게 사는 법
전지영 지음 / 허밍버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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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읽어야 할 책을 두 권 골라야 했는데, 종종 이 책의 제목이 눈에 띄었고, 책을 골라야 하는 그 순간 이 책이 떠올랐을 뿐이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은 마치 여러 사람에, 바쁜 생활에 지쳐 있었던 나에게 "너를 상하게 하는 일은 이제 그만하도록 해."하고 말해주는 것 같이 느껴졌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아주 간단히 줄여 적자면 다음과 같다. 책의 저자는 디자이너로 여러 해 동안 아주 힘들게 몸을 혹사 시키며 일을 해오다가 크고 작은 사건으로 인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일하면서 종종 배웠던 요가를 조금 더 전문적으로, 깊게 배우고 공부하여 현재는 요가를 가르치고 있다. 과거의 여러 사건들과 요가를 배우러 오는 사람들, 그리고 저자에 대해 아주 덤덤한 어투로 설명하면서 자연스레 독자들의 마음을 토닥여주는 그런 책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꾸밈없고 어렵지 않은 어투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아주 작고 비교적 얇은 책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에세이의 장점은 자연스레 저자와 나의 삶을 번갈아 보며 위로받을 타이밍에서는 충분히 위로받고, 질책 받을 타이밍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며 혼자 스스로를 반성하고 질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평소에 운동 부족에 시달린다. 원래부터 약하게 태어났다거나 병에 시달리는 몸은 아니지만, 타고난 귀차니즘으로 인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운동 부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활동을 지금보다 훨씬 많이 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괜찮았던 근육량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말랑한 지방으로 바뀌었고, 사실 아직도 바뀌고 있다. 운동이 부족해서 몸이 안 좋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요새 특히 더 그렇다고 느끼는데, 올해 초까지만 해도 겨우 흥미 있는 운동을 찾아 꽤 꾸준히, 주 3회 이상 운동을 했기 때문에 아주 최소한은 유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염병이 퍼지면서 다수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는 최대한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나마 하던 플라잉 요가조차 그만두었고, 집에서 혼자 하는 운동에는 취미가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운동을 그만둔 후로 점점 몸이 약해지더니, 요새는 알 수 없는 어지럼증에 시달린다. 그냥 일을 하다 보면 멀미하는 것처럼 속이 메스껍고 울렁거린다. 나는 귀의 문제라고 생각해 병원에 가서 여러 검사를 받아봤는데 딱히 나온 소견은 없다. 그래서 내가 혼자 내린 결론은 영양소 부족과 운동 부족.. 오늘 아침에는 지하철역에서 회사까지 걸어왔다. (평소에는 버스를 이용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무 운동이나 시작'만'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고 여러 번 말한다. 사람들이 운동을 꾸준히 하지 못하는 이유, 혹은 꾸준히 할 마음이 있어 노력을 기울였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들마다 자신에게 맞는 운동이 있고 맞지 않는 운동이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운동'이라면 모두 몸에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는 운동을 찾으려 하지 않고 그냥 냅다 시작해서 억지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나처럼 운 좋게 시작한 그 운동이 잘 맞는 경우도 있겠지만, 운동을 시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운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들렸다.

위에서 언급한 플라잉 요가는 해먹에서 진행하는 운동인데, '요가'라고 불리긴 하지만 내 생각엔 일반 요가와 매우 다르다. 플라잉 요가를 배웠던 학원에는 책에서도 언급한 아쉬탕가 요가 수업도 진행해서 몇 번 들어봤는데, 저자처럼 나도 근력이 매우 부족했지만 충분히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바쁘게 살아가는 와중에 딱 요가 수업을 듣는 그 순간만큼은 정적이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느리게 진행된다는 점이 참 좋았다. 플라잉 요가는 그보다는 동적이지만 어쨌든 올바른 동작을 취하고 그 동작을 몇 초간 유지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같은 결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나에게 아주 커다란 감동과 깨달음을 주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위로하려고 부지런히 애쓰는 듯한 느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특히 모두 '바쁨'을 강요받는 한국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이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마치 요가 수업을 듣고 있는 것처럼 고요한 분위기에서 오롯이 책과 나만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또 지루한 교정 동작을 반복해야 했다. 그냥 평생 해야 하는구나.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손상된 골반과 무릎 관절은 이후로도 계속 요가를 하는 데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 결함은 이미 나의 일부였다. - P38

요가를 하는 사람은 평생 학생으로 산다고 한다. 나 역시 요가를 가르치는 강사 이전에 요가를 배우는 학생이었고 언젠가 <요가 디피카>에 실린 모든 아사나를 자유롭게 수련하는 날을 꿈꾼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지금의 노력이 시간 낭비라고 여기지 않는다. - P133

지금에 이르러서야 내가 씨앗이 아니라 씨앗을 수려한 나무로 성장시키는 정원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씨앗은 운이 사나우면 메마른 아스팔트에서 그대로 죽어 버리거나 햇볕을 제대로 쬐지 못하는 음지에 떨어져 앙상하게 뒤틀린 모습이 된다. 하지만 정원사는 열악한 장소에 떨어진 씨앗을 비옥한 토양으로 옮기고 햇볕을 가리는 방해물을 치우고 쓸데없는 잔가지를 자르고 매일 듬뿍 물을 준다. 자신을 결정권이 없는 씨앗으로 제한했을 때 나는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대하지 못했다. 그저 운좋게 햇볕을 쬐거나 누군가의 돌봄으로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P202

나도 수업을 받을 수 있는 오늘이 고마웠다. 일주일에 한 번 서울로 향할 때마다 고속도로에서 왕복 다섯 시간을 보내야 하지만 선생님의 지도 아래 동료 강사들과 땀을 흘리면서 요가를 수련하는 지금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의미가 있는 것은 먼 훗날의 나, 혹은 과거의 내가 아니라 오직 지금의 나였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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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아가미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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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북리더기로 이 책을 읽어서 책 표지는 구매를 할 때 말고는 볼 일이 없어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기록글을 쓰려고 보니 책 표지에 그려진 것은 비늘로 덮인 곤의 어깨, 등이었다. 나에게 생선의 비늘은 그리 아름다운 색을 가진 물체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강하의 어머니가 곤의 등을 보고 자신이 평소에 그렇게나 그리던 환각의 무엇과 연결지을 수 있었는지 이해는 잘 되지 않는다. 그냥 비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름다운 색과 빛을 가진 무언가라고만 생각해야지..


책의 소재는 굉장히 신선했다. 죽다 살아난 아이의 몸에 아가미가 발견되고, 성장할수록 진짜 생선처럼 몸이 비늘로 덮이기까지 하다니.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책에서 받는 신선함은 그게 끝이었고.. 솔직히 전체적인 책의 느낌은 좋지 않다. 일단 책의 문체가 (간결한 문체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너무 장황하고 미사여구로 가득해 불필요한 부분이 많아 보였다. 아가미가 열리는 것을 왜 마가린의 뚜껑이 열리는 것과 비교했을까.. 그럼 원래는 아가미가 열리는 것만 상상하면 되는데 마가린의 뚜껑이 열리는 것까지 상상해야하니 머리가 너무 바빴다. 평소라면 자연스레, 어떤 노력도 없이 책의 내용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마련인데 이 책은 전혀 그렇게 할 수 없었고, 내가 의식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해서 더 피곤했다(물론 머리 바쁘게 읽는 책도 의미가 있지만 나는 물 흐르듯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렇게 어둡고 차가운 내용을 굳이 또 책으로 읽고 싶지 않은 느낌이다. 현실에도 더럽고 힘든 일이 너무나도 많은데 책에서까지 누군가를 물어 뜯고, (초반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어떠한 사랑도 느낄 수 없는 내용을 읽는게 조금 고단스러웠다.


하지만 위의 느낌은 책이 후반부로 이어질수록 점점 작아졌다. 후반부에는 앞에서 그토록 곤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괴롭힘 말고는 하는 것이 없어 보였던 강하가 곤에 대해 얼마나 극진한 정성을 쏟고 있었고, 곤을 위해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내용이 담겨있다. 물론 그런 내용이 앞의 불쾌한 느낌을 모두 지우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책 전체가 불쾌한 것은 아니니.. 그나마 괜찮았다. 어쨌든 강하가 가진 곤에 대한 감정은 애증? 애가 아주 크지만 증도 그만큼 큰 느낌? 증오는 왜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새로 굴러들어온 어린 아이가 아니꼽게 보였을까? 아니면 곤이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도 있다는 사실이 불편했을까? 애초에 부모 없이 자라 사랑을 나누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을까(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가 멀쩡히 잘 키워주셨으니..)? 잘 모르겠다. 애초에 그럼 할아버지가 다른데 보내자고 했을 때 보내던가.. 그게 싫었으면 적어도 평범한 아이만큼만 사랑받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던가 하지. 


책의 진행 방식은 새로웠다. 이북만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소개글이나 작가의 말 같은 부분은 책에서 찾을 수 없었고, 단지 소설의 내용만 담겨있었는데, 그게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는 처음 있는 일이라 새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목차도 없었는데, 제목이나 구분하는 기호 없이 내용이 나누어져 시간적/공간적 배경과 화자가 준비할 틈 없이 바뀌었다. 내용은 서로 아주 긴밀하게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저 새로운 느낌의 책이었다.

그녀는 내려다본 아이의 잠든 옆모습이 예뻐 보여서 적어도 이 정도쯤은 되는 고급품으로 덮어줘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단 말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어차피 강하에게 자신의 상태와 정신세계를 이해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까지 이해시키려면 자신이 언제부터 약을 해왔고 어떤 환상들을 보는지,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자극적이며 깨고 나면 안타까운지,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상쇄할 수 있는 현실의 아름다움에 이 아이의 존재가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를 설명해야 했는데, 약 기운이 다 떨어지지 않은 지금은 그런 논리적인 일 자체가 불가능했고 구차하며 귀찮았다. - P177

나는 강하가 이내촌에 살았을 적에 거기 주민들이 정서적으로 얼마만큼 단결되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해요. 그런데도 어떤 사회심리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그들이 한거예요. 그래서 나는 얘기를 듣는 동안 생각하기를, 당신을 무사히 떠나보내기 위한 어떤… 에너지의 흐름 같은 게 있지 않았겠나 싶었죠. 이심전심? 호수를 옆에 끼고 살아온 사람들. 물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 모든 물질의 응집력은 수분을 전제로 하잖아요. - P207

한편 강하로 말할 것 같으면, 조금 아까 당신이 그랬죠, 당신 손이 먼저 닿은 곳은 강하가 잘 안 만지려고 했다면서요. 컵 한 개조차 따로 쓸 만큼 당신을 벌레 보듯 했다고. 강하는 별로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고 변명처럼 말했지만, 습관적으로 그랬던게 그날의 일에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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