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이누야마 집안에는 가훈이 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그때를 모르니 전전긍긍하지 말고 마음껏 즐겁게 살자. 그 가훈을 자매는 각각의 방식으로 신조 삼았다. p.11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이해하고 가엾이 여기는 아사코, 쿨한 골드미스 하루코, 많은 남자들과의 관계를 가볍게 여기지만 현모양처를 꿈꾸는 이쿠코. 

처음 보는 신선한 캐릭터들은 아니다. 극단적으로 평가하자면 진부하기까지 한 캐릭터들인 '2번가 집'의 세 딸들 이야기지만 에쿠니 가오리라면 이 진부한 설정의 세 자매 이야기도 판타지로 만들어내며 특유의 감성으로 독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데 거침없다. 에쿠니 가오리의 이전 작품들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들과 그들에게 펼쳐진 상황들에 함께 서서히 빠져들고 이해하게 되었지만 이 소설에 마음을 뺏긴 건 분명 거침없는 모습이었다. 

 

 하루하루 가을이 사락사락 깊어지고 있다. 5센티미터 굽으로 마른 낙엽을 밟으면서 하루코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락사락 소리 나는 것은 마른 낙엽만이 아니다. 공기도, 가을에는 역시 사락사락하다. p. 193

 

그 유명한 『도쿄 타워』의 명대사 "사랑은 하는 게 아니라 빠져드는 거야."처럼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소설뿐만 아니라 산문, 에세이 역시 마찬가지다) 읽는 게 아니라 빠져드는 거다. 특유의 감성뿐만 아니라 문장들은 나를 좋아서 어쩔줄 모르게 한다. 이 또한 에쿠니 가오리의 판타지다. 책을 읽어나가는 순간의 현실은 습하고 눅눅한 장마철이었지만 에쿠니 가오리의 판타지 덕분에 책을 읽어나가는 내내 그리고 이 글을 써 내려가는 지금까지 내 주위 공기는 사락사락하다. 

 

 "널 보면, 내가 엄청 나이를 먹은 것처럼 느껴져." p.25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는 한국 독자들에게 에쿠니 가오리의 인기가 절정일 당시 출간된 작품이다. NHK에서 드라마로 방영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 탄탄한 고정 독자들을 거느린 작가의 명성을 생각하면 출간이 늦은 감이 있어 보인다. 20대 초반에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처음 만나고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감수성에 빠져든 걸 행운으로 여기는 나로서는 발표되는 신작들을 꾸준히 챙겨읽으며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 역시 하나의 즐거움이다. 내가 에쿠니 가오리를 처음 읽은 『반짝반짝 빛나는』부터 이번 신작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까지 에쿠니 가오리는 여전한 감성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데 그걸 읽는 나만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엄청 나이를 먹었다.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를 한창 에쿠니 가오리에 빠져 있었을 시기에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진부한 설정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아마 처음부터 거침없이 빠져들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이를 더 먹어 40대에 에쿠니 가오리를 읽으면 어떤 감성으로 읽게 될까 궁금해진다. 그때까지 사락사락해지는 공기의 느낌을 놓치지 않으며, 즐겁게 살아야지, 고민하지 말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