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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룰렛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6년 6월
평점 :
은희경은 겨울이다. 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벚꽃이 만발할 때도, 바스러지는 낙엽을 밟을 때도 은희경의 소설은 언제나 대책 없이 먹먹하게 하고 사무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근거 없이 생각의 저변에는 은희경은 겨울이라고 깔려있는데 이번에 신작 『중국식 룰렛』의 출간 소식이 들려오자 장마철이야말로 은희경이라는 생각이 느닷없이 밀려왔다. 비와 은희경이라니, 그야말로 완벽한 콜라보레이션이다. 계절 가지고 무슨 변덕이 죽 끓듯 하냐고 하신다면... 사실 은희경은 언제나 옳다는 말을 이리도 돌려가며 말하는 것이다.
김려령 작가의 『샹들리에』출간에 맞춰 진행했던 단편하게 책읽는당 서평단 반응이 좋았던 탓인지 뒤이어 발표하는 은희경 작가의 신작 소설집 『중국식 룰렛』도 단편하게 책읽는당 서평단을 모집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벤트였다. 지난번에 당첨됐으니 이번엔 안될 수도 있겠다고 서평단 발표도 전에 반체념 상태였지만 당첨 소식이 들려오자 기쁨을 숨길 수 없었다. 여섯 편의 수록 단편 중 어떤 작품을 샘플북으로 먼저 만나보게 될지 설레임으로 기다리는 일은 앞서 이미 경험해본 일임에도 익숙해지지 않아 촌스럽게 또 설레고 말았다. 다행히 이번엔 배송사고 없이 빠르게 책이 전달되었고 나에게 온 샘플북은 「장미의 왕자」였다.
나 혼자 생각했었다. 얼어붙은 땅 깊이에서 뒤척이는 눈먼 씨앗일 뿐이지만, 언젠가 당신이 내게서 꽃 피울 봄날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면, 그건 영원한 겨울과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괜스레 긴 머리를 잘라버리고 입지 않을 운동복을 사고 지독한 몸살을 앓고 오전이 다 가기도 전에 세끼를 먹어치우고 한밤에 불쑥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한시간씩 골목을 쏘다니고, 그러고도 다음 날이면 약속된 시간에 배달된 우유처럼 내 마음이 단신의 문 앞에서 다소곳이 아침을 기다리고 있던 날들이, 대체 몇번이었는지. 나는 그 마음을 당신이 조금이나마 알아주시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로 알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라고 하는 함박눈이 미친 듯이 내려서 귀퉁이에 홀로 쌓여 있다가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 봄이 되어서야 당신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으면 한다.
더없이 감성적이고 더없이 추상적이다.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생생하다. 손바닥만 한 25페이지 작은 샘플북을 읽으면서도 부지런히 밑줄을 긋고 문장들 속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그리고 소설은 너무 빨리 끝난다. 역시 은희경이다. 장미를 옷깃에 꿰맨 채 아름답게 성장하는 왕자처럼 은희경의 작품들 역시 장미를 달고 있는 것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이다. 은희경의 넓고 깊은 작품세계에 장미가 울타리를 넘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아름다운 장미를 달고서 자신의 장미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토록 감성적이고 먹먹하게 그려내다니 장미를 잃어버린 나는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작품세계에 반하고 만다.
「장미의 왕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지만 이 소설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 인가에서부터 막히고 만다. 수첩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장미를 잃어버린 왕자의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수트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한 인간을 이야기한다. 한편의 단편소설이지만 그 안에 여려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는 소설집의 역할도 해내는 엄청난 작품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