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현기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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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이 계속되고 있다. 몸은 바쁘고 마음은 심란하고, 놓치거나 포기하게 되는 일들이 쌓여만 가고 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밑천이 드러나는 것 같고 분주함 속에서도 해낸 결과물들이 절대 만족스러울 리 없지만 그럼에도 부산을 떨어대는 일상의 연속이 나쁘지만은 않다. 아니, 나쁘지만은 않았었다. 도무지 독서를 할 시간이 나지 않을 정도로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음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조급해지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쁘지만은 않은' 상태였다. 없는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독서는 해야 한다고 나 자신을 설득시키던 즈음 들려왔던 신간 소식은 14년 만에 산문집을 발표한 현기영 작가의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였다. 산문집 제목을 확인하던 그 순간부터 '나쁘지만은 않다'라는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어디선가 비슷한 말을 들어봤음직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라는 제목이 부산을 떨어대던 나를 강하게 깨우쳤고 그런 이유로 나는 그 제목의 책을 반드시 읽어야만 했다.

 

노년의 작가가 늙어감을 이야기한다. 바쁜 일상에서 지나치고 말아버리는 감정과 주변의 것들을 현기영 작가는 더없이 세심하게 살펴보고 증언한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듯한 낯익어 보였던 제목과는 달리 본문의 내용들은 어디서도 보지 못 했던 현기영 작가 특유의 필체로 오랫동안 살펴보게 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너무나도 좋았고 너무나도 귀했다. 노년의 남성 작가의 산문으로 작가와 정서적으로 교감을 할 수 있었던 건 더할 나위 없이 귀한 경험이었다. 

 

제주에서 태어난 작가가 끊임없이 제주 4・3사건을 증언하고 강정마을 사태에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 부분들을 읽을 땐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라는 산문집의 제목을 처음 접했던 순간에 이어 다시금 나를 강하게 깨우치는 경험을 선사해주기도 했다. 분주하고 부산스럽게 보내는 일상이 나쁘지는 않았었지만 그렇게 늙어서는 절대 안 될 일이라는 것이 첫 번째 깨우침이었다면 나도 무언가에 대해 끊임없이 증언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는 것이 두 번째 깨우침이었다. 그렇게 늙어가기 위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아름다운 것들은 부서지기 쉽다. 맹목의 질주 뒤로 아름다운 것들이 수없이 부서져 버려지고 있다. 과거 속에 버려진 아름다운 것들을 복원해내야 한다. 부당하게 폐기된 아름다움과 의미들을 해명해내는 일을 문학이 감당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살려 천박한 현재를 순화시키는 길일 것이다. p.248

 

아름드리 해묵은 나무를 한 단어로 축약한 노거수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견해를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는데 수많은 연륜이 형성해놓은 노거수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처럼 『소설가는 늙지 않는다』의 산문들 역시 현기영 작가의 수많은 연륜이 형성해놓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글들의 모음이었다. 늙어간다는 증거여도 좋으니 많은 것을 놓치고 혹은 지나치고 살아가고 있는 바쁜 일상 속에서 처음 발견하거나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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