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낡지만 으리으리한 서양풍 주택에는 3세대의 야나기시마 일가가 살고 있다. 할머니는 러시아 사람이고 외삼촌과 이모도 함께 살고 있으며 교육은 가정에서 한다는 방침 아래 대대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 교육을 철저하게 받게 하고 있다. 네 아이 중 두 명이 엄마나 아빠가 다르지만 그건 비밀이 아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신간 소설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은 1960년 가을부터 2006년 늦가을까지의 야나기시마 일가의 평범한 일상을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감성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소설은 1982년 가을 리쿠코, 고이치, 우즈키 삼 남매가 가정 학습이라는 집안 전통을 깨고 초등학교에 진학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지금껏 다른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상상도 안 해봤던 삼 남매의 학교생활은 3개월 만에 끝이 나고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간다. 그리고 소설은 자주 화자와 시대와 계절이 바뀌고 가끔 대저택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가족 탄생의 순간을, 방랑하는 유학 시절을, 짧았던 결혼 생활을, 가정학습이 아닌 사회 견학의 순간을 펼쳐낸다. 야나기시마 일가의 일상에 커다란 은행나무와 등나무, 울타리의 천리향은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지만 엄마가 리쿠코의 임신 사실을 제일 먼저 알린 강아지 보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 아빠와 외삼촌 이모에게 추억이 되었다. 그렇게 4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엾은 알렉세이에프와 비참한 니진스키의 후예들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기기도 하고 옹고집 할아버지 다케지로 씨는 작은 담배합 속에 조용히 머무르는 등의 소소한 변화를 맞이하지만 리쿠코와 우즈키는  성년이 되어도 여전히 별나고 곰살맞고 기리 외삼촌은 조카의 결혼식에서 여전히 기발한 모습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또한 야나기시마 일가 가족이 아닌 주변인이 화자로 등장하여 가족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은 지금까지 봐왔던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과는 조금 다르다. 『언제나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나 『수박 향기』처럼 같은 또래의 이야기들을 단편으로 묶은 것과는 다르게 시간과 공간을 순서 없이 넘나들며 평범한 줄 알았던 야나기시마 일가의 46년의 세월을 3세대에 걸쳐 58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두께의 장편소설로 펼쳐내 독자들을 압도시킨다. 안 찾아보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술이나 차, 서양과자에 대한 특별한 묘사도 없고(매운 보드카는 예외다) 10년 넘게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부지런히 접하며 나에게도 전염된 비 내리는 풍경이나 반신욕의 풍경도 없다. 마치 이모의 시선으로 사 남매의 어린 시절을 읽다가 어느새 나보다 더 어른이 된 주인공들을 만나는 구성은 이전에 보지 못 했던 방식이다.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의 감성은 여전해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묻어나는 쓸쓸함이 쌓여 대책 없이 공허해지고 만다.

어떤 이유로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접할 때면 나는 약간의 허영심을 가지고 독서를 해나갔다.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서, 햇빛 잘 드는 도서관의 창가에서, 티포트와 특별한 과자나 빵을 완벽히 구비해놓고 그녀의 소설과 에세이 동화를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는 게 나만의 에쿠니 가오리를 읽는 방식이었다. 전에 없던 두께로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을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끝까지 다 읽지는 못했지만 언제 어디서나 내가 책을 읽는 곳은 낡지만 으리으리한 서양식 대저택의 도서실이 되어주었다. 2대에 걸쳐 가정 교사가 되어 주었던 노무라 씨는 "지금 이 순간도 역사의 일부란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고이치는 혼자 행동하길 좋아하게 되었고, 노조미는 친구들과 나다니게 되는 등 주인공들의 소소한 변화도 역사의 일부였듯 에쿠니 가오리의 이전 작품들에서 신작 『포옹 혹은 라이스에는 소금을』발표까지 어떻게 점들이 세로로 연결되고 가로로 흘러가 앞으로는 어떤 후속을 발표하고 어떤 역사를 써 내려갈지 또 다른 변화를 기대하게 된다. "라이스에는 소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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