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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평점 :

2015년 7월 14일 하퍼 리의 새 소설 『파수꾼』이 10개국에서 동시 출간됐다. 1960년 『앵무새 죽이기』출간 이후 무려 55년 만이다. 『앵무새 죽이기』와 같은 주인공과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시대적 배경은 20년 정도 늦다. 멜빵바지를 입는 말괄량이 소녀 스카웃 핀치는 어느새 숙녀로 자랐다. 『앵무새 죽이기』보다 뒤에 출간되고 주인공이 성장해있어 『파수꾼』이 『앵무새 죽이기』의 후속편으로 평가받지만 사실은 『앵무새 죽이기』보다 먼저 쓰였으며 오랜 세월 숨겨왔던 작품이다. 『앵무새 죽이기』의 전작이자 후속작. 하퍼 리의 최초의 작품이자 최후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파수꾼』은 하퍼 리의 변호사가 하퍼 리의 안전 금고를 조사하다가 원고를 발견하여 출간에 이르렀다고 하니 출간 전 존재를 알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편의 소설 같았다.
오랜 시간 작가의 안전 금고에 있다 빛을 보게된 『파수꾼』은 마치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남자 주인공 팀이 옷장을 통해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이 금고를 통해서 시간여행을 하고 온 것 같다. 스물여섯 살의 진 루이즈 핀치에게 메이콤은 더 이상 거주지가 아닌 휴가철 귀향하는 장소가 되었고 휴가를 온 그녀의 곁에는 젬과 딜이 아닌 헨리가 있다. 그녀가 유년시절을 보낸 집은 이제 현대식 아이스크림 가게가 되어 있고 몇몇 상황과 과거에 대한 그녀의 회상은 독자들이 기억하는 『앵무새 죽이기』와는 다르다. 『앵무새 죽이기』이후로 이어지는 진 루이즈 핀치의 성장기인가 싶었는데 그녀를 둘러싼 주변의 상황들이 미묘하게 다르다.
메이콤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은 뉴욕에서 사는 스물여섯의 진 루이즈 핀치는 휴가를 보내려 일 년 만에 메이콤에 왔다. 책의 표지처럼 숙녀로 잘 자라주었지만 그림자는 여전히 멜빵바지를 입은 개구쟁이 소녀인 것처럼 진심으로 신뢰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가지게 된 양심을 자신의 내면에서 잘 지켜왔다. 그런 그녀는 메이콤의 변화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마주하게 된다. 메이콤 주민 협의회가 도대체 무엇인가. 인종 차별을 보존하는데 풀타임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그녀가 알던, 그녀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맞나. 진 루이즈와 독자는 함께 경악하고 실망감을 안고 만다.
오랜 시간 금고에 보관되었던 원고의 존재만으로 초미의 관심사였던 『파수꾼』은 출판 이후에도 반응이 뜨거웠다. 『앵무새 죽이기』의 인기와 명성을 잇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는가 하면 바로 그 『앵무새 죽이기』의 인기와 명성 때문에 우려와 염려가 크기도 했다. 소설이 출간된 후 반응은 전자에 비해 후자가 더 뜨거운 것 같다. 헨리는 "세상에는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 많은 법이야."라고 말한다. 등장인물들이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독자들이 원하지 않아도 대면하게 되는 『파수꾼』에서 보여주는 메이콤의 풍경이 독자들이 기대하고 원했던 모습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앵무새 죽이기』에 대한 좋은 기억만 가지고 『파수꾼』을 읽지 않는 게 더 나은 걸까? 나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네버랜드란 있지도 않는 장소가 되지만 누군가는 가슴속에 네버랜드를 품고 살기도 하니 말이다.
박완서 작가는 에세이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책으로 젊은 피를 수혈할 수도 있다고 믿는 한 나는 늙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파수꾼』의 출간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책을 읽기도 전 이미 젊은 피를 수혈 받은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열린책들에서 새로운 판형으로 낸 『앵무새 죽이기』를 기다리고 다시 읽어보고, 『파수꾼』의 출간을 기다리고 읽는 즐거움의 경험은 『해리 포터』시리즈의 완결 이후 오랜만이었다. 『해리 포터』는 영국, 미국 등 영어권 국가의 출간 이후 한국어 출간까지 두어 달의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영문판을 먼저 읽은 사람들이 던지는 짓궂은 결말의 스포일러를 피해야 했지만 『파수꾼』은 전 세계 동시 출간에 발맞춰주는 친절함까지 선보여줬으니 최상의 조건의 수혈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여름이 길어도 2015년의 높은 불쾌지수와 열대야, 폭염은 금방 잊혀지겠지만 2015년 7월의 특별했던 『앵무새 죽이기』와 『파수꾼』의 독서는 오래 기억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