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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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때가 있었다. 인터넷이 보급화되기 전 집집마다 신문을 구독해서 읽고 동네마다 서점이 있었던 시절이. 매달 말이 되면 다음 달 월간 학습지를 사러 들렀던 동네서점 입구에선 앵무새 죽이기란 책이 오랫동안 진열되어 있었고 학습지를 사고 나서는 어린 내가 나중에 크면 앵무새 죽이기란 책을 챙겨보리라 다짐을 했던 때가 있었다.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을 만큼 나는 컸고 그사이 앵무새 죽이기는 베스트셀러를 넘어선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문학소녀 시절을 보내지 못했고 뒤늦게 본격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도 어쩐지 나는 앵무새 죽이기 읽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내가 내가 처음 본 작게 소녀가 그려진 표지가 아니라 큰 앵무새가 그려져 있는 표지의 앵무새 죽이기를 읽은 건 20대가 중반을 넘어설 무렵이었다. 

열린책들에서 새로운 판형과 새로운 번역으로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가 나왔다. 채 10년이 되지는 않았지만 앵무새 죽이기』를 처음 읽고 열린책들에서 나온 앵무새 죽이기』로 두 번째 독서를 하는 사이 내 나이는 앞자리 수가 바뀌었다. 첫 번째 앵무새 죽이기』독서 이후 엄청난 내면의 성숙이 이루어져 있길 기대하며 새 판형, 새 번역의 앵무새 죽이기』를 마치 처음 만나는 것처럼 읽어나갔다.

 

1930년대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 메이콤에는 스카웃이라 불리는 진 루이즈 핀치가 아버지와 오빠, 부엌에서 일하는 캘퍼니아 아줌마와 함께 살고 있다. 여름이면 레이철 이모 댁에 들리는 허풍쟁이 친구 딜 해리스가 있고,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악령 같은 존재인 이웃 아저씨 부 래들리가 있고, 오빠와 자신의 행동거지에 가혹하게 심문하고 악담을 해대는 듀보스 할머니가 있고, 늘 자신에게 숙녀가 되라고 종용하는 알렉산드라 고모가 있다. 그리고 래들리 집 마당 끝 떡갈나무 옹이구멍에서는 껌, 인디언 얼굴을 새긴 동전 두 닢, 회색 털실 공, 비누를 깎아 만든 작은 조각 두 개, 빛바랜 메달, 고장 난 회중시계가 꽂혀 있었다. 이 작은 마을 메이콤은 스카웃이 아는 세상의 전부다. 어느 날 아빠가 흑인의 변호를 맡았다고 온 동네가 아빠를 비난한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이 무엇인가 여전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동안 스카웃은 부쩍 성장해있다. 히틀러를 비난하던 선생님이 박해는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나오는 거라고 가르쳐 주지만 그 선생님 마저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걸 이제 스카웃은 안다.

 

스카웃 주변에 몇 안되는 성숙된 어른인 모디 아줌마는 재판 이후 풀이 죽어있는 스카웃에게 "우리는 지금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거야. 아기 걸음마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진일보임에는 틀림없어."라고 위로한다. 하퍼 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희망적으로 모디 아줌마를 통해 이야기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미국 사회는, 세계는 몇 걸음 진일보를 해나갔을까. 인종차별 문제만 나오면 앵무새 죽이기』가 회자되고 앵무새 죽이기』가 이야기되면 인종차별 문제가 거론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하퍼 리가 앵무새 죽이기』를 통해 인종차별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1960년 앵무새 죽이기』가 출간된지도 55년이 지났지만 인종차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여전히 어디에도 없다. 미국 퍼거슨 사태가 일어난 지 일 년도 안됐다. 그래서 책보다 현실이 훨씬 더 비극으로 느껴진다. 

인종차별은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라 그런가 1930년대 미국 남부 지방의 흑인 노예 이야기는 여전히 대중들이 사랑하는 문화산업의 소재다. 이를 깊은 뿌리로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는 건 역시 앵무새 죽이기』가 아닐까 한다. 몇 년 전 캐서린 스토킷의 헬프』를 읽고,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 영화를 보며 스카웃이 그대로 잘 자라주었다면 스키터같은 어른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상상하기도 했었다.

 

나에겐 책을 읽고 난 후 '이 책을 10대 시절에 처음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던 책이 두 권 있는데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난 후 그랬고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읽고 난 후가 그랬다. 성장소설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두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음에도 뒤늦게 만났다는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해야 할 공부가 많은 만큼 주위에 놀 거리도 많은 10대들이 꼭 10대 시절에 이 책만큼은 읽었으면 좋겠다. 엄청난 책의 두께와 열린책들 특유의 빽빽한(?) 줄 간격에 겁을 먹고 책을 집어 들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좋은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적절한 시기에 좋은 책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아는 주위 어른들의 가르침과 추천이 끊임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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