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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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몸에서 싹이 자라고 자꾸 어떤 남자애 환영이 보여."

'브로멜리아드' 화원을 운영하는 유지 이모(이하 지모)와 살며 평범한 고등학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인에게 친구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들이 늘어가고 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식물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손톱 끝에선 새싹이 돋아나는가 하면 환영처럼 보이는 하승택이라는 소년이 나타나서는 자신과 나인은 태어난 게 아니라 피어난 존재 '누브'라고 말한다. 자신이 이상해진 것 같아 혼란스러웠는데 지모는 진작 말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나인은 갑작스러운 변화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만으로 충분히 복잡한 상태인데 식물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능력 덕분에 2년 전 실종된 선배 박원우 사건에 대한 전말을 알게 되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추적이 더해진다.

 

 그럼 인간들도 그 사실을 알아?

 모를걸?

 왜?

 다들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꽁꽁 숨기고 있으니까.

 그럼 지모는 외계인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 

 우리는 그냥 딱 보면 알아. 아, 쟤도 바깥에서 왔구나. 신호등이 깜빡일 때 걷지 않는 사람들 있잖아. 버스를 탈 때 노인이나 아이를 위해 한발 양보하거나 지하철에서 사람이 다 내려야만 타는 사람. 이상하리만치 느긋하게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외계인이야.

 왜? 

 인간들이 정해 둔 규칙을 지키는 거지. 외부인이니까.

 그날 지모의 말을 들으며 나인은 다짐했다. 세상에 외계인은 많다. 그러니까 괜히 심각해지지 말자. p.61-62

 

진실은 무겁다. 뒤늦게 깨달은 진실은 더더욱 무섭다.

『천 개의 파랑』으로 문학계에 화려한 등장을 했던 천선란 작가의 신작을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창비 K-영어덜트 장르인 소설Y 시리즈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식물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손톱 사이에 새싹이 돋아난다는 설정부터 특유의 사랑스러움과 넘치는 상상력에 여지없이 반하고 마는데 본격적으로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남다른 흡인력에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다. 나에게 이런 집중력이 있었나 놀랄 정도로 몰입하며 소설을 읽어갔다. 

 

 새벽에 돌아온 지모는 신발을 현관에 거칠게 벗어 던지며 방으로 들어갔다. 걸음걸이에 잔뜩 화가 묻어 있었다. 뒤척이느라 그때까지 잠들지 못했던 나인은 조용히 지모의 방문을 두드렸다. 지모가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다. 나인은 다짜고짜 지모를 끌어안았다. 지모는 왜 그러느냐고 묻다가, 얼굴 좀 보자고 하다가, 결국 두 팔로 나인의 어깨를 감쌌다.

 지모는 한참 동안 나인을 끌어안고 있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도 그랬어." p.174-175

 

그 확신은 이제 '하다 안 되면 그만'이라는 무책임한 생각에서 '반드시', '기필코', '해내야만 하는'이라는 수식어가 가득한 현실로 나인을 이끌었다.                                                                                                                                                                                                                                                                                                                                                                                                                                

풍부한 상상력과 따뜻한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나인』엔 천선란 작가의 섬세함과 따뜻함이 진하게 펼쳐진다. 영어덜트 소설로, 페이지 터너로 책장 넘어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확실한 재미를 보장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박원우 실종사건을 통해 학교 폭력을, 나인과 지모의 정체와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우리 사회에 당연한 듯 만연해있는 편견과 차별의 시선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미혼의 이모가 혼자 조카를 보살피는 보습을 주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지모와 나인은 서로에게 완벽한 가족 구성원이다(미래네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정작 우리 사회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형태의 권도현네 같은 경우 도현은 자신의 부모를 부모가 아닌 양육자로 부른다. 틀린 게 아닌 다른 것들을 다양한 시선과 형태로 보여주면서 그 모습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한국 문학사에 유일무이한 '에코 스릴러'답게 환경 문제에 관한 문제의식도 작정하고 다뤄주는데 이런 작품이, 이런 작품을 다루는 작가의 존재가 너무나도 귀하게 느껴진다.

 

 "금옥아, 나는 나인이야. 아홉 개의 새싹 중에 가장 늦게 핀 마지막 싹이라 나인이 됐어. 더는 생명이 태어날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나는 가장 마지막에 눈을 떴어."

 그러니까 나인은, 기적이라는 뜻이야.  

 

"외계인 같은 거 세상에 정말 있다고요."

『나인』은 아름다운 계절에 읽은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절대 놓쳐서는 안될 한 권의 책을 꼽는다면 무조건 천선란의 『나인』이라고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천선란 작가는 작년과 올해 『천 개의 파랑』과 『나인』으로 한국문학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되었지만 천선란 작가가 앞으로 더 보여줄 세계는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훨씬 무궁무진할 거란 확신이 있기 때문에 벌써 어떤 작가로 단정 지어 이야기하기엔 조심스럽다. 소설Y 시리즈 역시 마찬가지다. 이희영 작가의 『나나』, 천선란 작가의 『나인』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확실히 사로잡았지만 앞으로 출간될 작품과 작가에 대한 기대를 끝없이 키워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천선란 작가의 작품은 좀 특이하다. 별나기도 하고. 합쳐서 특별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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