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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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부와 큰 딸, 가정폭력을 피해 어린아이 둘과 돌아온 작은 딸이 오래된 목련 빌라에 함께 살고 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각자의 분담은 확실해졌다. 다른 가족들이 일을 하러 간 사이 집안일과 두 조카의 양육은 화자인 큰 딸 나의 몫이다. 고단한 하루를 겨우 견디며 살고 있는 나에게 유일하게 나에게 집중하고 나로 살 수 있는 시간은 늦은 밤 시를 읽고 필사하는 시간이다. 

 "언니는 글을 쓰고 싶은 거지?"

 순간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다. 마치 거짓말을 하다 들킨 것처럼 창피한 마음이 드는 한편, 몰래 착한 일을 한 것이 드러나 이제야 칭찬받는 것마냥 쑥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아니라고 숨기고 싶다가도, 알아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 남에서 자라고 있는 걸 밝혔다. 티끌보다 더 작은 것이 간신히 뿌리를 내리고, 안간힘으로 중력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쳐든 연하디연한 작은 싹과 같은 나의 희망에 대해서.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말했다. 무슨 글을 쓰고 싶으냐고 물어본 것도 동생이 처음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동생은 참을성 있게 내 대답을 기다려줬다. 나는 간신히 입을 벌려 발음했다.

 "시."

 그 순간, 마음속에서 자라나던 그 창백한 연두색 싹이 불쑥 커 올라 이파리를 막 뻗치는 기분이 들었다. 활짝 펼쳐진 잎들은 앞다퉈 반짝였다. 이런 가분을 언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나는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p.63-64

<소설, 향> 시리즈 세 번째  소설인 김이설 작가의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엔 인생을 유독 힘들고 가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내 펼쳐진다. 집안일과 조카들의 양육을 혼자 짊어진 시인 지망생 화자에게 그녀의 삶과 시는 그야말로 완벽한 짝사랑이고  '필사의 밤'은 필사적인 밤이다. 삶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며 질풍노도의 시기를 관통하는 2,30대 인물들이라면 어느 정도 익숙함을 느끼고 있는 독자들에게 김이설 작가는 혼자 가사와 돌봄 노동의 짐을 짊어진 40대 미혼 여성에게 부여하여 기시감과 미시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거대한 서사 없이 잔잔하게 펼쳐지는 200페이지 내외의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공허의 감정이 언제 와서 이렇게나 쌓였는지 모를 일이다.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주저앉지 마. 엄마가 하란 대로 하지도 말고.

 그러곤 뚝, 통화가 끊겼다.

 피지 못한 꽃, 이라는 말을 들은 날에도 나는 시를 쓰지 못했다. 필사 노트만 두꺼워지고 있었다. 낙선자로만 평생을 살아가면 어쩌나 싶은 마음.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 되어, 패배자가 되어, 이대로 무용한 인간이 돼버리면 어떡하나 매일 두려웠다. 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연둣빛 싹이라도 될 수 있다면, 아니 새하얀 뿌리 한 쪽 될 수 있다면. p.117

지금까지 발표된 <소설, 향> 시리즈의 소설들(김사과 『0 영 ZERO 零』, 윤이형 『붕대 감기』)과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역시 단단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준다. 주인공에 대한 공감도가 남달랐지만 무엇보다 상투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집안일을 저평가 하는 엄마, 가족 중 유일하게 주인공을 걱정하고 알아주는 아빠 캐릭터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부모님의 모습이었고 주인공의 감정을 너무나 잘 알고 이해했지만 그래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조금도 예측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짐작 가능했던 여자들의 연대 부재-그럼에도 혼자 일어서는-가 좋았다. 소설의 주인공은 누구보다 성실해도 더디고 느려 뒤처지는, 실력이 꿈을 못 따라가는 사람이었지만 김이설의 문장들은 너무나 시적이었다. 곳곳의 문장들을 따라 써보고 싶게 만들었다. 이 소설에서 '필사'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그깟 집안일이라고 하지 마. 나는 이 악물고 했던 일들이야." p.160 

소설만큼 구병모 소설가의 추천사도 무척이나 좋았다. 습작 시절 썼던 작품들을 아직까지 상자에 보관해 간직하고 있다는 구병모 작가의 일화와 창작 노트와 필사 노트가 라면 박스로 족히 일곱 개는 되는 소설 속 화자의 모습이 닮아 보여 재밌기도 했고 『네 이웃의 식탁』,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과 같은 소설을 쓰며 목소리는 내는 작가들이 한국 문단에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고맙고 든든한데 소설 너머에서 서로 응원하고 연대하는 모습은 그 어떤 소설이나 영화보다 감동적이었다. 또한 <소설, 향> 시리즈에 대한 충성심과 기대감이 더불어 커지기도 했는데 지금까지 발표된 세 권의 책과 출간 예정 리스트만 봐도 든든하다. 그러니 여러분, 책장에 <소설, 향> 시리즈 자리를 확보해 두세요.

* 작가정신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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