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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사나이 ㅣ 문지 스펙트럼
E.T.A. 호프만 지음, 김현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평점 :

2018년 11월, 작고 심플한 디자인과 장정, 군더더기 없는 시리즈의 구성 변화로 1차분 5권의 리뉴얼된 책을 출간하며 수많은 독자들의 눈도장을 제대로 찍고 마음을 설레게 했던 "작지만 확실한 고전"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가 드디어 1년 반만에 2차분 5권의 책을 출간했다. 1차분 출간 당시 출간 예정을 알린 작품 리스트도 많았고 독자들의 반응도 좋았던 터라 이어지는 시리즈의 출간이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라 예상했었지만 2차분 출간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2차분 출간 소식은 남달리 반가움이 컸는데 출간된 작품 리스트와 작가진, 눈길을 사로잡는 표지에서 문학과지성사의 제작, 편집의 고심이 곳곳에서 엿보이며 기대감을 키워줬다.

사뮈엘 베케트의 『첫사랑』,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모자』,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꿈의 노벨레』, E.T.A.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 제라르 드 네르발의 『실비/오렐리아』로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 2차분이 출간됐다. 2차분으로 출간된 5편의 작품이 다 반갑고 궁금했지만 가장 눈길을 사로잡았던 작품은 단연 E.T.A.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였다. E.T.A. 호프만의 작품세계가 예전부터 궁금했었는데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에 『모래 사나이』가 포함되어 있어 반가웠고 기존 문지스펙트럼에서 발표됐던 『모래 사나이』와 180도 달라진 표지 디자인은 작품에 대한 호기심을 제대로 건드려 주었기 때문이다. 기존 『모래 사나이』 표지 이미지는 마치 <엑스맨> 시리지의 비스트를 연상시키는 야성미가 제일 먼저 들어왔는데 이번에 리뉴얼된 표지의 스노우볼은 E.T.A 호프만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환상을 잘 드러낸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모래 사나이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에요?"
"나타나엘, 아직 그것도 모르니? 그는 아주 나쁜 사람인데 자러 가지 않으려는 아이들에게 와서 눈에 모래를 한 줌 뿌린단다. 눈알이 피투성이가 되어 튀어나오면 모래 사나이는 그 눈알을 자루에 넣어서 자기 아이들에게 먹이려고 달나라로 돌아가지. 그의 아이들은 둥지에 사는데 올빼미처럼 끝이 구부러진 부리로 말 안 듣는 아이들의 눈을 쪼아 먹는단다"하고 말했어. 그래서 내 마음속에는 잔인한 모래 사나이가 소름 끼치는 모습으로 그려졌지. 밤에 층계를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리며 "모래 사나이야! 모래 사나이야!"하고 더듬거리며 소리쳤어. 어머니는 내게서 그 말밖에 들을 수 없었지. 나는 곧 침실로 뛰어갔지만 모래 사나이의 끔찍한 모습이 밤새도록 나를 괴롭혔어. 유모가 들려준 모래 사나이나 달나라에 있는 그의 아이들의 둥지에 대한 이야기를 믿지 않을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도 모래 사나이는 여전히 내게 무서운 유령으로 남았고, 그가 층계를 올라가는 소리나 아버지의 방문을 세차게 열고 들어서는 소리가 들리면 경악과 공포에 사로잡혔어. p.12-13 「모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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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로지 그녀만을 생각하며 살았어, 다른 모든 것엔 아무 관심도 없었고,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으며, 공부도 등한히 했어. 그러자 고통도 어느 정도 누그러지고 그녀에 대한 동경 또한 몽상적이 되어, 상상 속 그녀의 모습은 예전과 달리 생기나 힘을 잃는 것 같았어. 하지만 이따금 어떤 순간에는 너무 심할 정도로 괴로워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몹시 겁이 나. 나를 파멸시킬 수도 있었을 어떤 정신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믿지 못하더라도 조소하거나 조롱하지 말고 내가 겪은 고통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듣고 느껴봐. p.95 「적막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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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피네, 아 세라피네!"
그래서 할아버지가 깨어나 나를 불렀다.
"얘야! 아우야! 너는 상상을 머릿속으로 하지 않고 너무 큰 소리로 하는 것 같구나! 가능하면 낮에 하고 밤에는 잠 좀 자게 조용히 해라!"
할아버지는 남작 부인이 왔을 때부터 내가 흥분한 것을 이미 눈치챘고, 이제 내가 남작 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까지 들었으니 신랄한 조소를 퍼붓지 않을까 적이 걱정했지만 다음 날 아침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법률 사무실에 들어가면서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하느님은 모든 올바른 사람에게 이성을 주시고 이성을 지키도록 신중함을 주신다. 그렇게 간단하게 비겁한 사람으로 변하는 건 나쁜 일이다." p.150 「장자 상속」
『모래 사나이』에 수록된 3편의 단편 「모래 사나이」, 「적막한 집」, 「장자 상속」을 통해 E.T.A. 호프만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통과했다. 인간의 광기, 공포, 집착에 대한 집요한 묘사 속에서 그의 작품 세계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환상을 체험하며 작품과 작품세계에 빠져든다. 환상의 힘, 어떤 미지의 힘에 이끌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사랑(사랑이라 쓰고 광기, 집착이라 읽자)에 대책 없이 빠져버리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미친 몽상가 취급을 받는 주인공들의 충동과 광기, 불안의 모습과 긴장을 이끌어가는 이야기 방식이 팀 버튼의 영화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음산한 분위기가 닮아 있어 이 작품들을 원작으로 팀 버튼이 영화화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작품을 읽어가는 동안 종종 들었다. 세 편의 단편 속에서 인물들의 심리, 작품의 분위기, 인물들을 집착, 공포에 빠트리는 마술적인 존재들의 장치(「모래 사나이」의 망원경, 「적막한 집」의 거울, 「장자 상속」의 초반의 피아노와 후반의 상속)이 닮아 있으면서도 다르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흥미롭다. 우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혼돈에 빠지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모습은 어느새 독자에게 전염시키지만 작품의 매력은 분명하고 뚜렷하다.

아무런 장식 없이 반짝이 가루만 풍성하게 움직이는 듯한 스노우볼 표지 이미지는 E.T.A.호프만의 작품세계를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책을 읽기 전에는 단순히 표지가 예뻐 보이기만 했는데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작품을 곱씹게 하는 하는 힘을 가져 계속해서 음미하게 만든다.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 1차분의 만족스러운 경험 덕분에 앞으로 발표될 작품들에 대한 기대치가 높을 수밖에 없었는데 높은 기대치를 충족시키며 앞으로 출간될 작품들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심어주었다. 지금까지 출간된 10권의 목록과 앞으로 출간 예고를 알리는 8권의 목록은 믿고 읽는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에 대한 든든함을 잘 보여준다. 문학과지성사만 믿으며 출간하는 명작을 따라 읽기만 하면 된다. 깔끔한 장정과 디자인, 신뢰감을 전해주는 명작들의 목록, 좋은 작품을 더 좋게 하고 독서의 쾌감을 끌어올려주는 옮긴이의 말까지 모든 요소가 다 좋았다. 유일한 흠이 있다면 너무나 긴 출간 간격일 테니 부디 빠른 시간 내에 3차분 출간을 만날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