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씨 허니컷 구하기
베스 호프먼 지음, 윤미나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세실리아 로즈 허니컷이에요. 저는 튤립우드 애비뉴 831번지에 살고 있어요. 라디오 설교에서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구하면 응답을 받을 거라고 하셨어요. 설교에서는 아무튼 간단한 일이래요. 그래서 저도 간구하는 중이에요. 우리 엄마를 구해줄 수 있으세요? 엄마 마음이 뭔가 잘못돼서 점점 나빠지고 있어요. 그리고 제 간구를 들어주시는 김에 저도 좀 구해주시겠어요? 저의 마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제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도움이 좀 필요해요. 하라는 대로 뭐든지 할게요. 감사합니다. 아멘." p.30


"어떻게 나한테 친구가 있겠어요? 엄마가 하는 짓을 봐요."

과거의 영광스러운 순간(1951 비데일리아 양파 여왕)에 갇혀 망상에 빠져 사는 엄마. 정신증에 걸린 엄마의 보호자가 되어 엄마가 느끼지 못하는 수치심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열두 살 세실리아 로즈 허니컷(이하 씨씨). 엄마와 씨씨가 힘들 때 엄마의 병을 무시하고 곁에 없는 아빠. 월러비(북부)에서 옆집 오델 할머니만이 씨씨의 유일한 친구다. 어느 날 교통사고로 엄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씨씨는 존재도 몰랐던 서배너(남부)에 사는 친척 털룰라 콜드웰 할머니(이하 투티)에게 보내진다. 정신이 나간 엄마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웃음거리가 되고 외톨이였던 월러비에서의 생활과 달리 서배너에서는 모두가 자신에게 친절하고 따뜻하다. 마치 빨강 머리 앤이 초록색 지붕집에 살게 되며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던 씨씨의 인생 역시 서배너에서 새로운 막이 오르게 된다. 


 "남자친구에요?"

 부인이 짧게 웃었다. "오, 벅이랑 있으면 무척 즐겁지만 남자친구라고 할 수는 없어. 정말이지 그 남자는 방울뱀을 홀려서 송곳니를 뽑아낼 수도 있을 거야. 한번은 벅의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내가 알아챘어. 난 굉장히 화가 나서 다시는 안 보겠다고 했는데, 글쎄, 늘 쓰고 다니는 커다란 모자 그늘 아래로 나를 보며 말하더구나. "델마 레이, 이리 와. 나한테 화내지 마. 거짓말할 생각은 없었어. 난 그냥 기억력이 좀 나쁠 뿐이야."

 굿페퍼 부인과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최근에 내가 느낀 건," 굿페퍼 부인은 맨발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남자들이란 전부 하이힐을 신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야. 내가 예쁘다고 느끼게 해주는 건 좋지만, 밤에는 제발 꺼져줬으면 싶거든." p.341


나는 여자들이 다스리는 이상하고 향기로운 세상에 내던져졌다.

베스 호프먼의 『씨씨 허니컷 구하기』는 열두 살 소녀 씨씨의 시선으로 외톨이 소녀가 알을 깨고 세상을 향해 나오는 과정을 보여준다. 엄마와 아빠는 자신의 아픔이자 상처이자 콤플렉스인 소녀에게 새로운 가족과 이웃이 생기면서 방치되어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던 소녀 씨씨는 이제 온 마을이 키우는 본래 자기 나이에 맞는 어린아이가 된다. 익숙한 성장소설의 구조 속에서 조숙했던 소녀가 또래의 아이들처럼 자신의 나이를 찾아가는 모습이 신선하다. 서배너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씨씨에게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몇 가지 소동들과 개성 있고 생동감 있는 주변 인물들이 소설의 재미를 이어간다. '회전관람차 만큼이나 엄청난 긴장감' 같은 표현에서 열두 살 여자아이 특유의 명랑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인물들의 캐릭터와 소설의 장면들 속에서 떠오르는 성장소설과 성장영화가 많은데 특히 소설 초반 망가져가는 엄마를 보며 그런 엄마 옆에서 상처를 먹고 자라는 외톨이 모습은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마커스와 많이 닮아 있었다. 성장영화는 아니지만 씨씨가 서배너에서 목격하고 경험하는 여자들의 우정과 서배너에서 제일가는 부엌의 여신 올레타의 '천국의 맛' 시나몬롤을 비롯한 음식들의 묘사에서는 영화 <카모메 식당>이 떠오르기도 한다. 세상이 가혹한 외톨이 소녀의 성장기를 넘어 1960년대 후반 인종차별 문제를 건드리고 세대갈등, 지역갈등을 풀어가며 세대를 초월한 여자들의 우정을 진하게 그려내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봐라." 올레타는 나무와 하늘, 날아가는 새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기 인생이 있어. 움직이고 있는 게 보이니? 나뭇잎들도 움직이고 있어. 인생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아. 너처럼 특별한 아이라도 기다려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네가 큰맘먹고 인생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 돼." p.376


나 자신을 불쌍히 여겨봤자 아무 소용 없는 일이야. 인생은 그런 거야.

베스 호프먼의 『씨씨 허니컷 구하기』는 작가의 대표작으로 한국 독자에게 처음 소개되는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작가의 대표작이자 데뷔작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반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인터리어 디자인 스튜디오 대표로 판매중인 가구에 관한 '스토리 광고'를 쓴 것이 인기를 끌면서 본격적인 소설 집필로 이어졌고 그렇게 4년에 걸쳐 집필한 데뷔작 『씨씨 허니컷 구하기』가 출간 12일 만에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여러 나라에 판권이 팔렸다는 작가와 작품의 이력은 소설만큼이나 흥미롭다. 소설 바깥에서 작가가 작품과 인물들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가 궁금한데 작가의 말이 'special thanks to'로만 그치는 영미 출판계 문화는 많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다행히 그 아쉬움을 상쇄시킬 만큼 윤미나 번역가의 옮긴이의 말은 소설의 여운을 이어줬다.

성장소설의 감동과 입체적인 인물들의 매력, 예측을 불가능하게 이끌어가는 서사로 소설은 흡인력 있고 빠르게 읽히지만 작가의 문체가 좋아 밑줄을 긋게 되는 구절, 작가가 건드리는 사회문제들과 교훈을 따라 되짚으며 계속해서 소설을 곱씹어 보게 된다. 소설 초반 정신증에 걸린 엄마의 딸로 살아가는 씨씨의 모습과 감정묘사는 일일이 밑줄을 긋다가 포기를 할 정도였는데 언젠가 그 부분을 통째로 필사를 해보고 싶을 정도로 무척 좋았다. 많은 소녀들이 씨씨를 만나볼 필요가 있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자 멤버들을 꾸려 『씨씨 허니컷 구하기』로 독서모임을 가지며 책에 관한, 책을 읽어갔던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꽃을 피워보고 싶다. 맛있는 시나몬롤을 수배해서 멤버들과 나눠먹으며 따뜻한 이야기들을 끝없이 이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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