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시옷들 - 사랑, 삶 그리고 시 날마다 인문학 1
조이스 박 지음 / 포르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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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부터 하자면 나는 시를 읽지 못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항상 시가 어렵고 시에 대한 평론은 더 어렵다. 시를 읽을 줄 알고 쓰는 사람들은 따로 정해져 있다고 변명해보지만 터무니없이 근거가 빈약한 이 이론은 사실 말하는 나조차 납득이 힘들긴 하다. 덕분에 시를 즐겨 읽거나 시를 쓰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한한 부러움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결핍과 그로 인한 욕망을 제대로 건드려주는 책을 만났다. 




조이스 박의 『내가 사랑한 시옷들』은 영문학을 전공한 작가가 엄선한 세계 명시 30편을 원어와 작가의 번역, 작품에 대한 작가의 해석과 영시로 배우는 영어로 만나 시에 대한 감상과 해석은 물론이고 언어적 의미까지 이해하고 감성의 결을 확장시켜준다. 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지만 조이스 박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언어적 의미들이 그야말로 밀착형으로 읽히며 책이 흡인력 있게 읽히고 막힘이 없다. 시와 더불어 작가가 전해주는 영문학의 품격을 담아내고 하나씩 마음에 새기는 과정들이 마치 문학적 세례를 받은듯한 느낌이다. 평소 어려워하는 시를, 그것도 영미권 시에 대해 문학적으로, 언어적으로 다루는 책을 이렇게나 만족하고 좋아하게 될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때로는 가벼운 관계가 주는 편안함도 있는 법이다. 모든 사람에게 진심일 필요가 없고,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을 수도 없다. 다른 이들이 나의 죽음을 도와줄 수 없다는 구절에 가슴 아파할 이유도 없다. 죽음은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죽음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여정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만 이 풍부한 '가벼운 관계'에는 주의사항이 있다. 가벼운 관계는 필요해도, 가벼운 관계'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벼운 관계가 전부가 되면 세상은 거대한 양하로 변한다.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고갱이는 나오지 않고 끝이 나버리는 상태 말이다. 그러므로 가벼운 관계 속에서 웃고, 노래하고, 기뻐하고, 잔치를 열되 때로는 진지하고 고요하게 마주할 수 있는 진짜배기를 찾아야 한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받은 만큼 돌려주지 않더라도 서로에 대한 믿음 속 흔들리지 않는, 관계의 중심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진짜배기들로만 꽉찬 삶도 버겁기는 매한가지지만.

 삶에는 여기저기 빈틈이 있어야 한다. 인터넷 초기, 광대한 사이버 세계를 누비며 나는 이렇게 말하고 다녔었다. "I'm a little cyber fish, swimming through this vast sea of the Internet." "나는 이 광대한 인터넷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작은 사이버 물고기야."

 그렇다. 유유히 헤엄쳐 다니면 된다. 유선형의 존재로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게 두고 가끔 빛을 받아 비늘이 반짝이면 황금 비늘이 생겼다고 우기면서. 그러나 뭍으로 올라올 때가 되면 다시 사람의 다리로, 중력을 견디며 걸어야 할 땐 또 미쁘게 걸으면서. p.135-136


개인적으로 책의 저자 조이스 박 작가가 장영희 교수의 제자라는 이력이 흥미로웠는데 학창시절 故장왕록 교수가 집필한 영어 교과서로 공부를 했었고 대학생 때 故장영희 교수의 수필을 챙겨 읽었었는데 시간이 흘러 故장영희 교수의 제자 조이스 박 작가가 들려주는 영미권 시와 그에 관한 이야기에 푹 빠진 것이 뭔가 기념비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마인드맵을 그려가듯이, 족보를 써 내려가듯이 독서 목록에서 이 라인이 뻗어나가는 것 같아 좋았다.  


과거에 꿈이 많았던 시절 무수한 꿈들 속엔 시인이 의도한 대로 시를 읽어내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길, 좋아하는 작품이라면 원서로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길 바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그런 사람이 되진 못했다. 조이스 박의 『내가 사랑한 시옷들』은 그야말로 못다 이룬 과거의 꿈들을 대신 이뤄준 책과도 같았다. 책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가 기대 이상으로 높지만 그럼에도 사람, 사랑, 시를 다룬 시옷들의 이야기는 30편으로는 부족하다. 시옷 이외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 『내가 사랑한 시옷들』은 출판사 포르체에서 선보이는 새로운 시리즈 <날마다 인문학> 1권으로 출간돼 눈도장을 제대로 찍은 것은 물론이고 독자의 마음도 제대로 사로잡았다. 시리즈가 어떤 분야들을 두루 다루고 어떤 저자들이 독자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높여주게 될지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진다. 문학 장르가 대부분인 책장에 <날마다 인문학> 시리즈의 자리를 만들어 놔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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