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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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 로맨스'라는 생소한 장르만으로 이미 영업을 당했는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단순히 예쁜 것을 넘어 영롱해 보이는 표지 디자인에 일본의 유수한 문학상을 고루 수상한 작가의 이력까지 살펴보니 『사랑 없는 세계』는 당장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코로나로 오랜 시간 지치고 예민함이 가시지 않는 흉흉한 시기에 사랑이 없는 세계라니 제목만 봐서는 도무지 마음이 동하지 않지만 그 마음을 불식시켜주고 소설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내는 요소들이 넘치게 많은 책이었다.


 모토무라는 미칠 듯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식물의 수수께끼가 모두 밝혀지는 일은 결코 없으리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세포에 계속해서 시선을 빼앗기고야 만다. 이 마음을 아무리 애써 설명한다 한들 후지마루를 완전히 납득시킬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 모토무라는 그저 교제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p.125


인류 요리사를 꿈꾸는 후지마루는 음식 배달을 갔다가 식물 연구에 빠져 사는 모토무라를 만나 그녀에게 빠지게 된다. 하지만 모토무라는 사랑 없는 세계인 식물과 사랑에 빠져 후지마루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사랑의 라이벌이 사람이 아닌 식물이 되어버린 후지마루는 모토무라의 호감을 사기 위해 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그 역시 서서히 식물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입체적인 캐릭터들의 묘사와 흥미로운 식물이라는 소재와 짜임새 있는 소설의 스토리가 상호작용을 일으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이 식물들만큼이나 신선하고 새롭다. 후지마루가 모토무라를 향한 마음이 로맨스 소설인 것 같으면서 무수한 식물들의 소개와 묘사 방식은 식물학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속에서 성장해가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마치 성장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 또한 감동을 받고 마음을 다잡게 되니 자기개발서의 요소 또한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물을 계속 주길 잘했다. 내가 부질없이 기뻐하다가 의기소침해하는 동안에도 포인세타이아는 담담히, 그러나 열심히 살고 있었다. 모토무라는 말 없는 포인세티아에게서 용기를 얻고 고마운 마음에 초록 새싹에 살짝 손끝을 댔다.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언어도 없고, 기온이나 계절이라는 개념조차 없는데도, 식물은 정확히 봄을 알고 있다. 온도계나 일기장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건 초겨울의 따뜻한 날씨가 아니라 진짜 봄이다. 슬슬 여느 해와 같이 활발하게 생명 활동을 할 시기가 왔다'라고 판단하고 기억한다.

 반대로 인간은 외와 언어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는 건지도 모른다. 고뇌도 기쁨도 모두 뇌가 내놓은 것이고, 그것에 휘둘리는 것은 물론 인간이기에 맛볼 수 있는 묘미겠지만, 관점을 바꿔놓고 보면 인간은 뇌의 포로라고 할 수도 있다. 실은 화분의 식물보다도 더 좁은 범위에서밖에 세계를 인식할 수 없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물을 부러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외출 준비를 마친 모토무라는 방 한가운데에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나도 식물을 본받아서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판단과 행동을 하자. 이왕 달고 나온 뇌가 있으니까, 한계까지 생각하고 상상하기 위해 노력하자. 연구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도. p.352-353


소설이 어떤 방식으로 끝을 맺을까에 대한 호기심에 흡인력 있게 읽히기도 했지만 가장 크게 감탄한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식물에 대한 작가의 꼼꼼하고 방대한 자료조사가 소설의 호흡을 이끌어 간다는 점이었다. '식물학 로맨스'라는 생소한 장르를 독보적인 친숙함으로 개척해 엄청난 소설을 탄생시킨 미우라 시온의 다른 작품들을 궁금하게 하고 앞으로 발표할 작품들을 기대하게 하는 대목이다. 작가의 무수한 수상 이력에 대한 동의는 말할 것도 없다.


출판사 서평 이벤트로 가제본을 받아 본격적으로 책을 읽어가는 시간 내내 마치 따뜻한 온실 속에서 내가 자라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를 제대로 관통하고 온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보통 가제본은 표지 디자인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소설만 수록된 경우가 많은데 『사랑 없는 세계』의 가제본은 출간된 책과 동일한 표지 디자인은 물론이고 소설과 옮긴이의 말까지 수록하여 가제본을 읽고 있다는 생각을 1도 안 들게 해주었다. 출판사의 세심함과 친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소설의 감동을 더 진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까 많은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사랑 없는 세계』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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