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여름 2
에밀리 M. 댄포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들에게 인정은커녕 이해조차 받지 못하는 캐머런은 자신의 정체성(동성애자)을 들키고 이모와 목사님에 의해 '하느님의 약속 기독교 학교 치유 센터'로 보내지게 된다. 『사라지지 않는 여름』 1권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성장통을 앓아가는 캐머런이 하느님의 약속에 보내지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면 2권에서는 캐머런의 본격적으로 자신을 가로막는 벽을 부수고 세상을 향해 반항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의 원제 - 'The Miseducation Of Cameron Post(캐머런 포스트의 잘못된 교육)' - 만 봐도 하느님의 약속에서 캐머런의 교육 혹은 교정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해 보인다.


 나는 내가 리디아를 싫어하는 게 틀림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니까 흥미로워요. 사실 전에는 이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 없거든요."

 "뭘 말이냐?" 리디아가 물었다.

 "동성에요." 내가 대답했다.

 "세상에 동성애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리디아가 말했다. "동성애라는 것은 일명 동성애자 권리 운동가들이 주입한 신화야."

리디아는 다음 말을 한 단어 한 단어 분명히 또박또박 발음했다.

"세상에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은 없어.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부정한 욕망과 행동으로 인한 고통뿐이고, 하나임의 자녀인 우리는 그 고통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 p.54-55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 하느님의 약속에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혐오하도록 교육받고 하느님이란 이름으로,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무수한 억압을 강요받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캐머런은 자신을 지키며 성장하고 있다.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과 주위 사람들과의 불화, 사회적 문제 등의 소재라면 사실 퀴어라는 장르에서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기에 특별한 신선함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생생한 캐릭터들과 예리한 감정의 표현, 적나라한 시대상과 사회상의 묘사가 독보적인 흡인력으로 읽히며 특별함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억압과 불화에 휩싸여 있지만 자신을 둘러싼 알을 깨나가는 캐머런 특유의 냉소가 소설 표지의 쨍한 색감만큼이나 소설을 선명하고 또렷하게 만들어주었다. 클로이 모리츠가 연기하는 캐머런이 궁금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궁금해진다.


소설의 내용, 제목, 표지가 삼박자로 좋아 만족도가 기대 이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제목의 경우 원서 제목 『캐머런 포스트의 잘못된 교육』보다 한국어판 제목 『사라지지 않는 여름』이 더 좋게 느껴진다. 소설의 출간을 앞두고 출판사에서 제목 투표를 시행했을 때 제목의 후보들로 '우리는 어디에나 있어', '사라지지 않는 여름', '태양으로 가는 소녀'가 있었다. 소설을 다 읽고 보니 원서 제목은 물론이고 한국어판 후보로 거론됐던 제목들 모두 소설과 잘 어울리지만 역시 사라지지 않는 여름이 강하게 기억되고 작품의 이미지와도 잘 맞는 것 같다. 


 루스 이모는 옷 커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바쁘게 놀려 옷걸이 두 개를 서로 묶은 끈을 풀어냈다. "아니, 들러리는 캐런과 해나가 해주기로 했다. 예전에 그 친구들 얘기 했던 거 기억나지? 플로리다에서 나랑 같이 위너스 항공사에 다녔던 동료들이야. 둘 다 내일 빌링스에 오기로 했단다. 그래도 여전히 들러리 대표는 너야."

 내가 궁금했던 게 바로 그거였다. "전 안 해요." 내가 말했다.

 그러자 이모는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니?" 그렇게 물었지만, 이모가 내 말뜻을 모를 리는 없었다.

 이모는 정말 피곤해 보였다. 루스 이모가 아닌 것 같을 정도로. 그래도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결혼식 갈게요. 가고 싶어요. 하지만 들러리 대표는 맡을 수 없어요." 나는 이모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모가 기분 상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둘 다 가질수는 없잖아요."

 이모가 고개를 저었다. "둘 다 가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이니."

 "저를 고쳐야 한다고 먼 곳으로 보내버렸으면서, 결혼식에는 예쁘게 차려입고 들러리 대표를 하도록 시킬 수는 없다는 뜻이에요." p.126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최초의 트랜스젠더 군인, 숙명여대 최초 트랜스젠더 합격생 뉴스로 세상이 시끄러웠다. 캐머런이 세상에 맞서 자신을 지켜가는 모습을 보여줬던 1989년에서 1993년의 몬태나주와 2020년의 대한민국은 시대의 차이, 사회의 차이가 안 느껴진다. 냉소적인 10대 소녀 캐머런을 지켜보며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갔지만 소설이 끝나고 현실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뉴스들을 접하니 씁쓸한 여운이 어느새 진하게 남는다. 『사라지지 않는 여름』의 독서는 사라지지 않는 겨울로 기억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