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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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가이지만 오쓰 이치라는 작가가 호러, 괴담을 쓸 땐 야마시로 아사코라는 필명을 써서 작품을 발표한다는 사실이 소설만큼 흥미로움을 더해준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다른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던 사실이 겹쳐지면서 기대감 또한 더해준다. '공포'. '호러' 장르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영화에서나 조금 접해봤지 이런 장르의 소설은 개인적으로 처음이지만 '일본 문화'와 '공포'라는 장르가 더해지니 분위기나 색깔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해지고 그 예측이 더불어 호기심과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본격적으로 소설을 읽기도 전부터 기대감을 높이는 요소가 넘치게 많았음을 고백하며 서평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부부가 사는 맨션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심령현상이 나타나 사적인 공간을 침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화자의 일상을 위협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런 부부가 자신들 앞에 갑자기 나타난 심령의 정체를 파헤쳐 가는 과정을 그려낸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이모에게 학대받는 소녀 미즈노 후코와 그녀가 가까스로 구출한 머리 없는 닭 교타로, 그들의 유일한 친구인 소년과의 슬픈 이야기를 담은 「머리 없는 닭, 밤을 헤매다」, 술에 취하면 미래가 보이는 여자친구와 그런 여자친구의 능력을 도박에 거는 남자친구의 이야기 「곤드레 만드레 SF」, 슬럼프에 빠져 10년 넘게 글을 쓰지 못한 소설가의 손에 들어온 영감을 주는 이불 「이불 속의 우주」, 자식들을 죽인 고등학교 동창들의 소식을 듣고 과거의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의 딸을 겁내는 엄마  「아이의 얼굴」, 2011년 쓰나미로 죽은 가족을 그리워하며 장난감 무전기로 아들의 환청과 이야기를 나누는 아빠 「무전기」, 사고로 딸을 잃고 죄의식에 빠진 엄마에게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환청에 관한 이야기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해난 사고로 바다에 빠져 죽은 화자가 맞이한 죽은 자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의 세계 「아이들아, 잘 지내요」. 


 "이모는 늘 나한테서 소중한 걸 빼앗아 가. 하지만 이건 못 뺏을걸. 내 마음에 싹튼 이 감정만은 이모도 절대로 어떻게 못 할 거야." p.69 「머리 없는 닭, 밤을 헤매다」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에서 다루고 있는 8편의 단편들은 상실, 실종을 화두로 하여 흥미로운 소재들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물론이고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흥미를 자아낸다. 또한 「이불 속의 우주」를 제외한 작품들에서는 죽음과 죽음으로 인한 남은 자의 상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먹먹함을 전하기도 하는데 장르에 비해 자극적인 요소가 없고 오히려 잔잔하게 이야기가 이어짐에도 빠르게 읽히며 재미를 더해준다. 2011년 일본 쓰나미를 소재로 한 「무전기」를 제외하면 특별히 일본적인 소재가 두드러지지 않음에도 소설 전반에 일본식 공포의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것 또한 소설이 전하는 색다른 재미다. 무엇보다 소설 전반의 분위기와 책 표지의 분위기가 잘 맞아 더 좋았다.

 

 "안나, 정말 괜찮겠어요?"

 엘리베이터에서 이사벨이 물었다.

 "죽은 자의 나라는 안식의 땅이라고 들었는데요. 천사 업무에 시달리는 것보다 훨씬 편할지도 모르잖아요?"

 "일단 일하는 법부터 배워야겠네요. 이사벨,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여기는 오락거리도 얼마 없어요. 지상의 삶을 경험한 당신이 견딜 수 있을까요."

 "천사로 일하다 보면 부모님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나를 낳아서 길러준 부모님을 역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먼저 죽은 걸 사과하자. 그리고 사랑했다고 말하자. 그럴 기회가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계약을 맺을 가치가 있다. p.248 「아이들아, 잘 자요」


계절의 영향이 큰 탓인지 야마시로 아사코의 공포소설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을 읽어가는 내내 영화 <여고괴담 : 두번째 이야기>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고괴담 : 두번째 이야기>가 공포영화는 여름이라는 공식을 깨고 한겨울에 개봉해 당시 신선한 충격을 전해줬었는데 마찬가지로 겨울에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을 읽으면서 느낀 서늘함과 신선함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공포', '호러', '기담'이라는 장르를 내세웠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서늘한 감정이 잔잔하게 밀려오면서 종내엔 특유의 온기를 품어 내는 방식 또한 닮아 보였다.  그런가 하면 「아이들아, 잘 지내요」에서 죽은 자들이 죽은 자의 나라로 들어가기 전 무작위로 추출한 기억의 단편을 이어붙인 필름을 상영한다는 대목에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수록된 8편의 단편들이 때론 잔혹동화 같고, 때론 슬프지만 아름다운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책날개의 작가 소개 글과 옮긴이의 말을 통한 작가의 소개 글을 통해서 16세에 데뷔한 작가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장르에 따라 쓰는 이름이 다르고, '기담 전문 작가', '괴담 전문 잡지'라는 다소 생소한 단어가 존재하는 일본 문학계의 새로운 세계를 보며 일본 문학에 대한 호기심과 부러움의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는데 어느 정도 한 해를 마무리하고 내년을 준비하는 시기에 내년엔 내가 접하고 경험할 수 있는 문학세계의 스펙트럼이 더 확장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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