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영 ZERO 零 소설, 향
김사과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김사과 작가의 존재는 진작 알고 있었지만 어이없는 편견으로 그동안 김사과 작가에 대해 단단히 오해를 했었다는 걸 깨달은 지는 얼마 안 됐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동안 김사과라는 이름과 더불어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등단을 하고 꾸준한 작품 발표를 화려한 이력을 두고 작가를 등단 당시 유행했던 인터넷 소설가 정도로 오해를 했던 것이었다. 예전에도 밝힌 바 있지만 나는 오랫동안 귀여니 이후 나와 동갑인 소설가가 한국 문단에 나타나는 순간을 기다려 왔었는데 이미 김사과 작가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확실하게 구축하며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음에도 엉뚱하게도 새로운 작가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어린 나이에 등단하여 자신만의 색을 뚜렷하게 발산하며 꾸준하게 작품 발표를 해온 이 천재적인 작가의 매력에 빠진 계기는 엉뚱하게도 소설이 아닌 팟캐스트를 통해서였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읽어주는 어느 팟캐스트의 코너에서(창비 라디오 책다방 26회) 김사과 작가는 그야말로 끼를 뽐내며 남다르게 자신의 작품을 읽어 주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김사과 작가의 소설보다 인간 김사과의 매력에 먼저 빠졌었다.

 

 모든 꽃이 활짝 피어나지는 않지만, 모든 꽃은 반드시 진다. 꽃이 시드는 모습은 피는 장면만큼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 추함의 인상적임에 있어 개화를 능가한다. 꽃병에 갇힌 채, 서서히 생기를 잃어가는. 조금씩 탁하게 변해가는, 탄력을 잃어가는 꽃잎, 죽음에 가까워지는 냄새. 처음 봤을 때 드물게 생생한 들꽃이었던 세영이는 활짝 피어날 가능성으로 가득했다. 나는 나의 탁월한 발견에 감탄하며 서둘러 꽃봉오리가 가득 맺힌 꽃 무더기를 꺾어 꽃병에 꽂았다. 그리고 차갑고 투명한 물에 약간의 독을 섞었다. 꽃봉오리는 활짝 피어나는 대신 정지된 채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얼어버린 듯, 정지된 채 시간이 흐르고, 꽃봉오리는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죽음으로 향한다. 어쩌면 내년을 기약하며? 하지만 뿌리가 없는걸? 안타까운가? 하지만 봄이 오면 사방이 꽃 천지다. 얼마든지 피어나게 할 수 있다. 얼마든지 꺾어서 커다란 화병 가득 빽빽하게 채워넣을 수 있다. 세영이는 그런 존재에 불과했다. 드물게 독특하고 매혹적인 꽃이지만, 값과 노력을 지불하면 얼마든지 그 비슷한 것을 사다가 꽂아놓을 수가 있다. 그럴 수 있다. 얼마든지. 아니, 그래야 한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는 한가? p.83-84

 

우선 제목부터가 김사과 답다는 감탄을 절로 들게 한다. 『0 영 ZERO 零』(이하  『제로』), 도대체 이 책 제목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소설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쉽게 유추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제목을 부르는 것부터 일단 머뭇거리게 만들다니 역시 보통이 아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막힘없이 술술 읽히지만 화자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도무지 그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며 헤매고 마는대서 작가의 무시무시한 내공에 또 감탄해버리고 만다. 누군가를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히고 마는 세계관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잠식해가는 주인공을 보며 동의할 수 없는 인물에 이해는 물론이고 연민의 감정조차 들지 않지만 곱씹어 보게 되는 문장들을 수시로 만나면서 밑줄을 긋게 되는 아이러니는 또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전 남자친구 성연우, 독일에 살 때 만났던 같은 반 김명훈, 주인공이 선택한 그녀의 제자 세영이, 독립잡지 멤버들(김지영 선배, K, Y, 이민희), 그리고 엄마와의 관계에서 인간의 허영과 이기심의 괴상한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토록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비유들의 향연이라니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혼자 오래 곱씹고 음미하고 싶은 소설들이 있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들어보고 싶은 소설들이 있는데 김사과 작가의 『제로』는 후자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내가 즐겁게 읽은 만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해지고 많은 해석들을 듣고 싶어진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내 불행을 바란다.

 그것은 진실이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유일한 진실이다. 김지영 선배는 미친 짓이 아니라 진실을 말했다.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하자면, 사람들은 누군가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바란다.

 각별한 타인의 불행을 커튼 삼아 자신의 방에 짙게 드리워진 불행의 그림자를 가리고자 한다. p.120

 

『제로』는 작가정신에서 리뉴얼된 '소설향'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중편소설에 맞는 판형과 디자인으로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은 것은 물론이고 김사과 작가를 시작으로 앞으로 발표될 작품들의 화려한 작가진(윤이형, 김이설, 김엄지, 임현, 정지돈, 정용준, 오한기, 조해진, 백수린, 최수철, 함정임 등)으로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소설만큼이나 부록으로 수록된 김사과 작가와 황예인 평론가의 대화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데 작가의 근황, 작가가 들려주는 소설과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좋았던 소설을 더 좋게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 이어질 작가정신의 '소설향'시리즈에 대한 기대와 김사과 작가의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기대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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