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다면
애덤 해즐릿 지음,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애덤 해즐릿의 『내가 없다면』은 '우울'이라는 괴물에 지배당한 한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마거릿은 존과의 결혼을 앞두고 존의 우울증과 대면하게 된다. 존과 결혼하여 세 명의 아이를 낳고 살지만 존의 우울과 무기력함은 더 이상  존 혼자만이 짊어진 짐이 아니다. 심지어 큰아들 마이클에게까지 이어져 다섯 가족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애덤 해즐릿은 다섯 가족 각자의 시점으로 불안과 우울에 잠식당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낸다. 

우울과 불안이라는 소재만으로 내가 이 소설에 빠져들 것이라는 건 1 더하기 1은 2라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것이었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우울감에 빠져있는 인물들을 대면하면 그 인물의 비중에 상관없이 대책 없이 빠져들곤 했었기에 '<타임>, <월스트리트저널>, BBC 올해 최고의 소설'이라는 타이틀들이 크게 배신하지 않는 이상 『내가 없다면』은 딱 내 소설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아니, 소설에 관한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었다 하더라도 『내가 없다면』이라는 제목 만으로도 충분히 이끌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없다면』은 책을 펼치기도 전에 이미 나를 매료시키는 요소들이 넘치게 많았다.

 

 

 실리아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눈을 닦고 나서야 아이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 말은 칼과 같아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벤다. 실리아를 달래려고 몸에 손을 대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고, 더 심한 거짓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을 무시하고, 옆에 가서 실리아, 내 딸의 어깨에 한 팔을 둘렀다. 그러자 아이는 내 축축한 셔츠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었다.

 나는 살인자다. 그게 내 정체다. 난 삶을 훔치고 있다. p. 125

 

 

가랑비에 옷 젖는 소설이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만났다는 반가움에 감정을 조절하며 읽어야 한다는 걸 그만 잊고 말았다. 애덤 해즐릿이 잔잔하게 건네는 이야기에 쌓여 무너져버렸다. 아니 압사당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까? 서로를 위해 견디고 기다리는 우울증을 가지고 있는 가족들의 고통과 사랑이라면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감정을 끝없이 두드린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범위를 단숨에 넘어버리지만 그게 바로 애덤 해즐릿이 건네는 이 소설의 매력이다.

아버지의 병이 아들에게 이어지고 우울이 그들을 잠식해버리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없다면』을 읽으면서 전혀 다른 분위기와 감정을 이야기하는 영화 <어바웃 타임>이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어바웃 타임>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캐릭터는 여동생 킷캣이었다. 나에게 <어바웃 타임>은 팀과 메리의 사랑보다, 팀과 아빠의 사랑보다, 팀과 킷캣의 사랑이 더 마음을 끌었었는데 존과 마이클을 걱정하고 지키려는 가족들을 보면서 팀과 킷캣을 자주 떠올렸다. 두 작품이 건네는 감정은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건네는 '아름다움'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세상이 우릴 죽이고 싶어 할 때는 내 자신을 조금 죽이는 예방 주사를 맞아야 해요. p.150



<어바웃 타임>의 킷캣처럼 특유의 우울함으로 나를 걱정인형으로 만들었던 소설 속, 영화 속 인물들이 몇몇 있다. 오래도록 그들을 품으며 그들의 안부를 궁금해하기도 하는데 『내가 없다면』의 경우 실로 오랜만에 작품 속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감정들로 나를 사로잡았다. 캐릭터들과 감정, 스토리 등 많은 이야기들을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애덤 해즐릿이 소설 밖에서 건네주는 이야기들도 듣고 싶은데 책에 작가의 말이 없는 건 큰 아쉬움이다. 클릭 몇 번이면 독서 시작도 전에 소설의 스토리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지만 되도록 사전 정보 없이 애덤 해즐릿이 전해주는 가랑비에 옷이 젖고 무수한 감정들에 압사당하는 경험을 해보길 바란다. 그런 마음에 서평에서 많은 이야기를 펼치지 못했다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크지만 블로그 밖에서 이 책에 관한 많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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