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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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가을을 가을답게 양질의 풍부한 독서로 만끽하며 보냈다. 특히 이번 가을은 여러 출판사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신간 소식들을 들으며 일일이 감응하기 바빴는데 그러는 와중에 미루지 않고 바로 집어 든 책마다 만족도가 너무나 높았던 덕에 더불어 삶의 질도 높아진 것 같은 착각에 들게 했다. 벌써 요란한 첫눈을 맞이한 지역들도 생기고 12월이 코앞에 나타난 만큼 가을을 보내주고 겨울을 맞이할 때에 두꺼운 두께로 이번 가을을 함께 아우르며 대미를 장식해준 작품은 앨런 홀링허스트의 장편소설 『아름다움의 선』이었다. 

앨런 홀링허스트는 이번에 처음 대면한 작가지만 그의 작품이 출간되자마자 읽어야 할 이유는 넘치게 많았다. 대부분의 수상작들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던 맨부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충분히 기대감을 높여주었는데 맨부커상을 수상한 최초의 퀴어 소설이라고 하니 기대감이 더 높아졌다. 호기심을 자아내고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요소가 이렇게나 많은 작품이 맨부커상 수상 이후 국내 출간까지 14년이나 걸렸다는 점은 의외다. 국내에서 그의 작품이 발표되지 않아도 몇몇 매체들은 그의 신작이 출간될 때마다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는 것도 이번 기회에 뒤늦게 알게 됐는데  『아름다움의 선』 출간이 한국 독자들과 첫 만남이지만 그의 작품이 출간되길 기다려왔던 독자들이 많았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이제 막 옥스포드를 졸업하고 자신의 짝사랑 상대인 토비의 대저택에 머무는 닉의 1983년의 여름이야기로 소설은 시작된다.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란 닉이 토비의 가족들을 통해 경험하는 상류사회와 리오를 통해 처음 경험하는 동성애 세계에 조심스럽게 입문하는 것처럼 소설 또한 조심스럽게 시작되지만 1986년, 1987년으로 이어지는 세번의 여름은 당시의 사회가 동성애자들에게 녹녹치 않았던 것처럼 소설 역시 녹녹치 않다. 

상류사회, 동성애, 인종차별, 정치, 에이즈, 코카인…. 시대를 특정하지 않았더라면 현대 사회의 깊숙한 문제라 해도 큰 이견이 없어 보이는 병적인 이야기들을 앨런 홀링허스트는 세련되게, 아름답게, 하지만 슬프게  끌고 간다. 두꺼운 책장을 넘긴 페이지가 더 많아질수록 그만큼 소설도 더 좋아졌는데 소설을 다 읽고도 쉽게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질 못하게 한다. 초반 더없이 소심하고 진중했던 1983년의 여름이야기로 시작했던 그 소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앨런 홀링허스트의 『아름다움의 선』에 빠져서 오래 헤맸다. 닉의 시선에서 묘사되는 당시 영국의 상류사회와 인물들에 대한 묘사를 따라 읽다 보면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영화로 나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는데 알고 보니 2006년에 BBC드라마로 제작이 되었었다고 한다. 두꺼운 책을 다 읽고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며 작품에 대해 파면 팔수록 왜 맨부커상이라는 타이틀로도 국내에 출간되기까지 14년이나 걸렸는지 미스터리인데 책날개에 소개된 작가의 어마어마한 수상 목록을 보면 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세련된 문체로 가득한 『아름다움의 선』은 1980년대 영국으로 스토리가 펼쳐지고, 2004년에 맨부커상을 수상하여 그로부터 14년 뒤 한국 독자들과 첫 만남을 가지지만 그 세월들의 틈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소설이 1980년대가 아닌 현재 시점으로 스토리를 풀어나간다 해도 닉이 가지고 있는 고민들과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들과 그들의 대처가 그대로 공감이 가고 이해가 갈 것 같다. 이 책이 한국에 빨리 출간되어 2004년쯤 20대 초반에 읽었다고 하더라도 소설을 읽어가는 시선이 30대 중반에 읽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예감 역시 같은 맥락이다.  

자주 접하는 장르가 아님에도 영국 작가의 퀴어 문학이라는 타이틀만으로 소설의 전반적인 이미지나 이야기들에 대해서 짐작 가능한 부분들이 있었는데 퀴어 문학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주지 않아서 더 좋았다. 책을 읽는데 비교적 많은 시간이 걸렸던 데에는 670여 페이지의 엄청난 두께의 영향도 있었지만 모바일로 봤을 땐 크게 못 느꼈던 표지의 실물 탓에 밖에 들고나가 틈틈이 꺼내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소설의 스토리나 이미지만 봤을 때 원서의 표지보다 창비의 표지가 백번 옳았다고 생각한다. 

평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분야의 책을 '맨부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로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으로 만들어준 맨부커상에 대한 신뢰가 이번 독서를 통해 더 두터워졌다. 『아름다움의 선』의 출간을 기다려왔던 독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 역시 작가나 책의 존재를 알고 난 뒤 열렬히 출간을 환영하며 읽어갔다. 이번 앨런 홀링허스트의 『아름다움의 선』 출간이 앨런 홀링허스트의 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출발점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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