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만일 전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


에머슨이 유독『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심취했던 게 영국의 철학자인 토머스 칼라일을 만난 영향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칼라일은『영웅숭배론』까지 쓴 인물이고, 인터넷을 뒤져 보니 <칼라일과 에머슨의 영웅관 비교> 같은 텍스트도 금방 눈에 띄는 형편이니 둘 다 '영웅'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건 분명하다. 작가들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은 워낙 폭넓고도 내밀한 일이니 둘 사이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 이야기로 시간을 끌 필요는 없을 듯하다.


에머슨이 특별히 '불타는 도서관'에 뛰어들어가서라도 꺼내고 싶다고 언급한 저 세 사람의 작품 가운데 그나마 읽기 쉬운 작품이 아마도『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아닐까 싶다. 무려 50명의 전기를 담고 있어서 그 양이 방대하긴 하지만, 각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가 워낙 생생하고 독특하면서도 흥미진진하고 때론 박진감마저 넘쳐서 어떨 땐 만화책을 보는 듯한 몰입감까지 느끼며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책이 재미있다고 하더라도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작품'이 지니는 독특한 한계는 그리 간단하게 뛰어넘을 수 있는 문제로 치부할 일은 아닐 듯싶다.


가령, 셀 수도 없을 만큼 끊임없이 등장하는 낯선 지명들과 인명들과 족속들과 국가들은 독자들에겐 참으로 고역이다. 게다가 고대의 여러 신화와 인물들과 사건들에 얽힌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지식 등등에 대해서 '독자들이 당연히 알고 있다고 여기면서 서술하는 듯한' 작가의 태도를 꾹꾹 참고 견디는 일도 힘겹다. 물론 그리스·로마 시대에 쓰여진 몇몇 이름난 고전들이나 그 시대를 특별하게 다룬 후세의 여러 작품들까지도 더러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난관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들이 까마득한 옛날 책들을 읽는 일에서 옛사람들보다 영영 불리한 점만 타고난 것은 아니다. 고대 고전 작품과 현대와의 거대한 간극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훌륭한 가교들이 적잖이 놓여 있으니 말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예술작품들'이 아닐까 싶은데, 요즘 사람들은 인터넷 덕분에 그런 예술작품들에 대해 아주 상세하고도 재빠르게 간파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으면서 자주 놀랐던 게 바로 그점이었다. 웅웅전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이나 지명 등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알고 싶어 그들을 검색하기만 하면 으레 예상치도 못한 '훌륭한 그림들'이 툭툭 튀어나와서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는 데 몹시도 유익했다.


어젯밤에 내가 검색한 인물은『플루타르코스 영웅전』으로 넘어와서야 가까스로 만난 '포키온'이었는데, 마침 그를 알맞게 묘사한 그림들은 '추운 날씨에'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운 면이 적지 않았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 전쯤인데, 포키온이 아테나이에서 한창 활약하던 시기엔 마침 알렉산드로스가 전세계를 호령할 때였다. 선왕인 필리포스가 죽고 얼마 뒤 알렉산드로스가 아테나이를 넘볼 때 이야기부터 들여다보자.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사절단이 전달한 결의문을 읽더니 그것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그들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키온이 직접 찾아가자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늘 신하들로부터 아버지인 필리포스 왕이 포키온을 칭찬하고 존중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정책에 대해 포키온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포키온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만일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멈추어야 하고, 명예를 얻고자 한다면 전쟁을 하되 헬라스가 아닌 야만족들과 하라며 충고했다. 이처럼 포키온은 알렉산드로스 성격과 야망에 맞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그러므로 알렉산드로스는 만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헬라스를 이끌어 갈 나라는 아테나이일 것이라며, 아테나이인들에게 정치를 잘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포키온을 친구이자 귀한 손님으로서 정중하게 대우했다.

(134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그 뒤 알렉산드로스는 헬라스에서 눈을 돌려 '동방 원정'에 나섰다. 그는 곧 아시아로 넘어가 다리우스 대왕을 패주시켜 '위대한 대왕'이라는 칭호까지 받게 되자 그때부터 편지를 쓸 때면 그 누구에게도 첫머리에 인사말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포키온만은 예외였다고 한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는 포키온에게 무척 너그럽고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한번은 알렉산드로스가 포키온에게 100탈란톤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포키온은 돈을 가져온 이들에게 아테나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자신에게 이 돈을 가져왔는지 물었다. 그러자 사신들 가운데 우두머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께서는 오로지 장군만이 명예롭고 뛰어난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포키온이 말했다.


"그러면 앞으로도 내가 계속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셈치고 이 돈을 도로 가져가시오."

(1348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이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바로 아래의 그림이다. 포키온의 단호하면서도 당당한 표정도 몹시 인상적이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신들이 놀라는 표정도 무척이나 생생하다. 그런데, 포키온의 발 옆에 놓인 세숫대야엔 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플루타르코스의 설명을 조금 더 인용해 보자.


<알렉산드로스의 선물을 거절한 포키온>, 지오아치노 아세레토(1600∼1649), 17세기경, 낭트 미술관



사신들은 포키온을 따라 그의 집에 갔다가 너무나 검소한 살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안에서는 부인이 직접 빵을 만들었고, 포키온은 제 손으로 우물을 길어 손님들이 발 씻을 물을 떠다주었다. 그러자 사신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친구가 이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그 돈을 꼭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때마침 누더기를 입은 초라한 노인이 지나갔다. 포키온은 그 노인을 가리키며 자신이 저 노인보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사절단은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라며 간청했다. 그러자 포키온이 말했다.


"저 노인은 나보다 더 가난하지만 그다지 부족한 것을 모르고 살고 있소. 내가 만일 이 돈을 쓰지 않으면 가지고 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리고 내가 이 돈을 쓰게 된다면, 그것은 나와 알렉산드로스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될 것이오."(1348∼134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이렇게 해서 포키온은 끝내 그 돈을 돌려보냄으로써, 그 돈을 받지 않은 사람이 돈을 보낸 사람보다 더 부자라는 사실을 헬라스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포키온의 이러한 행동을 불쾌하게 여겨 자신의 자신의 친절을 거절하는 사람은 친구도 아니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러자 포키온은 자신을 친구로 생각한다면 돈 대신에 감옥에 갇혀 있던 헬라스 사람들 몇몇을 석방해 달라고 간청했고,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이들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부하를 마케도니아로 보낼 때, 포키온을 만나면 아시아에 있는 네 도시 가운데 하나를 가지라고 전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만약 이번에도 자신의 마음을 저버린다면 정말로 화를 내겠다고 했다. 포키온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대왕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젠 포키온의 아내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그녀를 그린 그림도 '명화'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포키온의 첫 번째 아내는 조각가 케피소도투스의 누이였다는 사실 말고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두 번째 아내는 포키온의 가난한 생활을 잘 견뎌낸 훌륭한 인품으로 아테나이에서도 이름이 높았다. 언젠가 아테나이 시민들이 새로운 연극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여왕 역을 맡은 배우가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들을 많이 나오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배우는 무대에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연출을 맡은 멜란티우스가 여배우를 매우 꾸짖었다.


"저기에 포키온 부인이 앉아 계신 것도 보이지 않느냐? 저런 분도 시녀 하나만 데리고 다니신다. 너는 여성 관객들에게 허영심만 잔뜩 채워줄 작정이냐?"


연출자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극장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말소리를 듣고 관객이 동의하는 듯 크게 소리내어 박수를 쳤다.


또 언젠가는 이오니아에서 온 여인이 포키온 부인을 찾아와 자신의 보석 목걸이를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때 포키온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보석은 지금까지 20년 동안 아테나이의 장군으로 계신 포키온뿐입니다."(1349∼1350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그 후 마케도니아가 점차 강성하게 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망 이후 휘하 장군들끼리 권력다툼이 심화되는 와중에 아테나이도 결국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 아테나이의 수비대장으로 파견된 마케도니아군의 사령관은 메닐루스였다.


마케도니아군 수배대장인 메닐루스가 포키온에게 많은 돈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포키온은 이 돈을 거절하면서 자신은 메닐루스가 알렉산드로스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어떻게 지난날 알렉산드로스의 돈을 거절했던 자신이 이제 와서 메닐루스의 돈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메닐루스는 그 돈을 포키온의 아들 포쿠스가 받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이에 포키온이 말했다.


"포쿠스가 만일 나쁜 버릇을 고쳐 아낄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이 아비의 재산으로도 넉넉할 것이오. 그러나 지금의 버릇을 못 고치고 계속 낭비만 일삼는다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족할 거요."


한번은 안티파트로스가 포키온에게 어떤 그릇된 일을 시키려고 하자 포키온은 화를 내며 말했다.


"그건 정말 못하겠소. 나는 당신의 친구이면서 앞잡이가 될 수는 없으니 말이오."


안티파트로스는 늘 아테나이에 두 친구, 포키온과 데마데스가 있다고 말했다. 포키온은 어떤 방법을 써도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이고, 데마데스는 뇌물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언제나 부족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다.(1358∼135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한편 마케도니아 왕의 섭정을 맡은 폴리스페르콘은 아테나이를 손에 넣기 위해서 포키온을 무너뜨릴 궁리를 했는데, 그 방법은 지난날 아테나이 시민권을 빼앗기고 해외로 쫓겨난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선동가들과 고발자들로 하여금 포키온을 공격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혼란한 틈을 다서 협잡꾼인 아그노니데스가 포키온과 그 일파를 반역죄로 고발했고, 포키온과 그의 지지자들은 폴리스페르콘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로 떠났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에서 포키온과 그 일행은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수레에 실려 곧장 아테나이 법정으로 끌려간 뒤 사형을 받게 되었다. 어리석은 아테나이 군중들이 협잡꾼에게 속은 탓이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헬라스 사람들에게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떠올렸다고 한다. 둘의 죽음은 모두 아테나이의 잘못으로 빚어진 비극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내막을 조금 더 소개하면 이렇다.


감옥에 도착한 토디푸스는, 자신은 포키온과 함께 죽을 사람이 아니라면서 한탄했다. 그러자 포키온이 물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죽는 게 그렇게도 못마땅하오?"


포키온의 친구 하나가 아들에게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포키온은 이렇게 대답핬대.


"아테나이 시민들을 원망하지 말라고 전해주시오."


포키온과 가장 친했던 니코클레스가 자신이 먼저 독약을 마시게 해달라고 하자, 포키온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참으로 괴로운 부탁이로군. 그러나 내가 평생 동안 자네 소원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들어주겠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독약을 모두 마시고 나자 포키온이 먹을 독약이 남지 않았다. 감옥을 지키는 관리들은 12드라크메를 내야 독약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포키온은 친구를 불러 옥리에게 돈을 좀 주라고 부탁하며, 아테나이에서는 죽는 데도 돈이 든다고 한탄했다.(1364∼136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포키온의 적들은 그를 죽인 일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는지, 그의 시신을 아테나이 땅에 묻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포키온을 화장시킬 장작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고도 선포했다고 한다.


이 장면은 마치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을 떠올리게 한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골육상쟁 끝에 일대일 결투에서 서로 죽이고 죽자, 새로 테바이의 왕이 된 크레온은 다른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조국을 공격한 폴뤼네이케스(오이디푸스 왕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오라버니)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게 법령으로 포고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그 명령을 어기고 오라비를 위해 장례를 치러주다가 잡혀 크레온 앞으로 끌려가고 사형을 선고받고 석굴에 갇힌다. 크레온의 아들로 안티고네의 약혼자인 하이몬이 와서 아버지를 말려보지만 크레온의 생각은 확고하고, 안티고네는 끝내 목을 매달아 죽는다.


              하이몬   테바이 백성들이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크레온   내가 어떻게 통치해아 하는지 백성들이 지시해야 하나?
         하이몬   거 보세요. 이제는 아버지께서 애송이처럼 말씀하시네요.
         크레온   이 나라를 내가 아닌 남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고?
         하이몬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
         크레온   국가를 통치하는 자가 곧 국가의 임자가 아니란 말이냐?
         하이몬   사막에서라면 멋있게 독재하실 수 있겠지요.

 - 《안티고네》733∼739행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아마도 '뇌물' 때문에 온 나라가 뒤숭숭한 작금의 현실이 이내 선명하게 겹쳐 떠오르는 걸 참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점에 대해 이야기를 진척시키는 건 내 몫이 아니다. 다시 포키온의 이야기로 되돌아 오자. 어느새 장면은 뒤바뀌어 '포키온의 장례 모습'에 이르렀다.


결국 돈을 받고 이런 일을 하는 코노피온이라는 사람이, 시신을 메고 엘레우시스를 지나 이웃 나라인 메가라에 가서 화장을 해주었다. 시녀들을 데리고 메가라까지 따라갔던 포키온 부인은 그곳에 빈 무덤을 만들고, 유골을 품속에 몰래 숨긴 뒤 밤을 틈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포키온의 유골을 벽날로 옆에 묻고는 이렇게 말했다.


"축복받은 벽난로야! 착하고 용감했던 분의 재를 너에게 맡기니 부디 잘 지켜다오. 그리고 아테나이 시민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그때 조상들의 무덤으로 고이 옮겨갈 수 있게 해다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아테나이 시민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어질고 위대한 보호자를 잃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늦게나마 포키온의 동상을 세우고 그 명예에 걸맞게 다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그리고 포키온을 고발했던 아그노니데스를 잡아들여 사형시켰다.(1364∼1365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17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였던 푸생은 포키온에 대한 그림을 딱 두 점 남겼다고 하는데 그 그림들은 모두 포키온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 평생 동안 조국을 위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멸사봉공했던 자신들의 진정한 지도자가 저토록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마치 물건을 내다버리듯이 조국으로부터 버려지는 모습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렇지만 그 배경을 이루는 풍경들은 놀랍도록 질서정연하고 균형잡히고 아름답고 평화롭다. 화가 푸생은 바로 상상 속의 풍경을 저렇게 이상화시켜서 죽은 영웅의 위대성을 고결함과 숙연함으로 형상화시켰다고 한다.



<포키온의 장례식 풍경>, 니콜라 푸생, 1648년(1594 ~ 1665), 영국 카디프 웨일스국립박물관


푸생이 그린 두 번째 그림은 제목 그대로 아테네를 벗어난 한적한 교외에서 '포키온의 유해를 모으고 있는 포키온의 미망인과 하녀'를 묘사하고 있다. 하녀는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 불안한 모습으로 주위를 경계하지만 포키온의 아내는 몹시도 꿋꿋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죽은 남편의 유골을 수습하는데 온 정성을 쏟고 있다. 그녀의 머리와 팔과 손 위로 눈부신 빛이 비치고 있는 모습도 몹시 인상적이다.


<포키온의 유골을 모으는 그의 아내>, 니콜라 푸생(1594 ~ 1665), 1648년, 영국 리버풀 워커 미술관


<포키온 편>을 읽으며 내가 살펴본 그림들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포키온의 얘기가 앞에서 내가 밑자락을 깔았던 '추운 날씨'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다음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마도 금방 이해하리라 믿는다.


역사가 두리스의 말에 따르면, 포키온은 공중목욕탕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거리를 걸을 때는 아무리 추워도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터에서도 견디기 힘들 만큼 춥지 않으면 언제나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어쩌다가 포키온이 외투를 입으면, 병사들은 오늘 날씨가 엄청 춥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1336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어제와 오늘은 날씨가 정말 매섭고 차다. 그런데도 어젯밤에는 촛불을 든 시민들이 무려 십만 명 이상이나 '뇌물을 주고 받은 재벌 총수와 대톨령을 구속하라'고 촉구하기 위해 광화문에 모였다고 한다. 정작 '뇌물 장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대통령은 이 추운 날씨와 국민들의 분노에도 여전히 아랑곳 하지 않고 구중궁궐에 틀어박혀 지내며 도리어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끝까지 뻐기고 있는데 말이다.


이 사태가 불거진 초기에만 하더라도 매일처럼 '도대체 이게 무슨 나라냐' 싶더니만, 이젠 그 정도를 훨씬 더 넘어서 어느새 '저 사람이 도대체 과연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가 되었다. 까마득한 옛날 사람이었던 포키온은 '뇌물을 받지 않은 사람'으로만 유명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전쟁터에서도 '견디기 힘들 만큼 춥지 않으면' 언제나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고 하니 말이다. 포키온을 둘러싼 이야기를 읽다 보니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진 '대통령을 둘러싼 온갖 추악한 뇌물 이야기' 때문에 온나라 백성들이 이 혹독한 강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광화문에 모여든 모습과 묘하게 겹쳐 떠올라 이 이야기를 길게 옮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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