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란 무엇인가?
제롬 케이건 지음, 노승영 옮김 / 아카넷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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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잘못봤다. 정서라기에 "AFFECTION"인줄알았는데, "EMO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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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오늘사람 > <고미숙 선생님 강연> 후기...몸과 앎과 삶

 

원래 오마이뉴스 스튜디오에서 강연이 있었나본데, 난 신촌토즈비즈니스센타에서 고미숙 선생님을 뵀다. 지난 강연에 미리 책을 읽고온 사람이 없어서 최악의 상황이였다는 말을 전하며 시작됐고, 이곳의 상황도 미리 책을 읽고온 사람이 적기는 마찬가지였다. <임꺽정>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좀 사변적인 내용으로 강연이 진행됐고 제법 활발한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고미숙 선생님의 관점은 다소 독특했다. 유심론과 유물론이라는 상반된 철학이 몸을 매개로, 주체를 매개로 결합되었다는 인상이다. 이건 아마도 내가 읽지 못한 책들에 그 힌트들이 들어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몸은 앎(지식)의 거처이며 앎이 거하는 몸은 삶이 된다. 좋은 삶이 된다. 언뜻 상식적 사고에는 배리된다. 몸에 앎이 거하더라도 몸은 몸에 앎에 또다른 장소에 있을 것 같다. 고미숙 선생님은 앎이 두뇌로 가지않고 경락과 핏줄을 통해 '세포'로 간다고 한다. 서양철학과 한국철학의 결합이라는 눈치는 있지만 그쪽에 지식이 없는 나로는 궁금할 뿐이다. 

언표의 배치와 욕망의 배치라는 말도 등장한다. "배치"는 최근 읽고 있는 책에 등장하여 생소한 문맥을 제공했다. 그런데, 고미숙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배치가 어떻게 문맥에서 작동하는가를 어렴풋하게 이해했다. 배치를 통해 의미가 결정된다. 넓혀보면 배치를 통해 사회적 역사적 의미도 결정된다. 반대로 배치를 역전시키면 의미도 역전되며 사회적 역사적 역학 동학 관계도 갱신된다. 배치의 중요성이다. 

 <임꺽정>에 대한 내용은 사실 기억나는 내용이 별반 없다. 워낙 고유명사가 많이 등장해 책을 읽지도 않은 나로서는 청석동?과 7두령이 전부다. 또한 문학은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는 어떤 분이 말씀도 기억난다. 문학 곧 이야기인데, 이야기는 전승도 되어야 하지만 글과 책이 존재하는 현대로서는 이야기 곧 문학이 정신과 마음에 순간 각인시키는 인상에의 노출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한다.  

추측건데 고미숙의 <임꺽정>은 임꺽정을 민중의 영웅, 민중을 호령하는 호민관이 아닌 다른 각도로 조명한 듯 하다. 최근의 사회상이라는 컨텍스트에서 새롭게 해석된 임꺽정은 WHITE HANDS다. 백수다. 직업을 가지지 않고 일을 하지 않고 혁명에도 떠밀려 들어간 존재로 동일시된다. 백수가 사회변동의 주체가 되는 것은 조선조만의 일은 아니다. 요즘은 88만원새라는 차고도 넘치는 용어가 일찌기 등장했던 386세대를 대체헸다. 현재의 88만원세대는 조선조의 임꺽정이라는 등식을 세워본다. 그런 현재적 해석의 맥락에서 임꺽정은 2009년에 다시 살아났다. 80년대 벽초 홍명희의 불세출의 명작 <임꺽정>10권이 있었다면 2009년에는 고미숙의 <임꺽정, 길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거의 향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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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오늘사람 > <야누스의 과학>김명진 저자와의 만남-과학과 정부/자본과의 역사적 유착

 

과학의 얼굴은 몇 가지일까? 적어도 하나는 아니다. 인류를 미몽과 마법에서 해방시킨 얼굴 하나. 다시 재영토화를 해내는 얼굴 하나. 재영토화를 하는 과학의 얼굴에는 두 그림자가 지워져 있다. 그 이름은 정부와 자본이다. 저자의 강연에서 그 기점은 80년도다. 80년을 기점으로 과학은 정부에서 자본으로 스폰서가 바뀐다.  

저자의 강연 초두에서 과학이 팽창한 시대는 1,2차 대전과 더불어서다. 과학의 최초 스폰서는 정부였다. 정부의 예산은 과학의 본질을 변화시켰다. 과학은 권력의 시녀가 되기를 시작했고, 그후 주인은 정부에서 자본으로 넘어간다....김명진 강연을 짧게 골자만 잡은 것이다. 강연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훨씬 많았고, 책에는 좀 더 정교한 서술이 있다.   

강연에서 Big SCIENCE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요즘의 과학 연구 추세에서의 테마잡기 방식의 특정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고, 여기에는 비판적 뉘앙스가 내포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과학의 스폰서가 정부에서 자본으로 이행된 후 특히 강화되는 경향이다. 90년대 미국에서의 게놈프로젝트, 허블망원경 등과 같이 거대규모의 프로젝트가 실시되는 것은 과학과 자본의 결탁이 초래한 결과다. 

그 결과로 과학연구자의 위계구조화, 연구와 연구자의 소외와 같은 자본주의적 모순구조들이 과학계, 연구프로젝트에 비대해 진다. 기실, 빅 싸이언스화는 그 자체로만 보면 정당한 것이며 사회와 과학사의 진전에 적절하게 조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큰 과학연구를 수행하기에는 이런 방법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것에 대해서 직접 비판을 삼가한다.  

빅싸이언스의 또다른 얼굴은 업청난 비효율성과 낭비다. 무책임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터무니 없는 일들이 자행되고 그것은 고스란히 국민(주도자가 정부인 경우), 노동자(주도자가 자본인 경우)에게 전가될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돈이 도는 구조를 생각하면 그 비용이 누구에게 전가될 것인가는 뻔하다. 그런데 이런 식의 지적은 강연에서 배제되어 있다. 

강연의 전반적 구조는 입증가능한 상황들의 제시와 그 증거제시로 되어있다. 이번 강연에서 상상력은 설 자리가 없어 보였다. 강의자는 직접적으로 자신이 비판하는 것이 무엇인지 노출시키지 않았다. 수강자(또는 독자)에게 나머지 몫을 차지하라고 안겨준 기분이다.   

강연내내 그리고, 질의응답에서 느낌은 탈주당한다는 것이다. 강연자는 무언가 회피하는 가운데 무언가를 말하고 답했다. 피하고, 우물거리고, 생략하고, 넘어가고가 간간히 등장하면서 강연자는 자신의 로직에 충실했다. 메모를 안하는 나로서는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강연의 구조가 논리적이라는 인상은 받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반쪽은 내가 내 생각을 더해서 조합해 낸 것들이다. 거기에 강연자의 탈주본능은 되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강연자는 지식을 전당할 의무가 있다? 없다! 강연자는 자신의 말을 자신의 방식으로 전달을 하고,수강자는 자신의 말로 정리를 한다..... 대충 내가 생각하는 강의의 구조다... 그런 것들이 '탈주'를 낳는다.  

강의자는 20세기 초엽부터를 강의의 초두로 삼는다. 그전이 개인과학자, 즉 천재가 과학을 발명하는 시대라면 20세기부터는 과학자 수가 급속히 팽창한다. 시기적으로 양차대전에 조응한다. 그리고, 윤리가 과학세계에 등장한다. 전쟁에 복무한 과학자에게는 죄의식이 드리운 것 일까 아니면 윤리가 제어하지 않는다면 과학의 폭발해 버리는 것 일까? 양차대전후 뚜렷한 변화는 과학에 윤리가 요구되고 과학이 제도가 되는 것 이다. 

최초에 과학을 지원한 스폰은 정부다. 정부는 왜 과학을 스폰할까? 과학엔 정부 밖에 스폰이 될 수 없었을까? 양차대전은 과학자를 국가과학자로 양성하는 계기가 된다. 국가가 강화되고 과학은 국가에 복속된다. 이 구도는 그후 80년대가 되어 그 주인이 자본으로 전환될 때 까지 우세한 구도다.   

2차대전후 동서냉전이 심화된 것은 이 구도를 계속 유지, 존속, 재생산한다. 대체로 강의에서 노출된 정보들은 미국위주다. 그러나 이 구도는 다만 미국에만 한정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전세계적인 현상이라고 강의자는 평가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다면 강의의 스토리텔링은 완결되지만 너무 단순화된 감이 든다.  

이번 강의는 한편의 뛰어난 스토리텔링이다. 책도 궁긍적으로 일정한 스토리텔링에 기초해 있을 것이다. 스토리텔링이 결여된 것은 받아드릴기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고, 잊혀지기도 쉽다. 이것은 스토리텔링의 장점이다. 학술논문이 아닌 다음에는 스토리텔링이 필요불가결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은 단점도 있다. 그걸 기억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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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rallax View (Paperback)
슬라보예 지젝 지음 / Mit Pr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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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젝을 앍는 이유는 주변부의 땅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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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기술 - 승리하는 비즈니스와 인생을 위한 33가지 전략 로버트 그린의 권력술 시리즈 1
로버트 그린 지음, 안진환 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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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쓰려다 보니 이 책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부터 고민이 되었다.

병법서? 전쟁교범? 물론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처세술 서적?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세련되고 풍부한 책이다. 그래서, 책의 부제를 따서 '승리하는 비즈니스와 인생을 위한 전략지침서'로 이해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특히 자신을 진보적이거나 좌파적으로 규정하는 사람은 경쟁과 갈등이라는 것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평화와 공존, 평등과 같은 것을 우월한 가치로 말한다.

그런데, 사실, 난 이런 사고에 반대한다. 비현실적이라는 진부한 주장이 아니라, 너무 나이브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고작 '사는 이야기'나 하는 한심한 민초들이나 생산해 내는 진보와 좌파의 주장들에는 이제는 지쳤다.

우리는 살다보면, 수동적으로라도 '경쟁'과 '갈등'의 상황에 부닥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오랫동안 배운 국민윤리의 덕목에서는 '양보'하라고 가르치고, 최근에는 조절하거나 타협하라고 충고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니체와 같은 철학자가 보기에는 이것은 지배자들이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주입시킨 '노예의 철학'이다. 물론, 이견은 있을 것이며, 양보를 해야하거나, 조정과 타협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전쟁의 기술>에서는 그럴 경우 가차없이 전쟁을 벌일 것을 권한다. 목표는 나눔이 아니라, 승리이며, 경우에 따라서 적들(경쟁자, 갈등자)에게는 재기가 불가능한 가차없는 파멸을 선사한다고 해도 용인이 된다고 한다.

방법론상에서도 우리가 오랫동안 배워온 정정당당한 경쟁을 포함해서 '모략'과 '음모'도 다 허용하고 있다. 다분히 마키아벨리적인 주장들이 <전쟁의 기술>에는 많다.

<전쟁의 기술>은 동서양의 병서, 전쟁 사례 등 부터 사례까지 아주 풍부하다. 말하자면 승리를 위한 케이스스터디(사례연구)인 것이다.

책은 총 5부로 구성이 되어 있다. 자기준비의 기술에서 시작하여 조직의 기술, 방어의 기술, 공격의 기술, 모략의 기술에 이르기 까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에 있어서는 손자병법의 내용, 미야모토 무사시의 사례, 나폴레옹, 알렉산더, 세계1차대전과 2차대전 당시, 주요인물들의 의사결정들에 이르기 까지, 동서양의 사례가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참, 재미있게 적을 죽이고(?) 제거하는 방법을 배운다.

우리가 읽어온 수많은 책들이 대동소이하게 니체가 말한 '노예됨의 철학'을 설파한 것이라면, <전쟁의 기술>은 '주인됨의 철학'과 그 전략론을 알기 쉽게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잔인하고, 살벌한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함께 공존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 지, 자기만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할 지 고민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에게도 '노예됨'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임을 자각시키고, 보다 철저하고 치열하게 살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의 기술>을 남녀노소 모든 독자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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