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티코 브라헤(1536~1601)는 방대한 천체 관측 자료를 남겨 유명한 천문학자다.
그의 자료들은 제자이자 조수였던 케플러에게 넘겨졌고, 케플러는 후에 뉴턴에게
영향을 준다. 그런데 브라헤는 한 귀족과 칼싸움을 하다가 코를 베어 평생 가짜 코를
매달고 다녔다고 하는데, 싸움의 원인이 더욱 가관이다. 한 수학 문제에 대해 서로
자신이 구한 답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브라헤의 엽기적인 고집 때문인지,
그는 중세 우주관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웨덴의 카를 셸레(1742~1786)는 가난과 빈약한 실험 장치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투지와 노력으로 성공한 화학자이다. 산소를 발견한 업적은 억울하게 프리스틀리에게
빼앗겼지만, 염소의 발견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셸레는 꼼꼼한 성격 탓에

화학 물질을 직접 맛을 보고 확인해야 만족했다. 비산, 염화제이수은, 시안화수소와
같은 독극물까지 직접 맛을 보는 엽기적인 행동을 했으니, 한창 나이에 세상을 등질수밖에 없었다.




토마스 에디슨
(1847~1931)은 발명왕이란 영예를 간직하고 있는 미국의 과학자이다.
무려 1천 93개의 특허를 얻어 세계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발명품 중에 사형집행에
사용되는 '전기의자'도 포함되어 있다. 더욱이 자신이 못마땅한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전기의자를 사형 집행에 사용하도록까지 노력했다. 에디슨은 자신의 사업을 위해 교류가
직류보다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개와
고양이를 교류 전류로 태워 죽이는 엽기적인 실험을 반복했는데, 이 때문에 근처의 개와
고양이의 숫자가 1/10로 줄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에라토스테네스
(기원전 276~194년경)는 처음으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해 낸 유명한
그리스의 천문학자이다. 그는 이 연구를 위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라는 도시에서 하지날 정오의 태양 고도를 측정했다. 그런데 두 도시의 고도 차이를 이용해 지구둘레를 계산하기 위해서는 두 도시 사이의 거리가 필요했다. 결국 에라토스테네스는
자신의 노예에게 몇 발자국인지를 세도록 시켰다. 그의 발상도 엽기적이지만,
약 800km나 떨어진 거리를 걸으면서 발자국을 정확히 센 노예도 보통은 아니다.



아랍의 자비르 이븐 하이얀(721~815년경)은 '아랍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명한
연금술사이다. 그는 무려 2천권 이상 되는 책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데, 정말 이
책들을 그가 모두 쓴 것이라면, 그는 엽기적인 저술가로 기네스북에 오를만하다.
책의 진위는 어찌 되었건 자비르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조금 비위가 상한다.
소변을 가열하면서 관찰하다가 암모니아를 발견한 것이다.




우주가 불, 물, 흙, 공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4원소설을 주장한 그리스의

엠페도클레스
(기원전 490~430년경). 그는 불을 연구하기 위해 시칠리아섬에
에트나 화산을 찾아갔다. 그런데 화산을 관찰하던 엠페도클레스는 돌연
분화구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 이유에 대해 다양한 설이 존재하지만, 혹시
그는 분화구 속으로 떨어지면서 무엇을 관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프랑스의 장 안토니 놀레(1700~1770)는 삼투 현상을 처음으로 발견한 화학자이다.
그는 전기 분야에도 큰 관심을 보였는데 전기를 모으는데 사용되는 '라이덴병'(오늘날의 충전지)은 그가 명명한 용어이다. 수도원장이기도 했던 놀레의 실험은
엽기적으로 잔인했는데, 한 예로 프랑스 왕과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백 80명의
근위병들이 서로 손을 잡고 원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병사 두 명에게 충전된
라이덴병을 잡게 했다. 당연히 모든 병사는 전기 때문에 심한 쇼크를 받고 하나같이
하늘로 펄쩍 뛰어올랐다. 놀레가 이 실험 결과에 만족했음은 물론이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비행을 성공하기 무려 8백 년 전에 비행을 꿈꾸던
선구자가 있었으니, 그는 11세기 영국 트셔 대수도원의 수도사였던
에일머이다.
에일머는 하늘을 날기 위해 새의 깃털로 된 날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도원의
탑에서 비행을 시도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고 땅과 정면으로 충돌해 두 다리가
모두 부러져버렸다. 너무 무모한 시도여서 엽기적이지만, 사실 인간이 하늘을
나는 꿈을 실현하기 전까지 용감한 사람들의 희생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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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1장은 시작과 끝이라서 막막하기도 합니다. 어디서 마쳐야 할지 그 끝을 알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일단 어제 내용에 이어서 가겠습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 出而異命.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차양자동, 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도그마를 거부하는 선언이 가장 먼저 나왔습니다. 수많은 교리를 만들고, 수많은 탑과 수많은 우상을 세우는 오늘날을 돌아보게 됩니다. 수단이어야 할 말과 글에 갇힌 사람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내 사상과 생각이 옳다고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독선과 아집 속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적대시하는 우리를 보게 됩니다.


일단 이어갑니다.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라. 이름이 없는 것에서 천지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름이 있는 곳이 만물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노자는 있음과 없음이 다르지 않고,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길고 짧음이 다르지 않다고 역설합니다. 절대선을 부정하는 선언이 아닐까 합니다. 상대주의라고 잘라서 표현하기에도 부담스럽지만 그냥 느껴 봅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세상 만물이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始와 母는 같은 뜻이겠지요. 우리의 생명이 어머니로부터 비롯되는 것처럼 천지만물의 시작이 이름 있는 것과 이름 없는 것에서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이 부분에서 저는 막연하지만 우주가 떠오릅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우주 말이죠. 잠깐 사진을 한 장 감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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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미터.
사람들의 일반적인 스케일이죠.
10월의 따뜻한 날 한 남자가 공원에서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의 곁에는 여러가지 물건들이 있군요.
이 사진의 작은 사각형 안의 공간이 다음 사진 내용이 되는겁니다.

"인간은 모든것의 척도이다."
소피스트였던 프로타고라스의 말을 인용하며, 인간에서부터 시작해봅니다.

이 그림을 잘 기억해주세요.



10센티미터.
더 조밀한 비율입니다.
이 사진은 손등을 조금 확대해서 보여준 그림입니다.



1센티미터
손등의 그림을 더 확대한 모습이죠.
손등의 주름은 그만큼 손이 유연성이 있다는걸 의미한답니다.



0.1 센티미터(1밀리미터)
살 아래엔 작은 혈관이 흐르겠죠?



0.1밀리미터.

머나먼 별이 익숙하지 않은것처럼,
우리의 몸이라고 해도 이렇게 확대된 부분은 익숙하지가 않군요.



0.01밀리미터
하얀 림프구 세포입니다.



1마이크로미터.
세포의 핵으로 들어가는겁니다.



1000 옹스트롬. (0.1마이크로미터 , 0.0000001미터)
기다란 분자 구조가 얽히고 섥혀서 세밀한 DNA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DNA구조는 모든 세포 내의 핵에 존재합니다.



100 옹스트롬
DNA의 2중 나선 구조지요.



10 옹스트롬
분자단위의 스케일입니다.



1 옹스트롬
원자 단위의 스케일입니다.
핵 주변으로의 전자 구름이 보입니다.



0.1옹스트롬
탄소원자입니다.



1 피코미터 (0.000000000001미터)
원자의 핵.



0.1 피코미터
좀 더 가까이서 볼까요?



0.01 피코미터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는 원자의 핵 입니다.



0.001 피코미터
현대 물리학에서 최근에 탐구하기 시작한 양성자의 안쪽 부분이지요.



0.0001 피코미터
더 확대해보면 무엇이 있을까요...




다시 시작합시다.



다시 인간으로부터 다시 시작해봅시다.



10미터.
남자와 여자가 같이 공원에 소풍을 온 그림이죠.



100미터.
고속도로와 부두가 보이네요.



1킬로미터
도시가 보입니다.



10킬로미터.
도시의 중심도 보이고, 여러가지가 보이는군요. 모든것이 나타납니다.



100킬로미터.
시카고의 거대도시 영역입니다. 더불어 호수의 끝이죠.



1000킬로미터.
상공의 낮은 궤도에서 관찰한 모습입니다.
1000만이 넘는 사람들의 거주지가 보이지요.



만 킬로미터.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어두운 바다. 갈색의 땅. 동쪽으로 도는 지구.
1967년이 되서야 인간은 지구를 지구 밖에서 관찰할 수 있게 되었지요.



10만 킬로미터.



100만 킬로미터.
달의 궤도입니다.



1000만 킬로미터.
지구가 태양을 도는 궤도입니다.



1억 킬로미터.
다른 행성들의 궤도도 보이는군요.



10억 킬로미터. (~7AU)
태양계입니다. 다른 행성들은 잘 보이지 않지만
태양 하나는 참 잘 보이네요. 멀리 목성이 궤도가 보입니다.



100억 킬로미터.
태양계 행성들 보일건 다 보입니다.



1000억 킬로미터.
태양도 작게 보이는군요.



1조 킬로미터.
오직 태양만이 보입니다.



10조 킬로미터 (대략 1광년)
빛이 1년을 여행해야 갈 수 있다는 거리인 1광년입니다.



10광년 (3파섹) 빛의 속도로 10년



100광년 빛의 속도로 100년
참 넓기도 한 우주~



1000광년
슬슬 은하의 윤곽이 드러납니다.



1만 광년
커다란 별들도 전체적으로 봤을땐 작은 입자같군요..
하나의 구름처럼 된 듯한 모양입니다.



10만광년 
..



100만광년
더 넓게..



1000만광년(3메가 파섹)
그렇게 거대한 은하도 하나의 점으로..



1억 광년
우리 은하가 겨우 보이는군요..



10억 광년
대부분의 공간이 이렇게 비어있는것처럼 보입니다..
더 먼 공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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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사진을 보면서 ‘인간이 곧 우주’라는 너무도 당연한 말의 뜻을 늦게서야 깨달았습니다. 한낱 먼지같은 삶을 사는 우리가, 자본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고, 또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경쟁이라는 룰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며, 타인을 물리치고 살아남기 위해 생존의 투쟁을 펼치는 모습이 너무나도 가련하게 떠오릅니다.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라면, 내가 너고, 네가 나라는 말인데요. 이는 곧 부분이 전체요, 전체가 부분이라는 말이 될 것이고, 내가 우리고, 우리가 나라는 것인데요. 역시 짧게 표현하면 공존이 아닐까 합니다.


더러 노자의 도덕경을 현실도피나 허무주의 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결코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근원적으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게 도덕경이 아닐까 합니다.


자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이고, 그래서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라. 此兩者同, 出而異命이라. 보려는 마음이 없이 보면 오묘한 것을 보게 되고, 보려는 마음으로 보면 껍데기를 보게 된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리고 이 둘은 같은 것인데 나옴으로써 그 이름을 달리한다, 이렇게 되겠네요.


妙(묘)는 불가의 空(공)으로 보여집니다. 오묘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요. 관념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우주가 공의 세계가 아닐까 합니다. 徼(요)는 현상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를 말하지요. 불가의 色(색)으로 일컬을 수 있겠습니다.


결국 노자의 말씀은 공즉시색, 색즉시공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결국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다만 이름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것만 믿으세요’라는 광고 카피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물질만능주의를 달리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소비를 촉구하는 광고의 홍수 속에서 디자인과 색상이 상품의 본질을 그대로 둔 채 새로운 물건으로 둔갑하고, 그것은 유행과 패선, 혹은 트랜드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되어 본질을 놓치게 하고 있습니다.


수학에서 미분과 적분이 있습니다. 나누고 더하는 것인데요. 끝없이 나누고, 끝없이 더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을 무한대라 일컫지요. 쪼개고 쪼개어 갈 때 그 무한대는 無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완전히 무로 나눌 수도 없으면 그것이 有이지요. 그러니 유와 무가 다르지 않다는 거지요.


우리 인간사회를 보면 거대한 구조 속에서 인간은 참으로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우주와 같다고 하지만, 실상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전쟁과 공포, 재해와 학살을 보노라면 우리 인간은 참으로 미미한 먼지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국가를 이야기하고, 민족을 이야기하는 그 모든 담론에서 인간 개개인의 존재는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극명한 반대로 개인주의의 만연으로 어느 인간은 온 우주를 품은 듯 세상을 호령하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하찮게 여기면서, 또 인간을 아주 극진한 존재로 만드는 이 모순을 해결하는 길을 노자는 제시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이라. 그 같은 것을 일컬어 신비롭다 하는데, 신비롭고 또 신비로워서 온갖 오묘한 것들이 드나드는 문이라. 즉 그 드나드는 문이 바로 道라는 것이지요. 절대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처님이, 노자가 도달한 그 경지가 절대경지겠지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그 모든 것이 드나드는 문이 도라고 한다면 우리가 말과 글에 얽매일 이유는 더욱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하여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어렴풋합니다. 뭔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알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됐든 현실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제 수준에서 느끼는 것은 개인과 집단, 인간과 자연,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유리되지 않고 하나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공존’이지요.


미국이 석유패권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민족끼리 나뉘어 학살을 서슴치않는 21세기의 모습에서는 결코 ‘공존’을 찾기는 힘들 터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나 이런 식의 패권주의로는 인류의 파멸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지금 당장 누리고 있는 개인의 물질적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안일하게 하루 하루를 살면서 외면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통찰하고 후세들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 인류가 나이고, 내가 인류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최소한 공존의 토대는 구축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일단 도덕경 1장을 마쳤습니다. 81장까지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굳이 시간을 정해놓고 해야 할 이유도 없고, 의무감을 갖고 억지로 해야 할 이유도 없겠지요. 그저 재미있게, 생각하며, 느껴가며, 그렇게 가보는 거지요...

 

 

( http://blog.daum.net/mirec/2232315 에서 퍼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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