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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오랜만에 읽는 성장소설이었다. 그다지 부담없는 분량에 몇장 넘겨보니 가벼운 문체며 간결한 문장들이 눈에 쏙쏙 들어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쉽고 재미있게 읽히리라고 예상은 했었다. 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심각한 완득이의 표정이라던가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키득키득 웃기 바빴다. 내가 이렇게 재미있는 성장소설을 전에 읽어본 적이 있었던가?
한참 감수성 예민한 시절 아무래도 공감이 쉽다는 이유로 성장소설을 많이 읽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의 내 처지가 여학생이었다는 이유에서 여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많이 읽었고, 그 이야기는 하나같이 세상에 대한 냉소와 두려움, 삶에 대한 혼란스러움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간혹 여학생들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들을 동경의 마음으로 품기도 하였을 정도로 내게 성장소설은 오래전 일기같은 느낌으로 남아있다.
물론 외국 작가들이 펴낸 소년의 비밀일기 시리즈 같은 책들도 읽어봤고, 대문호의 사춘기 시절이라던가 젊은 날의 방황을 다룬 작품들도 읽어본 바 있지만 성장 소설이라 함은 대체로 늘 성장하는 시기의 치열한 고민들이 진지함을 놓치지 않은 채 전개되기 마련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완득이>를 읽는 내내 나는 새로운 느낌의 성장소설을 발견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도 그럴것이 이것은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게 하는 명랑만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고, 약간 허무하다 싶은 결말마저도 완득이스럽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김려령이라는 괜찮은 작가가 쓴 소설이라기보다는 절대 소설가가 될 리 없다고 단언하던 완득이가 기록한 자신의 일기에 더 가깝다. 그 점에서 이 작가는 꽤나 완득이스러운 이야기를 잘 완성해냈다고 생각한다.
완득이의 삶이 분명 모두가 바라는 삶의 모습을 닮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녀석이 적당히 만족스럽게 사는 법을 터득해버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 녀석 꽤 낙천적이다!) 물론 그만큼 살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예술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와 사람을 믿는 삼촌 남민구가 있다. 완득이 제발 하나님이 죽여줬으면 했던 똥주도 사실은 완득이를 살게 하는 사람이며, 어느 순간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그 분도, 싸움이 아닌 스포츠에서 지는 법을 알려준 관장님도 모두가 완득이로 하여금 조금씩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다.
완득이는 썩 똑똑한 아이도 못되고, 문장을 길게 말하거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지어내는 아이가 아니다. 열일곱이나 먹은 이에게 아이라 하니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긴 하지만 여하튼 아버지가 믿는 것만큼 글재주가 좋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은 자신의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전하는 재주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한낱 웃음거리 정도에 지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가 절대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이웃들의 이야기들이 맛깔나는 양념처럼 때로는 재미나게, 때로는 아련하게 배어있다.
담임 똥주의 말을 빌어 이들의 관계는 참으로 정직하다. 이들 모두는 이들보다 더욱 잘 살기도 하고 소위 정상적으로 사는 것 같은 사람들보다 서로에게 본질적으로 진실된 됨됨이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어느 사이부터 훈훈한 기를 뿜어낸다. 당장 똥주만 하더라도 이런 못된 교사가 다 있다며 혼자 역정을 내었지만 조선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며, 사람은 더 겪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듯, 똥주 이 사람, 이런 저런 사정을 다 알고 나니 참 괜찮은 인간 아닌가 바로 고개를 숙이게 되더란 말이다.
성장소설이 이만하면 됐지 않은가.(아니라면, 이런 분위기의 성장소설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유쾌했다. 사회가 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도 재인식했다. 완득이가 '가족', '도전', '미래', '꿈', '즐거움', '사랑' 등등의 가치를 깨달아가는 과정, 이웃과 어울리며 꾸밈없이 살아가는 솔직하고 의기양양한 17세 완득이의 성장일기.
오래된 명랑만화같기도 하고, 희망이니 사랑이니 뭔가 입에 올리면 상투적이고 촌스러울 것만 같아하던 완득이처럼 적당히 촌스러운(?) 표지도 재미있게 느껴진다.
청소년들이 읽어도 마음에 남는 것이 분명 있을 책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최근에 읽은 어떤 책보다 쉽고 즐거운 만남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저기요!"
그분이 돌아봤다.
"다음에는. 존댓말 쓰지 마세요."
"네."
얼마나 교양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자식한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지 모르겠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 잘사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과 결혼해 여전히 가난하게 살고 있다. 똑같이 가난한 사람이면서 아버지 나라가 그분 나라보다 조금 더 잘산다는 이유로 큰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한국인으로 귀화했는데도 한국인에게는 여전히 외국인 근로자 취급을 받는 그분이, 내가 버렸는지 먹었는지 모를 음식만 해놓고 가는 그분이, 개천 길을 내려간다. 몸이 움직인다. 내 몸이 미쳐서 움직인다. 저 꽃분홍색 술이 달린 낡은 단화 때문이다. 나는 내려가는 그분에게 달려갔다.
<완득이> 142-143쪽 중에서
덧. 재미삼아 작성해본 완득이네 관계도 ^^ (별 것은 아니지만.. 클릭해야 글씨가 보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