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아이티, 보편사 엑스쿨투라 1
수잔 벅모스 지음, 김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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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벅모스의 <헤겔, 아이티, 보편사>는 짧지만 묵직한 책이다.

주제는 독창적이고, 이를 다루는 솜씨는 긴장감 넘치며, '보편사'의 비전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탈식민주의 담론을 다루는 책은 많다. 특히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노예혁명인 '아이티 혁명'을

다룬 책으로는 C.L.R. 제임스의 <블랙 자코뱅: 투생 루베르튀르와 아이티 혁명>, 트루요의 <과거 침묵시키기: 권력과 역사의 생산> 같은 책이 이미 번역되어 나와 있다.

이 책 <헤겔, 아이티, 보편사>가 지닌 차별점은 아이티 혁명 자체에 논의의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헤겔'이라는 서구 근대지성의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 상징하듯, 이 책은 아이티 혁명을 바라보는 서구 지성의 시선을 냉철하게 해부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그러면서 서두에서 저자가 밝히듯, '감히' 근대의 기획을 되살리려 한다.  

이 책의 구성은 변증법적이다. 제목의 세 단어 '헤겔, 아이티, 보편사'가 이미 이를 암시한다.

헤겔에게 아이티는 지우고 싶은,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타자이다. 그것은 관념적으로는 살아 있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영감을 주었을 수도 있지만, 역사적 현재에서는 침묵 속에 갇혀 있다.

정치적으로는 헤겔이 '하인'처럼 프로이센의 비위를 맞추었다는 비아냥도 그리 틀린 지적은 아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그 자체로 훌륭했지만 그 현실적 구현이라고 볼 수 있는 '아이티 노예 혁명'에 헤겔은 침묵했다. 그러나 그것은 헤겔만이 짏어질 책임은 아니다. 서구 근대 기획의 한계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마르크스조차도 이런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시야에는 노동자만 있었지 흑인노예의 존재는 배제되었다.

벅모스는 근대가 꿈꾸었던 '보편성의 신화', 그 진정한 가능성을 서구가 아닌 아이티에서 찾는다. 서구 근대가 실패한 지점으로 돌아가, 이백년 동안 봉인된 침묵을 깨고 보편사의 기획을 되살리는 것이다.

오늘날 아이티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불과하지만, 이백년 전의 아이티는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진보된 나라였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생도맹그 섬에서 일어난 노예 혁명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이어받았고 인종과 부족 간 분열을 통합하여 이루어낸 혁명이었다. 당시 많은 진보적 백인들이 혁명을 지지했고, 아프리카에서는 서로 적으로 싸왔던 많은 부족들이 하나로 뭉쳤다.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기반은 민족도 인종도 계급도 아닌, 구속에 대한 '해방의 의지'였다. 이 테제는 지금 우리에게도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연대는 뿌리와의 단절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자, 보편 인류의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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