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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시대 - 에릭 홉스봄 자서전
에릭 홉스봄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한마디로 좌파 역사가가 바라본 20세기 비망록이다. 좌파 사회주의자 또는 마르크스주의자에게 20세기는 애증의 세월이었다. 홉스봄 자신이 태어난 해인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으로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했고 쿠바 혁명과 베트남전에서 승리도 맛보았지만, 결국 '정치적으로' 사회주의는 몰락했다. 그런데도 홉스봄은 심드렁하게 이 시절을 '재미있는 시대(interesting times)'라고 회고한다.(이 책 원서 제목이 '재미있는 시대'다.) 반어법이다. 골수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필요하다면 '무장 항쟁'도 지지한다는 그에게 20세기가 그저 재미있었을 리 있겠는가? 어쩌면 책과 글과 강의로 점철된 지식인으로서의 자조일지도 모르겠다.(자신의 현실참여 또는 공산당 활동을 애써 소개하고는 있지만 내가 보기엔 참으로 무력한 '저항'이다. 물론 학자는 학자로서의 소명이 있으므로 비판할 거리는 못된다. 그런 그에게 '재즈'는 출구이자 도피이고 위안일 것이다. 홉스봄의 인간미, 혹은 약자에 대한 애정이 투영된 대상이 재즈라고 봐도 되겠다.)
홉스봄의 저서 가운데 [Uncommon People - Resistance Rebellion and Jazz]라는 흥미로운 책이 있다. 국내에는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 원서의 부제를 제목으로 삼았다. 그런데 원서의 제목 'Uncommon People'은 반어법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interesting times'라는 제목도 사실은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이 다루는 대상은 노동자, 농민, 흑인들 같은 'Common People', 즉 보통의 평범한 민중들이다. 사회의 약자들. 그렇게 무력해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결국에는 '비범한(Uncommon)' 역사의 주인공 아닌가라는 물음이 홉스봄의 역사관과 인간관의 출발점이다.
20세기를 좌파의 시선으로 회고하는 이 책 [미완의 시대]는 지리멸렬했던 좌파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20세기 좌파는 (홉스봄 자신도 포함해서) 낭만적 이상주의, 맹목적 집단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자본주의가 내부로부터 사람들을 변화시킬 때 여전히 조직과 혁명의 논리를 완고하게 고수했다. 스스로도 자본주의를 체화해가면서 머리와 입으로만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은 꼴이다.(물질적 번영을 누린 서구의 좌파가 특히 그렇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도 그런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러니 그 많던 사회주의자들이 20세기 후반에 보수파 또는 신자유주의로 '전향'한 사실이 놀랍지도 않다. 이 책을 보다 보면 20세기에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맞서 얼마나 무력했고 치밀한 전략이 부재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영국 좌파의 역사는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현재 한국은 영국에서 공산당이 유명무실해지고 노동당마저 몰락한 70년대 대처의 등장 시기와 비슷하다. 영국에서는 그후 90년대 후반에야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이 정권을 잡지만 이들은 이미 신좌파 또는 신자유주의 좌파 아니었던가. 우리 정치는 언제나 그렇듯 이런 변모를 훨씬 짧은 시간에 압축해서 보여주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결국에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삶의 태도로 귀결된다. 어느 한쪽이 '지나친' 헤게모니를 쥘 때 그 체제는 '괴물'로 변한다. 20세기에 사회주의가 내내 총을 들고 '꿈'을 쫓았다면 자본주의는 배불리 먹이면서 괴물을 키웠다. 나는 홉스봄이 자서전을 통해 이 시대에 남긴 마지막 물음은 '이 괴물 같은 자본주의를 이제 어찌할 것인가'라고 본다. 그리고 이 물음은 시간이 갈수록 절실하고 절박해질 것이다. '물질적 풍요' 뒤에 숨어 있는 '야만주의'를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홉스봄은 이렇게 말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사회주의냐 야만주의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사회주의에서 등을 돌린 것을 세계는 다시금 후회할 것이다."([미완의 시대], 459쪽)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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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번역은 매끄럽게 잘 읽히는 편이다. 난해한 문체로 알려진 홉스봄의 글을 보통 이만큼 소화하기는 쉽지 않은데, '윤문'이 지나치지는 않았나 의심도 들지만 학술논문이 아닌 자서전이므로 홉스봄 자신도 편한 문체로 글을 썼으리라 짐작하고 넘어간다. 다만 꽤 빈번히 등장하는 오탈자가 눈에 거슬리고 338쪽과 343쪽 하단의 주석이 서로 바뀌었는데, 2쇄인데도 고쳐지지가 않았다. 애교로 넘어가기엔 지나친 실수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