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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 포스트모던 시각으로 본 초현실주의와 프로이트
할 포스터 지음, 전영백과 현대미술연구팀 옮김 / 아트북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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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문학, 정신분석
프로이트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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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귀환
할 포스터 지음, 이영욱 외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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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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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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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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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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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문화사 1840-1900
스티븐 컨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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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예술의 종말과 미래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1924- )의 책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는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된 예술/미학 관련서로서 단연 손에 꼽을 만한 책이다(모스크바에서 이 책을 검색하고 잠시 놀라고 반가웠다). 하지만 '경제난'으로 구입을 망설이다가 얼마전 미술 전공자 몇 분과 독회를 꾸리게 되면서 이 책을 드디어 손에 들게 되었다. 마침 그해 여름에 나온 미국의 모더니즘 최고의 미술비평가로 꼽히는 클레멘트 그린버그(1909-1994)의 에세이집 <예술과 문화>(경성대출판부, 2004)도 번역/소개된 만큼 미학과 예술철학에 관심있는 독자들로선 한번쯤 시간을 내봄직하다.

참고로 평론가 그린버그의 짝패는 액션페인팅의 주창자 잭슨 폴록이며, 이 두 사람의 주거니받거니 덕에(거기에 CIA가 뒤를 봐줬다고도 하고) 2차 대전 이후 세계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건너가게 된다. 단토는 '그린버그 이후'의 대표적인 비평가이고자 한다(이미지들은 차례대로, 아서 단토와 'After the end of art' 원저, 그리고 그린버그와 'Art and Culture' 원저). 그의 이론적 영감의 원천은 앤디 워홀. 폴록과 워홀에 대해서는 각각 영화 <폴락>(2000)과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1999)를 참조할 수 있겠다. 나는 몇년 전에 <폴락>은 본 적이 있는데, 볼 때는 몰랐지만 거기 나오는 비평가가 혹 그린버그가 아닌가 싶다. 단토의 책 제4장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역사적 비전'에 할애돼 있다.

현재 컬럼비아대학 철학과의 명예교수로 소개돼 있는 단토는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과학철학과 분석철학에서 시작해 역사철학, 예술철학 등 다방면에 걸친 수십 권의 저서를 갖고 있다(그는 1984년부터 <네이션>지의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하니까 20년 이상 현역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셈이며, 비평서들도 꾸준히 묶어내고 있다. 최신간은 작년에 출간된 'Unnatural wonders'). 그 중 <사르트르의 철학>(민음사, 1985)이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실상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이후에 <철학자로서의 니체>(1965, 작년 2005년에 개정판이 나왔다)가 그의 또다른 주저라는 걸 알게 됐고, 도서관에서 그의 역사철학서도 발견하면서 '스케일'에 놀랐다('Narrartion and Knowledge'가 그 책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는 예술철학자나 미술비평가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고, 단토 자신도 그걸 더 원하는 듯하다. 그럴 경우 그의 이름과 함께 나란히 기억될 테제가 바로 '예술의 종말'론이다. <예술의 종말 이후> 한국어판에 붙인 서문의 끝자락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예술의 종말 이후>를 한국어로 번역하기로 한 결정이 이 책의 테제가 진리임을 증명하고 있다는 생각을 억누를 수가 없다!" 이러한 그의 기대가 백일몽만은 아닌 것이 독어권 학자인 미카엘 하우스캘러(혹은 '미하일 하우스켈러')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철학과현실사, 2004, 이 책의 다른 번역본이 <예술앞에 선 철학자>(이론과실천, 2003)이다)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미학이론가'들이 바로 플라톤부터 단토까지이다. 이미 '명예의 전당'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놓은 셈.   

<예술이란 무엇인가>는 1974년생이라는 저자 하우스캘러가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내 룬트샤우 신문에 기고했던 16명의 사상가들의 미학 사상을 요약한 글 모음"이라는데, 단토와 함께 거명되고 있는 20세기 후반의 미학이론가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1924-1998)와 넬슨 굿맨(1906-1998) 정도이다(단토는 리오타르와 동갑내기이군). 그 정도면 단토의 지명도를 어림짐작해볼 수 있겠다. 한편, 단토와 교분을 나누었던 박이문 교수의 <예술철학>(문학과지성사, 1984) 등에서도 그에 대한 언급들을 찾아볼 수 있다(비록 그 책에서 박이문의 경쟁상대는 단토가 아니라 '제도로서의 예술'을 주장했던 조지 디키(딕키)였지만. 알라딘에는 저자가 '조지디키'로 돼 있다. 현재로서 단토의 지명도는 디키를 넘어선 듯하다). 한편, 하우스캘러의 책은 너무 소략해서('책'이라기보다는 '팜플릿'이다) 말 그대로 '30분에 읽는 예술이론'이다.

 

 

 

 

'예술의 종말(the end of art)'라고는 하지만, 이때의 '예술'은 '미술'을 가리킨다(영어에서 'art'란 단어는 예술과 미술을 구분없이 지칭하기 때문에 우리말 번역에서 간혹 애를 먹인다). 곰브리치(1909-2001)의 고전 'The Story of Art'가 <서양미술사>(예경, 1999)로 번역되는 것처럼(곰브리치는 그린버그와 동갑내기로군). 이 예술 혹은 미술의 종말은 사실 여러 차례 주장되었었다. 세잔 이후에 미술은 끝났다는 둥, 뒤샹의 레디-메이드 이후에 미술은 이미 종쳤다는 둥.

 

단토의 경우 이 '미술의 종말'은 1965년부터이다. 일단 역자해설을 참고하면, 그에게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1964)인데(아래 이미지. 말 그대로 상품박스이다. 단 '미술관에 전시된'. 이게 '마트'에 있을 경우엔 별 문제가 없지만 '미술관'에 놓여 있을 때는 머리 아파지기 시작한다!), 그게 미술의 끝이자 역사의 끝이며, 이후는 '미술의 역사 이후의 시기(the Post-Hostorical Period of Art)'이다. 단토의 <브릴로 상자를 넘어서(Beyond the Brillo Box)>(1992)는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미술사는 이른바 이 '브릴로 상자'를 경계로 하여 '역사시대'에 '탈역사시대'로 구분된다는 얘기.  

그렇다면,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왜 그토록 충격적인 것인가, 혹은 충격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미술작품과 미술작품이 아닌 것의 차이를 더이상 식별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개나 소나, 혹은 비누박스나 라면박스나 다 '예술'로 둔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으므로). 적어도 외관상으로 똑같은 브릴로 비누상자와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그렇다면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미술에 대한 정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술의 문제를 감각(손)의 문제가 아닌 사고(머리)의 문제로 전환시킨다.

"그[단토]에게 워홀의 작품은 헤겔 이후 미학의 황무지에서 발견한 한 가닥 희망이었다. 그는 미술의 의미를 미술로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워홀의 작품에서 깨달은 바는 '어떤 것들이라도 작품이 될 수' 있으며, '미술이 무엇이냐는 점을' 발견하려면 '감각의 경험으로부터 사고로 방향을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미술이 외관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며, 궁극적으로 철학의 문제임을 알았다."(역자해설, 431쪽, 강조는 나의 것)

사정을 단토의 표현으로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이제) 우리는 예술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거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과, 한때 예술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보였던 속성들이 아예 없더라도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술작품의 외양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어떤 것이든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의 발견과 논리적으로 서로 맞아떨어지는 예술정의를 짜만들어야 했다. 어떤 것을 집어들고서 이것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 이제 논지를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역사는 종말에 도달하였다."(13쪽)

 

 

 

 

다시 말해서, 예술이 무엇인가를 규정해줄 수 있는 어떤 고유한 '예술성'의 목록을 우리가 제시할 수 없을 때 더이상 (예전에 정의되던 바의) '예술'은 없다. 예술은 끝났다. 예술은 종쳤다. 그럼, 뭐가 남는가? 폐허만이 남는가? 그건 아니다. 여기서는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외침을 다시 반복하면 된다: '만세!'(딸아이의 표현으론 '앗싸!') 해서, 예술 이후의 시대는 "심원한 다원주의와 완전한 관용의 시대"(24쪽)이다. 더불어, 예술에 대한 모든 규정과 종속으로부터 해방된 시대이다.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이다. 그들은 이제 어떤 것이 가능한지 않은지를 확증하기 위해 실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 고 미리 말해줄 수 있다. 예술의 종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오히려 역사의 종말에 대한 헤겔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예술가들의 상황이다."(17쪽)

이것이 헤겔리안으로 분류되는 단토의 '철학적 미술사'이다(비록 헤겔과의 차이도 그 자신은 분명히 하지만). 그리고, 그의 자평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술의 종말이라고 하는 테제는 철학적 미술사라 불릴 만한 것에 대한 하나의 기여이며, 혼돈스럽게 보이는 모던 미술에서 어떤 이해가능성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10쪽)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06. 01. 18.   

P.S. 앤디 워홀의 작업이 불러일으킨 충격으로부터 단토의 '예술의 종말론' 테제는 제창되었지만 <예술의 종말론 이후>의 서문에서 그가 상기시키고 있는 작업은 책의 권두화로도 쓰인 화가 데이비드 리드의 것이다. 당초 이 리드의 작업과 관련한 페이퍼를 의도했지만, 분량상 그 내용은 다른 자리에서 다루기로 한다.

P.S. 2. 얼핏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를 연상시키지만, 마이크 비들로(Mike Bidlo)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 아님 Not Andy Warhol (Brillo Box, 1969), 1991>이다. 일종의 '따라하기'이고, '한술 더뜨기'이고 패러디이다. 물론 비들로의 작업은 워홀의 작업을 전제로 한 것이며, 순서상 선행할 수 없다. 이것이 단토가 말하는 '역사적 불가능성'이고, 말하자면, 불가능성의 내러티브이다. 하여간에 이 정도면 갈데까지 간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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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모던, 포스트모던, 그리고 컨템퍼러리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의 1장 '모던, 포스트모던, 그리고 컨템퍼러리'를 정리하는 게 이 글의 목표이다(며칠 뜸을 들이고 있다가 다시 달려들었는데, 머리가 좀 무거운지라 잘 진행될는지는 의문이다). 단토의 책은 출판사 미술문화의 '동시대 미학' 1권으로 나온 책인데, 뒷갈피에 씌인 기획의 변을 보면 "동시대 미학 시리즈는 먼저 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주목받고 있는 단토의 주요 저서들을 통해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이해하고, 그 밖의 주요 미학자들의 저서들을 추가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적합한 예술철학을 소개하기 위해 기획되었다."고 하니까 단토의 저작들이 몇 권 더 소개될 듯하다. 기다려볼 만하다.

단토가 '미술의 종말'의 시점을 1964년 워홀의 '브릴로 상자' 이후로 잡고 있다는 얘기는 이미는 적은 대로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가 그러한 주장을 한 건 아니다. 역사적 사건의 의미란 언제나 소급적인 성격을 갖는바, 실상 단토가 '미술의 종말'에 대해서 감을 잡고 치고 나오는 것은 공교롭게도 그가 미술비평가로 데뷔한 1984년부터이다. 그러니 그는 미술비평가로서 자신을 신고함과 동시에 '미술의 종말'을 선언하고 나선 것. 'The End of Art'란 논문을 Berel Lang이 편집한 책 'The Death of Art'(1984)에 실은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예술의 종말에 다가가기(Approaching the End of Art)'를 한 박물관에서 강연하며, 이것은 그의 책 'The State of the Art'(1987)에 수록돼 출판된다(이 논문은 오늘 도서관에서 복사했다). 이후 다시 10년쯤의 시간이 흐른 뒤 저자는 '예술의 종말' 혹은 '예술의 종말론' 이후에 대한 회고와 소회를 밝히고 있는 것이 이 글의 서두이다. 37쪽의 각주에서 자세히 보고하고 있는 것이지만, '미술의 종말'에 대한 아이디어를 단토는 독일의 미술사학자 한스 벨팅(Hans Belting)과 공유한다. 벨팅의 책 <미술사의 종말(The End of the History of Art)>(독어 1983, 영역 1987)이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것이다: "대략 같은 시기에 독일의 미술사학자 한스 벨팅과 나는 서로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미술의 종말에 관한 글들을 출간하였다."(37쪽) 

참고로, 벨팅은 독일 마인츠대학의 미술사 교수이며, 대표작으론 <유사성과 현존(Likeness and Presence: A History of the Image Before the Era of Art)>(1984)이 있다. 단토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 책인데(74쪽 등), 국역본은 독어본의 제목에 따라 <이미지와 제의: 예술의 시대 이전의 이미지>라고 옮겼다.

  

<미술사의 종말>은 분량이 얇은 책인데(오늘 도서관에서 복사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책 <예술과 문화>(경성대출판부, 2004)의 갈피를 보니까 근간 예정인 도서이다. <미술사의 종말: 10년후의 결산>(가제). '경성대문화총서' 11권으로 예정돼 있는데, 쟌니 바티모의 <근대성의 종말>(2003)에서부터 시작된 이 총서에는 현대문화와 미학관련의 유익한 도서들이 다수 포함돼 있고, 근간예정인 도서도 여럿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가 되는 건 13권으로 예정돼 있는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가제)이다. 원제는 'Dreamworld and Catastophe'(MIT출판부, 2000)인데, 20세기 미국과 러시아의 '대중 유토피아' 문화에 관한 책이어서 작년에 구입해두었다. 한 러시아 철학자가 이 책과 관련하여 벅 모스와 나눈 대담 등을 포함하고 있는 대담집을 올해 번역할 계획도 갖고 있어서 <꿈의 세계와 파국>의 국역본 출간은 그만큼 기다려진다...

이런 식으로 진도를 뺀다면, 여름방학 때나 정리가 끝나겠다! 좀 서둘러야겠다. 상식적으로 말해두자면, 유행하는 종말론의 계보는 세 종류이다. 철학의 종말, 역사의 종말, 예술의 종말.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한마음사, 1992/1997)에 대해서는 군말이 필요 없겠다. 데리다의 <마르스크의 유령들>(한뜻, 1996; 절판된 이 책은 뜻없는 번역이고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역본이 나올 것이다, 나와야 한다)에는 이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 있다. 간단한 요약은 스튜어트 심의 <데리다와 역사의 종말>(이제이북스, 2002)을 참조. 그리고 철학의 종말은 하이데거의 테제이기도 한데, 전반적인 맥락에 대해서는 김상환, <예술가를 위한 형이상학>(민음사, 1999)이 유용하다(한국어로 이보다 더 유려한 문체의 철학서를 나는 아직 읽지 못했다). 그리고, 예술의 종말에 대해서라면, 가다머 등이 쓴 <예술의 종언 - 예술의 미래>(느티나무, 1993)가 있지만, 바티모의 <근대성의 종말>과 마찬가지로, 단토의 표현을 빌자면, '허공을 맴돌고 있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이지 못하다는, 즉 사변적이라는 얘기.

"(<근대성의 종말>에서) 바티모는 벨팅과 내가 다루고 있는 현상들을 우리 둘이 가지고 있는 관점보다 훨씬 더 폭넓은 관점을 가지고서 바라다 본다. 즉 그는 '기술적으로 진보한 사회'가 제기하는 미학적 물음들에 대한 철학적 반응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형이상학 일반의 죽음이라는 관점 하에서 예술의 종말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관점을 취하든간에 예술의 종말에 관한 그의 생각이 아직 '허공을 맴돌고 있다'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38쪽)

반면에 "우리의 주장은, 새로운 복합체의 형태가 여전히 명료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의 실천복합체가 다른 실천복합체에게 어떻게 자리를 내주게 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벨팅과 나는 둘 다 예술의 '죽음'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생각한 어떤 하나의 내러티브에 관해서 글을 쓰고 있었으며, 내가 보기에 종말에 도달한 것은 예술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 내러티브였기 때문이다.(...) 종말에 이른 것은 그 내러티브이지 그 내러티브의 주체는 아니다."(41-2쪽, 강조는 나의 것) 벨팅의 논지 역시 내러티브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이 점이 핵심이며, 단토에 예술종말론에 대한 오해의 대부분은 내가 보기에 이 '내러티브 종말론'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에 기인한다. "예술은 끝이 없다"는 식의 반론이 그것이다(그 경우에 예술은 시작도 없다).

 

 

 

 

그렇다면, 무슨 내러티브를 말하는 것이냐? "이에 관해서 서둘러 해명해야겠다." 단토가 많은 영감을 빌어오고 있는 것은 역시나 헤겔이다(세계/역사는 자기인식에의 여정으로서의 교양소설로서 현상한다). 제2장 '예술의 종말 이후 30년'에서 앞질러 인용하자면, "예술의 종말은 예술의 참된 철학적 본성을 깨닫게 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나의 사유는 전적으로 헤겔주의적"(85쪽)이다. 그러면서 그가 인용하는 것은 <헤겔미학>이다. 사소하지만, 원문에는 인용출처가 'Aesthetics,'로 돼 있고(38쪽), 국역본에는 'Aesthetics,'로 돼 있다(86쪽). 부분 인용하면:  

"우리가 예술작품의 내용과 표현수단, 그리고 이 양자가 서로 적합한지 부적합한지에 대해 이론적으로 고찰해보면, 우리는 예술작품을 바라보았을 때 내면에서 그것을 즉각적으로 향유하는 것 외에도 동시에 그 작품에 대한 어떤 판단을 내리고 싶은 충동으로 고무된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와서 예술은 예술 자체로서 이미 충분한 만족을 주었던 옛날과는 달리 이제 예술에 관한 학문이 필요해졌다. 즉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론적으로 고찰하도록 점차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을 예술로서 다시 회생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이다."(85-6쪽, 강조는 나의 것)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에서 '회생'은 '창조'로 옮겨져야 한다. 실제로 87쪽에서는 '창조'라고 옮겨졌다: "그리하여 예술계의 구조가 정확하게 말해서 '예술을 다시 창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예술이 무엇인지 철학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예술을 창조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예술에 대한 이러한 역사철학적 성찰은 역사의 특정한 단계에 도달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건 워홀의 팝아트가 인상파나 입체파 미술보다 먼저 출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이다. 그리고, 워홀의 '브릴로 상자'(1964) 같은 팝아트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게 된 시점도 20년 후인 1984년에 와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단토에 의해서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은'(70쪽) 해로 규정된 그 해인데, 이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음'이 실상은 컴템퍼러리, 혹은 탈역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이제 회고적/소급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된 것이지만, 워홀 이후에 미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과연 컨템퍼러리란 무엇인가?  

"현재의 역사적 감수성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현재가 어떤 위대한 내러티브에 더이상 속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활력 사이의 어딘가에 놓여 있는 우리의 의식 위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에 벨팅과 내가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이것이야말로 모던 미술과 컨템퍼러리 미술 사이의 예리한 차이,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에 대한 인식이 197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생겨나기 시작한 차이를 정의내리는 데 도움을 준다. 슬로건이나 로고도 없이, 어느 누구도 그것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지각하지도 못한 채 부지불식간에 시작하였다는 것이 컨템퍼러리의 특징이다."(43쪽, 강조는 나의 것)

그러니까 미술사의 '거대 서사'가 종결된 이후에 남은 건 이 '종말'의 사후 충격으로 겪게 되는 불안과 이상한 활력이다. 불안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아무런 지침도 운동도, 지향도 가능하지 않기에 비롯된다. "(모더니즘과 대조적으로) 컨템퍼러리 미술에는 과거의 미술에 반대하는 지침 같은 것이 없으며, 과거라는 것은 그에 대항해서 해방을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없고, 심지어는 자신이 미술로서 일반적으로 모던 미술하고도 전혀 다르다는 의식도 없다. 컨템퍼러리 미술을 정의하는 부분적인 특징은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이 과거의 미술을 자신들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컨템퍼러리 예술가들에게 이용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미술이 제작되었던 바로 그 정신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하는 작업: "오늘날 예술가들은 미술관을 죽은 미술작품들로 가득 채워진 장소로 여기지 않고 살아 있는 예술적 선택들이 가득찬 장소로 여긴다. 미술관은 끊임없는 재배열을 위해 활용가능한 열린 곳으로서, 사실 미술관을, 특정한 테제를 환기하거나 지지하기 위해 배열된 사물들의 콜라주를 만들어내는 데 쓰일 자료들의 저장고로 이용하는 하나의 예술형식이 지금 출현하고 있다."(44쪽)

문학의 경우에 견주자면, 작가들이 더 이상 현장이 아닌 도서관에서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겠다. <스무살>, <7번국도> 같은 소설과 <꾿빠이, 이상>,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사이에서 진동하는 김연수는 이러한 종말의 과정을 구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문학의 종말 이후'의 작가들은 모두가 '유령작가'이거나 박민규 같은 '무규칙이종작가'들일 테니까. 조금 시야를 확장하면, 우리는 'Endgame'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와 만날 수 있다. 종말의 문학, 혹은 종말 이후의 문학.   

 

 

 

 

단토가 '박물관 미술'의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은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설치작업 '말할 수 없는 것들의 유희(THE PLAY OF THE UNMENTIONABLE, 1990 / INSTALLATION AU BROOKLYN MUSEUM, NEW YORK)'이다.

그렇다면, 미술(예술)은 어떤 여정을 통해서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물론 길은 '막다른 골목'이어도 '뚫린 골목'이어도 모두 적당하다.)  단토는 세 가지 마디(에포크)에 의한 네 가지 단계를 설정한다. 이걸 내 식으로 정리하면, <예술 이전의 시대 -> 재현적 예술의 시대 - 자기의식적 예술의 시대(=모더니즘) - 예술 이후의 시대(=컨템퍼러리)>가 된다. 이러한 이행의 과정 중에서 단토가 가장 역점을 두어 설명하는 대목은 '모더니즘에서 컨템퍼러리로의 이행'이다. 모더니즘의 내러티브가 어떻게 종결되었는가를 철학적/이론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그의 '예술의 종말론'의 중핵인 것이다.

 

 

 

  

모더니즘 회회의 최고 이론가/비평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로 클레멘트 그린버그이다(<예술의 종말 이후>의 제4장이 그린버그에 할애돼 있지만, 여타의 장들에서도 그린버그는 저자에 의해서 끊임없이 참조된다). '인정투쟁'의 관점에서 보자면, 단토는 컨템퍼러리, 즉 탈역사 시대의 '그린버그'로 인정/평가받고자 하는 비평가적 욕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모더니즘에서 컨템퍼러리로'는 '그린버그에서 단토로'에 대응한다. 분량상 모더니즘과 컨템퍼러리에 관한 얘기는 다음으로 넘긴다. 

 06. 01. 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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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모더니즘 회화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에 대한 연속적인 브리핑이다. 가능하다면 이 글에서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글 '모더니즘 회화'(<예술과 문화>)를 함께 정리하고 싶다. 그러니까 그린버그가 정의하는바, 미술에서의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까지 다루고 싶은데, 그린버그가 준거로 삼고 있는 것은 칸트 미학이다. 칸트와 그린버그에 대해서는 김광명 교수의 '칸트와 그린버그: 모던 미학에 대한 논의', <칸트와 현대 영미철학>(철학과현실사, 2001)을 참조할 수 있다. <예술과 문화>의 역자가 그린버그 전공자로서 박사학위논문 외에 여러 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하고 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하여 보다 전문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참조해볼 수 있겠다.

 

 

 

 

단토의 문제의식을 보다 폭넓은 시야에서 보고자 한다면, 신시아 프리랜드의 <과연 그것이 미술일까?>(아트북스, 2002)가 도움이 될 듯하다. 단토의 추천사에 따르면, "신시아 프리랜드는 매우 명쾌한 책을 썼는데, 그의 명석한 철학적인 지성은 실제 예술작품에 의해 제기된 난해한 문제들을 매우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책에는 단토의 '예술의 종말론'도 2장의 '브릴로 박스와 철학적인 미술' 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예술의 종말 이후>를 읽은 독자라면 저자의 정리는 별로 새로울 게 없는데, 다만 80쪽에 실린 "앤디 워홀의 쌓아올린 '브릴로 박스'들이 예술인지 아닌지 곰곰이 생각중인 철학자 아서 단토"란 설명이 붙은 사진만은 흥미롭다(사실 이 사진 한 장이 모든 걸 말해준다!). 이 자리에 따오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한편, 미술의 개념/정의 못지 않게, 혹은 그 개념/정의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미술사에 대한 감각인데, 미술의 종말이라는 게 과연 무엇의 종말인가를 알기 위해서도 미술사에 대한 배경지식은 필수적이다.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아트북스, 2005)는 다양한 미술사의 가능성에 대해서 조감하게 해준다. 그리고 실제적인 서양미술사에 대한 리뷰는 <서양회화사: 조토에서 세잔까지>(시공사, 2000)의 도판들이 저렴하고 유용하다. <손에 잡히는 미술사조>(예경, 2005)는 저렴하지는 않은 책이지만, 미술사조의 '개념'을 잡는 데는 가장  간편하고 따라서 유용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는 것.    

지난번에 이어서 <예술의 종말 이후>의 1장 45쪽 이후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한다. 여기서 단토가 이야기하는 것은 철학에서의 모더니즘(=근대철학)이 데카르트적 코기토, 즉 (세계가 아니라)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미술에서의 모더니즘도 미술에 대한 '자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미술상의 모더니즘은 하나의 지점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 지점 이전까지는 화가들이 인물과 풍경과 역사적 사건을 눈에 드러나는 그대로 그리고 세계를 나타나는 대로 재현하고자 했다. 모더니즘과 함께 재현의 조건들이 핵심적이게 되며,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미술이 미술 자체의 주제가 된다."(47쪽, 강조는 나의 것) 

칸트의 (모더니즘)철학에서 '인식'이 아닌 '인식의 조건'들이 문제되었듯이, 미술사의 모더니즘 또한 '재현'이 아닌 '재현의 조건'들을 문제삼으며, 이에 따라 미술 자체자 미술의 주제가 되었다. 마치 '사고하는 나'가 우리 생각의 주제가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모더니즘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선구적인 논문 '모더니스트 회화(Modernist Painting)'(1960)에 빚지고 있다(국역본의 번역은 '모더니즘 회화'이며, 이하에서는 '모더니즘 회화'라고 칭하겠다). 단토는 두어 쪽에 걸쳐서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회화론을 간추리고 그에 대해 논평한다(단토의 본격적인 '그린버그'론은 4장에서 다루어진다).

여기서는 이 요약을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회화'(<예술과 문화>, 344-353쪽)과 같이 읽도록 한다. 참고로, 국역본 논문은 <예술과 문화>의 원저에는 빠져 있는 것을 역자가 부록으로 보충한 것이다. 내가 참조한 원문은 4권짜리 그린버그 선집 중 제4권(1995)에 실린 것인데(85-93쪽), 저자가 몇 차례 수정한 논문이어서인지 국역본과는 약간 차이가 난다(역자는 1965년 수정본을 번역했다고 후기에서 밝혔다). 하지만 그다지 큰 차이는 아니다. 아래는 에드 해리스가 감독 겸 주연을 맡아 열연한 영화 <폴락>(2000)에서 그린버그 역을 맡았던 배우 제프리 탬버.

일단 진도를 빨리 빼도록 해야겠다. '칸트주의자'로 분류되는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도 그가 '최초의 진정한 모더니스트'라고 부르는 칸트를 절대적으로 참조한다. 모더니즘이란 무엇보다도 '자깁;핀적 경향의 강화 내지 심화'라고 할 때 칸트의 비판철학이야말로 전범이 아닐 수 없겠다. 그린버그의 직접적인 언급과 단토의 인용을 보라.

"내가 보는 바로는 모더니즘의 본질은 어떤 분야 그 자체를 비판하기 위하여 그 분야의 특징적인 방법들을 사용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그 분야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당 능력 범위 안에서 그 분야를 보다 공고하게 지키기 위해서이다."(<예술과 문화>, 344쪽)

"내가 보기에, 한 분야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 분야 특유의 방법들을 이용한다는 데 모더니즘의 본질이 있다. 이는 그 분야를 전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능력의 영역 속에다 더 확고하게 방호하기 위해서이다."(<예술의 종말 이후>, 47쪽)

이 대목은 <예술의 종말 이후>의 두번째 역자해설에서도 복창되고 있는데, 번역은 좀 다르다: "모더니즘의 본질은 훈련 자체를 비판하는 훈련 특유의 방법을 사용하는 데 있으며, 훈련을 타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훈련의 위상을 더욱 확고하게 확립하기 위해서이다." 대동소이하지만, 'discipline'을 '훈련'으로 옮긴 것은 어색하다. 아울러 두 번역자가 서로의 번역에 대해서는 스크린하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요컨대, 모더니즘의 본질은 '자기비판'에 있다. 예술/미술의 경우, 예술/미술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 그것이 모더니즘이다. 그러한 물음을 버텨내면서 예술/미술의 부피는 좀 졸아들 테지만 더 단단해질 것이다. 마치 자코메티의 조각에서처럼 모더니즘 예술은 비본질적인 것은 다 깎아내버리는 절차를 도입한다. 그리하여 "예술이 제공하는 종류의 경험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다른 어떤 종류의 활동에서도 얻어질 수가 없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 그것이 예술의 과제, 또한 각각의 예술의 과제로 제기되는 것. "이렇게 하게 되면 각 예술들의 권한 영역이 축소될 것은 분명하지만, 그와 동시에 각 예술은 제 영역을 훨씬 더 확실하게 소유하게 될 것이다."(그린버그, 345쪽)

반복하자면, 예술에서 자기비판의 과제는 "각 예술의 효과들 가운데에서 다른 예술의 매체로부터 또는 다른 예술의 매체에 의해 빌어왔다고 여겨질 수 있을 모든 효과를 제거하는 것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각각의 예술은 '순수'하게 되며, 그 '순수성'으로 각 예술의 독자성뿐만 아니라 그 질적 수준도 보장받게 될 것이다. '순수성'은 자기정의를 뜻했기에, 예술들의 자기비판이라는 과업은 철저한 자기정의의 과업이 되었다." 즉, 예술의 '자기비판'의 귀결점은 보다 엄밀한 수준에서의 '자기정의'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 것이고, 그 물음을 견뎌낸다면 새로운 정의가 도출될 테니까(물론 정황적으로, 그러한 물음은 '위기의식'의 산물이다. 그 물음은 기존의 자기정의로는 더이상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없게 될 때 터져나오는 것이니까).

'예술'이란 말을 쓰지만, 그린버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미술'이며 그 중에서 특별히 '회화'에 그는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회화에서의 자기비판은 어떻게 감행되는가? 회화의 매체를 구성하는 여러 한계들, 혹은 조건들 즉, 평평한 표면, 그림 바탕의 형태, 안료의 속성 가운데에서 오직 회화예술에만 배타적으로 고유한 것은 그린버그가 보기에 '평면성' 하나뿐이다(여기에서 그의 악명높은 '평면성 테제'가 주장된다). 그림의 닫힌 형태는 무대예술과 공유하는 조건/제한이고, 색채는 연극뿐 아니라 조각과도 공유하는 기준/방법이다. 하지만, "평면성, 즉 2차원성은 회화예술이 다른 어떤 예술과도 공유하지 않는 유일한 조건이었으므로, 모더니즘 회화는 다른 어떤 것에도 적응하지 않는 한편 평면성에 적응해갔다."(346쪽)

 

 

 

 

그리하여,  (3차원의 사실주의적 환영을 추구했던) 과거의 거장들에 의해 오직 암묵적으로나 간접적으로밖에는 인정될 수 없는 회화의 부정정적인 요소들이 모더니즘 회화에서는 긍정적인 요소들로 간주되게 되었고, 그린버그가 보기에 그 시작은 마네부터이다. "마네는 그림들은 최초의 모더니즘 회화가 되었는데, 이는 그림이 그 위에 그려지는 바탕의 평평한 표면을 마네의 그림들이 솔직하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최적의 사례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마네의 <올랭피아>를 이미지로 가져와 본다.

 

단토의 정리로 재정리하자면, "칸트는 철학을 우리의 지식(=인식)을 추가하는 것으로 본 게 아니라 어떻게 지식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대답하는 것으로 보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칸트의 이러한 철학관에 상응하는 회화관은 사물의 외관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회화가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린버그가 보기에 마네야말로 모더니즘 회화의 칸트였다. '물감이 칠해진 편평한 표면들을 솔직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네의 그림들이 최초의 모더니즘 회화가 되었다."(단토, 48쪽)  

미술사의 상식에 기대에 이야기하자면, 회화에서의 모더니즘은 사진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도전에 직면하여 재현이란 기존의 특권적 규정이 아닌 새로운 규정에 따라 스스로를 재정의한 것이다. 오직 회화만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오직 회화에서만 가능한 것. 그린버그는 그것을 회화의 화면공간, 즉 2차원적 평면에서 찾은 것이다. "그린버그의 논지를 따른다면, '모더니즘 이전의 미술'로부터 모더니즘 미술로의 이행은 회화의 모방적 특질로부터 비모방적 특질들로의 이행을 의미한다."(단토, 48쪽) 그 이행은 회화에서 문학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전에 회화가 전점으로 삼았던) 조각적인 것을 배제하려는 지속적인 시도로서 나타난다. 그러한 시도를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얻게 되는 것인 피에트 몬드리안이나 잭슨 폴록의 추상회화들일까?    

하지만, 그린버그 자신도 지적하고 있듯이 "모더니즘 회화가 지향하는 평면성은 결코 전적인 평면성일 수가 없다. 그림면에 대한 감수성이 고양됨으로써 조각적 환영이나 눈속임 회화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감수성도 시각적 환영은 허용하고 또 반드시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옛거장들은 관객이 그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의 환영을 창조했으나, 모더니스트가 창조한 환영은 관객이 바라볼 수만 있는, 즉 오직 눈으로만 여행할 수 있는 환영이다."(350쪽) 요컨대, 모더니즘 회화가 배제하고자 하는 것은 환영 일반이 아니라 '조각적 환영'(sculptural illusion) 등속이다. '시각적 환영'(optical illusion)'만은 모더니즘 회화에서도 보존되고, 또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회화'의 후반부에서 그린버그는 모더니즘이 과거와의 단절을 뜻하는 건 아니며 오히려 전통의 계속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초현실주의만큼은 그가 용서할 수 없었는데(해서 초현실주의는 그린버그 내러티브의 바깥, '역사의 경계 밖'에 놓여 있다), 이에 대한 단토의 설명은 이렇다: "칸트는 한때 자신의 시대인 계몽주의 시대를 인류가 성년에 도달한 시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린버그도 미술을 이런 방식으로 생각했을지 모르는데, 그래서인지 그는 초현실주의에서 일종의 미적 퇴행을, 괴물들과 무시무시한 위협들로 가득찬 미술의 유아기에서 유래하는 가치들의 재확증을 보았다."(51쪽) 다시 말해서, 초현실주의는 '상상계'의 미술이며 이것은 자기비판이라는 성년의 과제로부터 도피이자 미적 퇴행이라고 그린버는 판단했을 법하다.

이에 대한 반론도 물론 미술 비평계에서는 제기되는바, 주로 할 포스터와 로잘린 크라우스를 주축으로 한 <옥토버>지의 비평가들이 대표적이다. 단토는 '그린버그 비판가'로 두 사람을 지목하고 있는데(50쪽), 크라우스의 <시각적 무의식>(MIT출판부, 1993)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불역본 엔솔로지인 <사진-인덱스-현대미술>(궁리, 2003)이 대신에 번역돼 있다), 포스터의 'Compulsive beauty'(MIT출판부, 1993)는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아트북스, 2005)으로 번역/소개돼 있다(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에 이어서 나는 이 책들을 읽을 계획이다).  

할 포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초현실주의를 위한 하나의 공간이 열렸다. 그것은 이를테면 옛 내러티브(즉 그린버그 내러티브) 내의 수리비용으로서, 현재 이 내러티브를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특권적인 지점이 되었다."(단토, 51쪽) 번역문에서 '수리비용'은 불어단어 'impencé'를 옮긴 것인데 'impencé'는 '수리비용'이란 뜻의 'impence'와는 다른 단어이므로 착오이다(마지막 e에 붙은 강세유무에 주의해야 한다). 'impencé'는 아직 불한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은 듯하지만, 현대철학에서는 자주 나오는 단어로 영어로는 'the unthought'로 옮긴다. 즉, '사유되지 않은 것' 정도의 뜻이다('비사유'라고 옮기는 경우도 있는데, '사유가 아닌 것'이란 뜻이므로 나로선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래 사진은 포스터가 자신의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작품. 

해서 다시 정리하면, "초현실주의를 위한 하나의 공간이 열렸다. 그것은 이를테면 옛 내러티브(즉 그린버그 내러티브) 내에서는 사유되지 않은 것으로서, 현재 이 내러티브를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특권적인 지점이 되었다." 즉, 초현실주의는 그린버그 내러티브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 억압된 것이다. 거기에 예술로서의 정당한 '공민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인 포스터나 크라우스 등 '옥토버 그룹'의 작업이다. 이 또한 언제 들춰볼 것이냐 궁리해보는 것이니, 공부할 꺼리는 무궁이라 아니할 수 없다...

06. 02. 03 - 07.

P.S. 하지만, PC방 이용시간은 무궁이 아니어서 여기서 줄인다. <예술의 종말 이후>는 대체 언제 종말을 고하게 되는 건지 슬슬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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