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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이다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평점 :
그야말로 한 편의 여행 같은 책이었다. 낯선 첫 발을 내디디고 여기가 어딘가 이리저리 둘러보고 생각보다 나랑 잘 맞네? 싶어서 포근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웃다가 감성적인 상태가 됐다가 또다시 책을 덮으면 급 현실로 내려왔다. 여행을 다녀온 기분. 분명한 건 두 가지. 재미있었다는 점, 그리고 저자의 유머 코드가 나와 꽤나 잘 맞는다는 점.
저자는 거의 인생을 여행처럼 살아온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편편의 글마다 일본에서 있던 이야기와 아일랜드에서 있던 이야기가 한 편에 자연스럽게 섞일 리가 없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을 풀어놓으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저자가 내게는 마법사처럼 보였다. 아무 생각도 큰 기대도 없이 책장을 넘기며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스코틀랜드에서 하는 시답잖은 농담을 듣고 홍콩에서 먹방을 찍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처럼 몇십 년에 걸친 저자의 다양한 경험이 여러 편의 글에 녹아들어 한 권의 여행책이 되었다. 중간중간 책 추천도 감초처럼 들어 있는데, 다 읽어보고 싶어졌다. 뜻밖의 책 속 책 영업.
이 책에는 여행을 하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했을 법한 고민이 고루 담겨 있다. 그중 내 이목을 제일 끈 부분은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내용이다. 다음 달에 가족 여행을 앞두고 있어서 기대되는 한편 이만저만 걱정이 되기 때문인데, 이 부분을 읽고 한참을 웃었다. 사람사는거 다 똑같네그려..
"위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안 싸우는 경우가 더 드물다. 하하 호호 웃던 다른 가족들도 옆방에서 싸우고 있다."
어차피 싸울 거, 최대한 덜 싸우는 나름의 팁(?)도 전수해주는 센스 있는 저자였다. 맞아.. 아무거나 괜찮다고 해놓고 막상 가보면 아무거나 괜찮지가 않지.. 가족 여행 계획을 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나도 공감 백만개.
이거 말고도 여러 부분이 흥미로웠는데, 그중 하나가 먹방 부분이다. 여행 이야기를 적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에 갑자기 먹방의 늪으로 빠져서는 각종 별미를 묘사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부분이 제일 좋았다.(해리포터에서도 연회장 씬이 너무나도 좋아서 그 부분만 몇 번씩 반복해서 읽던 사람임)
먹방 묘사 사이사이에 깨소금 같은 감동은 덤이다. 나는 왠지 이런 내용에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은 여행도 살아가면서 사람 사는 곳으로 가는 거고 꼭 멀리 거창하게 가야만 여행이 아닌 것을.. 그리고 여행에서도 결국 사람이 근본이 된다는 사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잘 먹고 잘 살아야지. 살아가면서 맛있는 음식은 단순한 먹을 것 이상이라는 것을 알고 소중함을 아는 저자가 좋았다.
"신림순대타운이라는 곳도 건물이 여럿인데, 쌈지라는 곳을 자주 갔었다. 몇 달 전 그곳 이모님이 "이번 주까지만 해"라면서 마지막이니까 서비스로 평소보다 더 맛있게, 많이 만들어주셨던 기억이 있다. 다 먹지 못하고 남겼는데 그게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다. 이모님,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그냥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여행을 간다고 했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인 여행을, 이 책에서는 아름답게 묘사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생각보다 더 쓸쓸하고 외로운 것 같아 보였다. 여행이라는 동전의 양면이 적절히 섞여 있어서 좋았다. 소위 말하는 단짠단짠같은 거랄까. 좋은 면만 보여줬다면 오히려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여행이 이렇게 좋기만 하다고?! 이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꽤나 긍정적이고 여행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듯했다. 여기가 아니기를 바라지만 지금이 아니기를 바라지는 않는 듯했다. 여기를 부정하지 지금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표지에도 있듯이 비행기는 돌고 돌아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편도가 아닌 왕복으로 다녀와서 다시금 지금의 삶에 충실하고, 또다시 여행을 가기 위해서 일을 열심히 하고, 또 여행을 가고. 그런 과정에서 어쩌면 그런 지금의 연속인 삶이 여행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어디서든 열심히 놀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쉬는 사람 같았다. 어디선가 이 글을 보고있다면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재미있는 글 많이 써주세요.
한 해 한 해 지나갈수록 여행에 대한 마음이 각별해지는 요즘 내게 딱 필요한 책이었다. 이게 여행이다, 이렇게 해야 여행이다 하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는 방식을 찾고 본인의 체력에 맞는 코스를 짜라. 이 정도가 교훈이고 나머지는 재미있는 에피소드, 그리고 공감 가는 내용이었다. 짦은 글 모음이라 마음이 내키는 대로 아무 편이나 펴서 시간 날 때마다 읽어도 좋을 것 같아서 부담이 없었고, 피곤해지지 않아서 좋았다. 자꾸 뭘 가르치고 훈계하고 이런 요즘 세상에 지친 사람이 읽기 딱 좋을 것 같아서, 큰 도약을 위해 잠시 움츠리고 있는 지인에게 선물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