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곳에 오래 머물면 세월이 멈춘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벌려면 장소를 옮기는 것이 가장 좋다.'

- 푸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정수복, '파리 일기-은둔과 변신' 중에서 재인용)

 

맞는 말이다, 프루스트. 당신은 마치 오래 고독해 본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오래 고독을 견디다가 훌쩍 어디로 떠나버린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하기 싫은 일. 하지만 꼭 해야 하는 일. 그런 일을 꾸역꾸역 하는 사이사이로 책 읽기의 욕망은 스며든다. 선금을 받고 해야 하는 일, 마감에 쫓겨 써야 하는 글, 기한이 다 돼서 보내야 하는 문서들...

한 곳에 오래 머물면 세월이 멈춘다. 아주 오래 전 1년 가까이, 지금은 없어진 극장의 간판을 창밖으로 보면서 저녁을 맞은 적이 있었다. 더 오래 전엔 창을 열면 찬 공기나 흙냄새가 들어오는 2층 북창 방에 산 적이 있었고, 아파트 문을 열고 나와 하늘을 보며 담배를 피우던 3-4년 전이 있었다.

그저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래 외롭게 살아 본 적이 있다면 세월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세월을 보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된다. 오래 머물고, 세월은 멈춘 듯하지만, 멈춘 세월의 몇 배속으로 그 사람은 늙어간다.

'시간을 벌려면'이라는 말은 프루스트는 시간을 '비축한다'는 뜻으로 쓴 것 같지는 않다. 그 앞의 '세월이 멈춘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장소를 옮겨서 멈춘 세월을 다시 지나가게 하고 싶었을 테니까. 그리고 고독의 시간을 보내고 그 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싶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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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브 리그(stove league) 
- 프로 야구의 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기간. 계약 갱신이나 트레이드가 이루어지는 기간으로 스토브를 둘러싸고 팬들이 평판을 한다는 데서 생긴 말.

 

권경민 - '드림즈'의 모기업 재송그룹 회장의 조카, 실질적인 구단주.

백승수 - 프로야구 만년 꼴찌 팀 '드림즈' 단장

 

"'나는 힘도 쥐뿔도 없지만 꺾이지 않는다', '나는 신념이 있다' 이런 것들만 아니면 돼요. 그런 애들이 꼭 꺾여. 너무 좋아. 한번만 찔러봐도 신념도 없이 무너지고…"

 

"말을 들으면 당신들이 다르게 대합니까? 말을 듣는다고 달라지는게 하나도 없던데요."

"후회합니다, 그때를. 말을 잘 들으면 부당한 일을 계속 시킵니다. 자기들의 손이 더러워지지 않을 일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조직이면, 말을 안 들어도 일을 잘하면 그냥 놔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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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새 직장을 구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4월 첫날 저녁, 끼니도 거른 채 나는 명동 근처 지금은 없어진 허름한 극장의 앞 자리에 페데리코 펠리니에게서 제목만 빌려온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앉아 있었다. 금요일 이른 저녁이라서 모두 술집 앞을 기웃거릴 무렵이어서였는지 극장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마음 속으로만 오래 좋아했던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들은 날이어서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도 충분히 우울할 수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 결국은 파국을 맞게 되는, 오래도록 나와 같은 꿈을 꾼 한 인간의 처음과 끝 내레이션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김지운, 『달콤한 인생』,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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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9월 서른 여섯 정현종이 펴낸 시선집 『고통의 축제』 뒤에 붙인 해설 '사물의 꿈'에서 서른 여덟 김우창은 정현종의 시 '완전한 하루'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 '사랑이 크면 외로움이고 말고'

외롭다는 것은 사랑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고, 사랑이 크다는 것은 그만치 외롭다는 말이다. 또 나아가서 크게 사랑한다는 것은 외로움을 사랑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 우리가 생의 현실에서 외로이 소외된 채로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생존, 나아가서 모든 사물이 그러한 소외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 즉 사랑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이 크면 외로움이고 말고.' ……

 

서른 여섯과 서른 여덟. 나는 그 무렵 시중에 나온 거의 모든 참고서와 문제집을 풀어대고 밤새 유명하다는 언어 영역 강사들의 동영상을 보면서 몇 년 내내 3학년 아이들의 전국연합학력평가 점수가 수직 상승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그 나이답게 우쭐한 마음에 휴일도 없이 나를 혹사하면서도 마흔이 오리라는 생각도 없이, 외로움을 사치라고 여기면서 가끔의 폭음으로 그것을 방부 처리하고 있었다. 외고에서 오퍼가 온 것도 그 즈음이라 더욱 기고만장해 있었을 테고.

  

대학교 1학년 가을에 읽은 저 시집에서 내게 남은 구절이 '사랑이 크면 외로움이고 말고.'였다. 그 깊은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정현종이 풍기는 위트 섞인 상실감이 나는 좋았던 것 같다. 그 후 20년이 훨씬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 의미를 아주 조금씩 알게 되었고, 가끔씩 그 구절을 되뇌는 밤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 두 사람보다 열 살이나 더 먹고 나서야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 있었던 셈이다.

 

주문진에 살던, 동해에 사는 J에게서 가끔 문자가 왔었다.

"너무 많은 걸 바란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정작 상대방에겐 너무 큰 기대였던 거겠죠."

 

나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 계절 동안 영화만 수십 편 본 적이 있었다. 책을 읽기에는 너무나 많은 생각이 그 행간에 끼어들어서, 하루에 한 두 편씩, 주말에는 너댓 편씩 영화를 보다가, 힘들면 원고지에 띄어쓰기 없이 편지인지 일기인지 모를 글을 몇십 장씩 썼다가, 월요일 아침에는 그걸 고스란히 직장 복사기 옆 파쇄기에 밀어넣고 한 주를 말소해 버린다는 생각을 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너무 많은 걸 바란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정작 상대방에겐 너무 큰 기대였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사랑이 깊어서 외로웠던 사람이고,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에도 세상에도 타협하지 않으려는 사람일 것이다. 그만큼 이별의 예감도 먼저 느끼지만, 그걸 드러내지도 못하는 상처적 체질의 사람.

하지만 지나고 나면 알게 되듯 사랑은 늘 사랑하는 사람의 뒤통수에 가서 고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른 어딘가에서 벌써 그 흔적을 알콜솜으로 지우고 너무 쉽게 또다른 사랑을 만날 것이다. 사람에 따라 마음에 굳은살이 박히는 시기는 천차만별이라서, 누구는 아주 일찍 적당한 타협으로 행복을 찾고, 누구는 아주 오래 고통스러워하면서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늙어가는 운명을 택하기도 한다.

 

김금희의 소설 '너무 한낮의 연애'의 양희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때 나는 J에게 정현종의 그 말을 전했었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이고 말고

그러지, 차 한 잔 하고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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