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9월 서른 여섯 정현종이 펴낸 시선집 『고통의 축제』 뒤에 붙인 해설 '사물의 꿈'에서 서른 여덟 김우창은 정현종의 시 '완전한 하루'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 '사랑이 크면 외로움이고 말고'

외롭다는 것은 사랑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고, 사랑이 크다는 것은 그만치 외롭다는 말이다. 또 나아가서 크게 사랑한다는 것은 외로움을 사랑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 우리가 생의 현실에서 외로이 소외된 채로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생존, 나아가서 모든 사물이 그러한 소외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 즉 사랑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이 크면 외로움이고 말고.' ……

 

서른 여섯과 서른 여덟. 나는 그 무렵 시중에 나온 거의 모든 참고서와 문제집을 풀어대고 밤새 유명하다는 언어 영역 강사들의 동영상을 보면서 몇 년 내내 3학년 아이들의 전국연합학력평가 점수가 수직 상승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었다. 그 나이답게 우쭐한 마음에 휴일도 없이 나를 혹사하면서도 마흔이 오리라는 생각도 없이, 외로움을 사치라고 여기면서 가끔의 폭음으로 그것을 방부 처리하고 있었다. 외고에서 오퍼가 온 것도 그 즈음이라 더욱 기고만장해 있었을 테고.

  

대학교 1학년 가을에 읽은 저 시집에서 내게 남은 구절이 '사랑이 크면 외로움이고 말고.'였다. 그 깊은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정현종이 풍기는 위트 섞인 상실감이 나는 좋았던 것 같다. 그 후 20년이 훨씬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 의미를 아주 조금씩 알게 되었고, 가끔씩 그 구절을 되뇌는 밤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 두 사람보다 열 살이나 더 먹고 나서야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 있었던 셈이다.

 

주문진에 살던, 동해에 사는 J에게서 가끔 문자가 왔었다.

"너무 많은 걸 바란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정작 상대방에겐 너무 큰 기대였던 거겠죠."

 

나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 계절 동안 영화만 수십 편 본 적이 있었다. 책을 읽기에는 너무나 많은 생각이 그 행간에 끼어들어서, 하루에 한 두 편씩, 주말에는 너댓 편씩 영화를 보다가, 힘들면 원고지에 띄어쓰기 없이 편지인지 일기인지 모를 글을 몇십 장씩 썼다가, 월요일 아침에는 그걸 고스란히 직장 복사기 옆 파쇄기에 밀어넣고 한 주를 말소해 버린다는 생각을 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너무 많은 걸 바란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정작 상대방에겐 너무 큰 기대였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사랑이 깊어서 외로웠던 사람이고,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에도 세상에도 타협하지 않으려는 사람일 것이다. 그만큼 이별의 예감도 먼저 느끼지만, 그걸 드러내지도 못하는 상처적 체질의 사람.

하지만 지나고 나면 알게 되듯 사랑은 늘 사랑하는 사람의 뒤통수에 가서 고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른 어딘가에서 벌써 그 흔적을 알콜솜으로 지우고 너무 쉽게 또다른 사랑을 만날 것이다. 사람에 따라 마음에 굳은살이 박히는 시기는 천차만별이라서, 누구는 아주 일찍 적당한 타협으로 행복을 찾고, 누구는 아주 오래 고통스러워하면서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늙어가는 운명을 택하기도 한다.

 

김금희의 소설 '너무 한낮의 연애'의 양희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때 나는 J에게 정현종의 그 말을 전했었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이고 말고

그러지, 차 한 잔 하고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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